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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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 시간의 계곡



작별 인사를 미처 건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간 여행


가즈오 이시구로, 테드 창과 무라카미 하루키를 잇는 놀라운 작품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의 시간의 계곡은 데뷔작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방대한 분량과 탄탄한 세계관이 무한히 펼쳐진다. 시간의 계곡은 우리가 한 번쯤 고민해 봤을 법한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무엇을 바꿀 것인가? 미래를 알게 된다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철책으로 둘러싸인 마을 밸리는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진 산맥으로 나뉜다. 동부 밸리는 20년 후의 미래가 펼쳐지고, 서부 밸리는 20년 전의 과거가 펼쳐진다. 이처럼 마을은 양방향으로, 한쪽에서는 시간이 흐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과거가 반복된다. 이처럼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지만, 그 흐름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다. 마을은 자문 기관과 헌병의 감시 아래 철책으로 단절되어 있으며,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하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깊은 슬픔에 잠긴 사람들만이 엄격한 자문관의 허가를 받아 철책을 넘어 과거나 미래를 방문할 수 있다. 방문자들은 검은 마스크를 쓰고 철책을 넘는다. 그들이 누구인지, 왜 왔는지 마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은 잃어버린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시간을 거슬러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이들이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뿐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아름답다.



주인공 열여섯 살 소녀 오딜은 네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어머니는 시청사 지하에서 서류 정리를 하지만, 똑똑한 딸 오딜만큼은 고위 공무원인 자문관이 되기를 바란다. 오딜은 진로를 결정해야 할 나이가 되었고, 학교에서 두 명을 선발하는 자문 기관 실습을 하기 위해 피슈그뤼 선생님에게 추천을 받아야만 했다. 선생님은 에세이를 기반으로 추천자를 결정한다며, 오딜은 무슨 내용을 써야 하느냐는 질문에 '다른 벨리에 방문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디로 가고 싶은가?' 매해 같은 에세이 주제를 낸다고 했다.


오딜은 과거나 미래를 방문해도 위로가 되어 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안전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슬픔을 달래는 방법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아무리 시간을 되돌리려 해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 있기에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딜은 우연히 동쪽 마을에서 온 방문객을 목격한다. 놀랍게도 그들은 오딜의 친구 에드메의 부모였다. 그 순간 오딜은 에드메의 슬픈 운명, 죽음이 곧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은 마음과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절망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다. 우여곡절 끝에 오딜은 자문 기관에서 자문관이 되는 훈련을 받게 되며, 예정된 사건을 바꾸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왜곡하여 마을 전체에 혼돈과 멸망을 초래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오딜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고 싶은 열망과 마을의 질서를 지키려는 책임감 사이에서 깊은 갈등에 빠진다. 과거를 바꾸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파장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시간의 질서를 지킬 것인지, 아니면 운명을 거스르고 사랑을 선택할지 오딜의 선택에 따라 시간의 계곡에서 에드메와의 사랑을 이룰지, 시간의 흐름대로 이별을 기다릴지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2부에서는 오딜이 헌병이 되어 일어나는 일들이 그려진다. 오딜은 자문관이 되길 바란 어머니의 삶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지만, 직접 마을의 법과 질서를 지키는 위치에 서면서 복잡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거대한 세계의 비밀을 풀어헤쳐 간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세계에서 사랑과 이별, 운명과 선택을 마주하는 깊이 있는 이야기.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한 마을에서, 철책을 넘어선 이들이 남긴 흔적 속에서, 오딜이 내린 선택의 무게 속에서.



원고 공개 직후, 여러 출판사들이 이례적인 선인세를 제시하며 계약 경쟁을 벌였고, 출간 이후 캐나다 주요 매체에서 베스트셀러로 올랐다. 또한, 뉴욕타임스, 가디언, 월스트리트저널 등에서 극찬을 받으며, 워싱턴포스트의 2024년 소설 50선에 선정되었다. 이 작품은 전 세계 7개국에 판권이 수출되었고,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영상화 판권을 계약하여 제작 중이다. 현재 하워드는 두 번째 소설을 집필하고 있어 다음 출간이 무척 기대된다.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는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겪은 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이라는 주제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을 위한 시간 여행 작품을 쓰게 되었다. 끝없는 선택의 딜레마와 피할 수 없는 상실을 보여주는 설정이 인상적이었다. 시간의 계곡은 시간을 넘나드는 이야기이지만, 결국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선택을 할 때 운명이 어떻게 바뀌는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슬픔과 후회에 대해 자세하게 풀어주었다. 시간의 계곡은 나에게 SF 소설보다는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모든 이들을 위한 위로였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와 선택의 무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 작품이었으며, 시간과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아름답고도 가슴 아프게 풀어낸 작품을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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