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의 심리학>이란 책 제목을 보니 불현듯 생각이 난 건데 

대선이 끝난 후 뉴스와 그 비스꼬롬한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몸의 칩거 뿐 아니라 정신의 칩거에까지 돌입했다.


혼자 친하다고 생각했던 한 정치인에게 "그냥 하던 거나 계속하시라"는 말을 들은 참이었다.


"욱!!!"       


했다가


"그러지 뭐." 


한다.


문제는 "그러지 뭐" 하기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인데, 이 시간 동안 날 괴롭힌 건 방대한 양의 내 방어논리였다. 

수많은 입장에서 스스로를 공격했다가 스스로 방어하는..

한바탕 전쟁터로 내 뇌를 빌려 주고 난 후에 느낀 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책을 괜히 읽었다...는 거다.


내가 읽은 책의 양을 내 지식이라고 - 물론 말도 안 되지만- 가정했을 때

내가 그 지식을 감당할 만한 그릇인가, 하는 물음에 당도해 버렸을 때

자신에게 쏟아지는 셀프 냉소를 어떻게 넘어서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



<새의 선물> 진희처럼 '보여지는 나'와 '관찰하는 나'로써 나를 분리해 남을 관찰할 때는 꽤 유능하고 위트있던 재능이던 것이

 그 관찰 대상이 "나"인 관계로, 당황스럽고 피로하다.  


이런 상태의 요즘 나에게 위로라면 위로, 경고라면 경고로 다가온 책이

로맹가리의 <흰 개> 이다.


완벽 감정이입.

그럼 내 끝도 결국은...


소설가가 존재와 사물의 본성을 다른 사람보다 잘못 판단할 때가 많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소설가는 그것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나는 살면서 만나거나 가까이에서 산 모든 사람을 언제나 상상했다.

상상 전문가에게는 그 편이 훨씬 쉬운 일이고 덜 피곤한 일이다.

가까운 사람들을 알려고 애쓰거나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들을 지어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깜짝 놀랄 일이 생기면 그들을 끔찍이도 원망한다. 그들이 자기를 실망시켰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이 자기 재능에 못 미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흰 개>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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