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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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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에서 말하는 젊은이는 누구일까? 흔히 요즘 젊은이들은 안돼.” 혹은 요즘 젊은이는 발칙하다.”라고 누구나 쉽게 지적하지만, 단순히 젊은이라는 집단을 ‘20대부터 30세 정도인 남녀로 정의할 수 없는 까닭이 저자의 젊은이 담론에 서술되어 있다. 저자는 젊은이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일본에서 논의된 젊은이론과 젊은이 담론(젊은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젊은이에 대한 정의를 함부로 내리지 않는다. 사회학자로서 젊음또는 젊은이라 부르는 것들에 대한 해체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변증법이니 하는 어려운 철학적 사유를 갖다 붙이지 않아도 아주 일상적인 대상에 대해 해체하고 이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낸 그의 젊은이 담론은 사회학자로서 혹은 연구자로서 지녀야 할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의 치밀함은 젊음이론의 변천을 도표로 정리한 젊은이론의 계보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데, 사회적인 흐름을 떠나서 단지 연령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지역, 빈부, 성별 차이 등을 모두 무시하고 젊은이로 간주해 버리는 논의가 현실성을 가질 수 없는 이유를 명확하게 밝힌다. 따라서 이 책은 일본의 거품경제 붕괴 이후 일본 사회에서 살아온 젊은이들이 현대 사회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또 그 삶이 예전과 얼마만큼 달라졌는지에 초점을 두고 젊은이에 대해 논한다.

저자가 조작적으로 정의한 일본의 젊은이는 끝없는 불황, 비좁은 취업문, 부조리한 사회제도에도 저항하지 않는 행복한 젊은이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특히 1억 명 모두가 젊은이가 되는 시대, 우리는 그 과도기에 살고 있기에 이제 젊은이가 연령에 관계없이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1991년의 거품경제 붕괴 이후, 이를테면 모두가 주택을 보유하고 아버지는 회사에서 정년 때까지 일을 하고, 어머니는 전업주부로서 자녀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중산층의 꿈이 무너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런 시류와 더불어 젊은이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p.309).”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젊은이론은 비단 일본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1991년의 사건을 1997년의 우리나라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이후로 바꾸면, 우리나라에도 동일한 젊은이론이 적용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도쿄에서 서울까지 2시가 30분이라는 짧은 비행시간 만큼이나 두 나라는 사회적으로도 가깝다. 때문에 이 책의 해제를 쓴 오찬호 박사는 일본과 한국이 상당히 유사한 배경을 지니고 있지만, 저자가 말한 행복한 젊은이들일본에만 존재하는 결정적 차이를 논하며 부럽다고 논한다.

그렇다. 이 책을 덮는 시점에서 나 또한 부러움을 느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복잡하게 느껴지는 사회학을 치밀하게 하지만 위트있게 서술한 저자의 역량이, 다른 하나는 비슷한 절망의 시대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공동의 인식이 부러웠다. ‘왠지 행복하고, 왠지 불안한 시대’. 멋진 논리로 치장하지 않아도 그 문장 하나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그의 진단이 더 아파하라거나 인문학으로 돌아가라거나 하는 메시지가 만연한 우리나라에 진정한 젊은이에 대한 응원으로 들리는 까닭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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