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와! 이 얼마나 멋진 표현입니까. 김연수의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를 펴자마자 볼 수 있는 첫 장의 문장입니다. 너를 생각한다는 그 말에서 ‘너’는 소설 속의 여러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소설의 시작은 굉장히 몽환적인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배경이 외국이고, 말하는 사람은 카밀라 포트만이라는 외국인이고, 그녀의 남자친구가 시를 읊는 사람인데, 또 그 사람은 유이치라는 이름의 일본사람이다 보니, 소설은 굉장히 이국적이며 몽롱한 분위기를 절로 만들어 냅니다. 책 표지의 느낌처럼 말이죠. 마치 국내에 들어와 번역된 외국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어떤 계산된 서술을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도가 작가 스스로가 의도한 것이 맞는지, 아닌지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런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카밀라는 한국인입니다. 어렸을 때 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친어머니를 찾기 위해 한국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살았던 지역을 둘러보며 출생의 비밀, 죽음을 둘러싼 의혹, 아픔과 고독, 사랑과 배신 등, 자칫 신파극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 진행을 보이기도 하는데, 또 본격적으로 그렇게 흘러가진 않습니다. 또한 사건의 진실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미스터리한 부분들에 대한 풀이로 흘러가는가 싶더니,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감동과 슬픔을 말하려는 듯해 보이기도 하고, 또는 현실을 뛰어넘는 어떤 감정, 사고,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꽤 혼란스러운 전개를 보입니다. 이건 아마도 제 자신이 이 소설을 잘 정리해내지 못하고, 아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어중간한 감상만 남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은 한참을 돌고 돌아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관광객이 될 순 없지만, 유리창 밖에서 안에 있는 우리를 바라보며 관찰하게 합니다. 깊고 어둡고 춥고 나약해서 두렵기도 한 심연의 세상을.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유리창을 통해 돌고 돌며 관찰하는 소설의 시점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이질감을 느끼게 하다가 나중에는 그래도 무언가를 공감할 수도 있겠다는 묘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겨난 감정도 확신할 수 없는 모호한 것이라, 이 부분도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잦은 시점의 변화가 야기한 혼동이라고 봅니다. 특히 어머니의 시점을 통해 말하고자 한 부분에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안개가 항구를 바라보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준’ 듯한 느낌이라 확신할 수 있는 어떤 사실까지 더욱 희뿌옇게 만들어 결국엔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 둡니다. 어떠한 윤곽도 그려낼 수 없어 그대로 붕 떠버린 느낌. 그래서 다양한 시점의 변화가 오히려 소설의 몰입을 저해하고 말하기 힘든 어떤 감정을 더 말하기 힘들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억을 회상하는지, 현재를 묘사하는지, 모호한 장면들이 이야기의 방향을 흐트러트리고 있는데, 분명 무언가를 의도한 심오한 장치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한 제 자신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시적인 표현의 멋진 문장들을 만날 땐 정신이 번쩍 들어 가슴을 쳐가며 경청했습니다. 이해하긴 힘들지만 참으로 멋지다는 막연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두 번, 세 번 읽어야만 했던 문장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소제목으로 예를 들자면, ‘평화와 비슷한 말, 그러니까 고통의 말’, ‘적적함, 혹은 불안과 성가심 사이의 적당한 온기’, ‘짧게 네 번, 길게 세 번, 짧고 길고 길고 짧게, 짧게 한 번’과 같은 표현입니다. 이런 문장들이 시종일관 음울하게 흘러가는 사건들 속에서 간간히 등장하며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감정, 그런데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서 구체적인 형태를 볼 수 없는 어떤 감정을 그리려 합니다. 이런 표현을 시적인 아포리즘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굉장히 함축적인 표현으로 서정적인 무언가를 말하려 했기 때문에, 같은 문장을 짧게는 두 번, 길고, 길고, 길게는 다섯 번 정도 반복해서 읽어야 겨우 그런 표현이 갖는 어떤 의미에 대해 어렴풋한 느낌, 매우 미묘한 차이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렇게 멋진 표현들이 소설의 큰 이야기 흐름에 합류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보단 덜한 느낌이라, 역시 문제는 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느낌, 참으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느낌이라, 무언가에 대한 무언가라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머릿속에는 바로 문장으로 옮길 수 있는 생각들도 있었지만, 도무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혹은 막연한 공포 같은 것도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공책의 여백이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오로지 막막할 뿐이라면 그 막막함에 대해 쓰라고 유치치는 말했다. (56쪽)

 


    아직 늙지 않은 사람들과 완전히 늙은 사람들,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과 완전히 죽은 사람들, 그 사이에 갓 태어난 나와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인 엄마가 서 있었다. (75쪽)

 


    그러고 나니까 알겠더군요. 아름다움이란 솜씨의 문제이고, 솜씨는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라는 걸. 그렇구나. 괴로웠다고 생각하면 괴로운 글을 쓰는 것이고, 행복했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157쪽)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요즘 세상에는 값싸게 즐길 수 있는 고독이란 게 없어. 돈을 지불하지 않은 고독은 사회 부적응의 표시일 뿐이지. 심지어는 범죄의 징후이기도 하고. (244쪽)

 


    그렇긴 해도 서른이 되면서 뜨겁고 환하던 낮의 인생은 끝이 난 듯한 기분은 들었다. 그다음에는 어둡고 서늘한, 말하자면 밤의 인생이 시작됐다. 낮과 밤은 이토록 다른데 왜 이 둘을 한데 묶어서 하루라고 말하는지. 마찬가지로 서른 이전과 서른 이후에는 너무나 다른데도 우리는 그걸 하나의 인생이라고 부른다. (250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10-11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