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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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면을 믿는가. 진심을 믿는가. 혹은 표면과 내면을 구분할 수 있는가. 그냥 마음과 진짜 속마음을 가려낼 수 있는가.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에 대해 말하기 전에 이러한 몇 가지 질문을 겹쳐 보고 싶었다. 누군가가 언제나 표면적이고 겉도는 말만 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믿을 수 없는 사람일까. 내면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과연 누군가의 내면을 알 수 있기는 한가? 한국식으로 포장마차에서 코가 삐뚤어지게 소주병을 기울이며 ‘속 얘기’를 밤새도록 하고 나면, 그를 ‘깊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식탁 위엔 샤갈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니스 해변 위에 인어가 떠 있는 그림이었다. 아마도 서명은 가짜일 것이다. 하지만 피터가 전에 말한 대로 무슨 상관인가. 샤갈의 진품이나 다름없거나 아니면 그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 딱 알맞은 정도의 허점이 있으니. 포스터는 결국 수천 장 중에 한 장일 것이다. 맑은 밤에 떠 있는 저 천사는, 대부분의 천사는 어떤 서명이라도, 아무리 위조한 서명이 있더라도 가짜가 되지는 않는다.” (31-32쪽)


<가벼운 나날>은 책장을 펼친 순간부터 마지막장을 덮을 때까지, 어찌되었건 비리와 네드라의 이십 년 남짓한 세월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나는 한 번도 그들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성미 급한 독자는 이 부부의 겉도는 듯한 대화에, 뜬구름 잡는 듯한 행동에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 같은 대사대로, 그러니까, ‘네 진짜 마음이 뭐야?’라고 묻고 싶은 이 부부. 그 나름 평범한 사람들, 수천 수만 중의 하나일 듯한, 그들의 고유성이나 시그니처는 가짜일 수 있는 그들. 하지만 그 “딱 알맞은 정도의 허점”을 가진 그들은 아무리 위조한 시그니처를 보여도 그들 자체가 “가짜가 되지는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알 듯 모를 듯한 부부의 삶을 따라가면서, 내가 지금껏 만나 온, 나와 다른, 그래서 알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몇몇 사람들에 대해 아주 조금 이해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이 사람들이 혹시 비리와 네드라와 흡사한 성향은 아니었을까, 하면서. 가령 이런 사람들. 어제는 A에게 사랑을 말하고, 오늘은 B에게 깊은 애정을 표하며, 어제 A와 나눈 사랑이 오늘 B에 대한 감정과 모순되지 않는 사람들. 내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선에서는 A에게 말한 사랑이 ‘진짜’라면, B에게 그럴 수 없고, B에게 보인 애정과 집착을 생각하면 A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말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아함이 떠나지를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일부일처제에 충실해야 한다거나, 불륜은 천하의 범죄라거나 하는 말이 아니다. A에게도 진심, B에게도 진심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들은 ‘매 순간’이 그저 그대로 진심이었다면, 이 가벼운 진심은 결코 제대로 된 진심이라 여겨줄 수 없는 것인가?


비리와 네드라는 오랜 결혼 기간 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외도를 한다. 그리고 강가의 그들의 집으로 돌아오면 또 그대로 충실하다. 비리는 나무랄 데 없는 아버지이고, 네드라도 아이들을 아끼며 집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이들은 진심이 누락된 사람들인가, 아니면 단속적이지만 매순간마다 충실해서 그들의 진심은 ‘진짜 진심’이 아니라고 오해받게 되는 것일까.


훌륭한 소설은 인생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밀란 쿤데라가 말했듯 소설이 안개 속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라면, 나에게 <가벼운 나날>은 비리와 네드라와 같은 짙은 안개 너머의 사람들에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어준다. 그렇지만 이 가깝게 다가간다는 말은 결코 몰입되거나 밀접해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소설이 비리와 네드라를 말할 때의 미묘한 거리감은 그들의 주변사람들에게도 비슷하게 유지된다. 그들의 내면까지 들어가 속마음을 꺼내 보이는 일은 없다. 아니, 그 구분될 속마음 자체에 이 소설은 관심이 없다. 그들은 표면이 내면이고 그것이 전부이다. 가볍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누구도 이 인물들이 온통 거짓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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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샴푸 정말 좋아요.” 그녀가 선언하듯 말했다. “스웨덴 건데 본윗 텔러스에서 사죠. 정말 좋아요.” (36쪽)


소설적 드라마도, 기승전결도 없는 이 소설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리얼’하다. 피터 부부와 함께 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네드라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놀랍게도) 송어낚시 얘기 바로 다음이다. 마치 부조리극처럼, 실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이렇게 불쑥불쑥, 집중할 주제도 정해놓은 소재도 맥락도 없이 부산하게 이어지지 않은가. <가벼운 나날>에서는 이런 대화가 정말 귀신같이 자주 등장한다. 인물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으면서, 중간중간 빛나는 통찰까지 보여주며, 궁극적으로는 리얼한 대화들.


제임스 설터를 말하면서 그의 표현이나 문장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의 정수를 쏙 빼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흡사 시와 같이 압축되고 농축된 문장들은 간혹 번역의 불가능성을 생각하게도 한다. 시를 번역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듯, 설터의 어떤 문장들은 이 불가능성에 가까이 있다. (이 문장들 앞에서 번역자의 고충은 짐작만으로도 내 머리가 빠지는 기분이 든다.) 앞 문장과 다음 문장이 얼핏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은 것 같은 거리를 유지한 채 툭툭 던져지는데, 그 가깝지 않은 거리 사이에서 섬광이 일고 장면은 번뜩인다.


독자는 커튼과 창문에 어린 빛을 좇다가 일순간 네드라와 지반의 정사장면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 다음 순간 집에 도착해 네드라와 비리의 일상적인 대화를 듣는다. 흔히 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흡인력 있는 서사는 없고, 장면은 수시로 전환되며 대화는 종잡을 수 없다. 그런데 이 파편적인 것 같은 장면들, 부서지는 대화들이 사실상 실제 일상에서 이뤄지는 것들과 얼마나 놀라우리만치 닮아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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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삶은 미스터리였다. 숲과 비슷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되고 묘사될 수 있었지만, 가까이 갈수록 흩어져 빛과 그림자로 조각났고, 그 빽빽함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형태가 없었고, 경이로울 정도의 디테일만이 어디나 가득했다.” (51쪽)


“그들의 삶”처럼 <가벼운 나날>이라는 소설도 이 서술에 부합한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되지만, 그 안에는 형태가 없고 그저 경이로운 디테일이 가득하다. 그들의 삶을 그리는 소설이, 형태에서까지 삶을 담아버리는 상태. 소설의 한 문장처럼 “삶은 날씨고 삶은 식사다.”(52쪽) 삶은 매일 비슷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고, 조금씩 변하면서 훌쩍 시간이 흐른 후에야 얼마나 변해왔는지를 짐작만 할 수 있다. 나는 <가벼운 나날>이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은 이 소설이 뛰어나지 않다거나 훌륭하지 않다는 말이 전혀 아니다. 위대하지 않은 것들, 범상한 것들, 영웅적이지 않은 것들만을 주목하고 내내 관찰한 이 소설에게 위대하다는 표현은 걸맞지 않은 수사일 것이다. <가벼운 나날>은 대체할 수 없는 표현으로 가득하다. 비리와 네드라는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고 달리 말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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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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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소설을 설명하는 문장들은 어느새 이런 말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잡고 나서 바로 끝까지 다 읽었다"

"특출한 이야기꾼의 입담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야기의 매력을 잊었던 것을 상기시킨다"


모두 동의합니다. 저 역시 잡고 끝까지 다 읽었으며, '이야기꾼의 입담은 이런 것이었지' 했고, 새삼 이야기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이야기해보고 싶은 가볍게 넘기기만은 아까운 지점, 소설을 둘러싼 후일담을 비롯한 이야기들을 생산하는 지점들이 있다는 것, 그것들에 대해 몇가지 남겨볼까 합니다.

 
 

- 인생의 실패, 흩어진 실패자들도 모이면 새로운 시작점이 된다?

 
인생이 실패한 가족 구성원, 그것도 평균연령이 49세인, 반 백, 인생을 잘 꾸리기에도 충분히 말아먹기에도 충분한 49년의 시간을 평균치로 살아본, 이 가족 구성원들.

이미 '빵'에 5번은 다녀온 오함모, 신용불량자는 옛말 이젠 노숙자가 코앞인 영화감독님, 이혼 경력 두 번에 또 다시 바람을 핀 전력으로 딸까지 데리고 온 미연. 세 남매도 수상스러운데 대수롭지 않다는듯 그들을 닭죽으로 맞아들이는 어머니도 전적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런데, 서로 죽고 지지자는 곳이 될 것 같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끊임없이 고기를 먹여대는 통에 말입니다. 그 우직하고도, 사실 딱히 뾰족한 수는 될 수 없는 고기먹이기가 가져온 효과랄지 결과랄지는 생각보다 대단합니다.

오함모와 감독님이 싸울 때 날아다니던, 몸에 척척 붙던 닭죽만큼, 늘어붙은 게 더 맛있다던 그 냄비바닥의 닭죽처럼, 이 도무지 붙어 있지를 못하던 형제도 어느새 말도 섞습니다. 가족간의 증오, 특히나 실패한 가족 구성원에게는 더 칼날같은 증오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말을 섞는다는 단계가 그리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여동생 미연의 딸 민경이 사라졌을 때는 이 두 형제가 따로 또 같이 라도 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까지 합니다. 여기서는 같은 목표로 단결한다는 것도 놀랍지만, '움직인다'는 점에 훨씬 놀랍습니다. 실패자, 더 나락으로 떨어진 곳도 없어보이는 실패자가 움직이게 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권태와 무기력을 나도 모르게 이기고 나설 수 있는 한걸음은, 닭죽같은, 누릿내나는 고기반찬만큼 진득한 그 무엇을 필요로하기 때문입니다.

 

- 나도 너도 폭로하는 이 수상한 가족. 폭로의 효과는 ?

 
작가 스스로가 "막장 드라마"라 표현할 만큼 이 가족의 폭로는 끝이 없습니다. 서로를, 자기 자신을 폭로해보입니다. 어머니의 과거를, 내연의 관계를, 미연의 20대를, 오함모와 미연의 출생을, 감독님이 오함모에게 진 빚을. 기척도 없이, 스스럼도 없이, 종종은 울기도 하고 발광도 하면서. 재미있는 것은 폭로를 대하고 상처와 충격으로 문을 닫아버리는 가족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법도 한 실패자들, "인생망종" 들인데도요. 어느 새, 이 지긋지긋한, 부끄러운 과거의 가족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말 것은, 닭살 돋는 가족애의 현장은 결코 아니라는 것. 이 소설이 범상치 않은 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오히려 동지애나, 같은 계층 안에서 서로 살아내기 위해 쓰는 배려와 노력에 가깝게 보입니다.

폭로하고 보니 다시 보이는 것. 그러고 보니, 나의 상처와 지금의 난관도, 저렇게 꺼내어 놓고 보니, 모두에게 그렇다는 것, 그러니 내 작은 행동 만이나마 그런 상처를, 난관을, 조금이라도 낫게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하자는. 늘어붙은 닭죽같은 이 가족의 움직임은 이렇게 변해가는 까닭에 "늘어붙은 게 더 맛있다"는 말.

 
 

- 행동이 악취와도 같은 사람, 뿌-웅, 하는 방귀와도 같은 내보임
 

인간 망종 중의 망종, 오함모가 뿌-웅, 하고 자꾸만 뀌어대는 방귀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방귀야 누구나 뀌고 누구나 냄새납니다만, 자신의 행동, 어떤 발화의 시점에서 방귀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내 모든 행동거지가 방귀처럼 보인 경험을 안다면, 가볍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하는 일마다 좋지 않은 행색으로 끝나고, 번듯하기는 커녕 주위의 수근거림만 남게 되는 별 볼 것 없는 인생들은, 내 말이 사회에 어떤 힘도 없는 것을 넘어서서, 방귀처럼, 다만 뿌-웅 하는 소리와 냄새처럼 느껴진다고 하면, 과장일까요.

오함모는 이 방귀를 넘어서서, 집을 박차고 인생의 마지막 역전골을 날리러 일어섭니다. 아직도 방귀가 보여주는 것이 가볍거나 더럽기만 한 것일까요. 어머니가 고기를 많이 먹인 덕에 냄새도 역시 고약하겠지만, 싸우러 나갈 힘이 생겼다는 축포인, 이 냄새나는 고약한 뿌-웅은 여전히 가볍지 않습니다.

 

- 더없이 실패한, 그러나 삶이 몸과 얼굴에 새겨진, 더없이 투명한 사람들

 감독님이 꿈꾸거나 바라보는 세상은, 아마도 투명함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것은 순수함이나 순진함, 티없음 같은 단어와 동의어가 절대 아닙니다. 캐서린이 두 번에 출산 경력을 배에 지니고 살듯, 미연의 새 남자가 얼굴에 '생활력'을 지니게 되듯, 이민생활을 끝낸 캐서린 얼굴에 '플리이즈'가 새겨지듯, 얼굴을 척 보면 그 사람의 삶이 그려지는 세상, 그러한 투명함, 몸과 얼굴의 기록이 결코 자신을 배반하지 않는 사람들, 오감독이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 같습니다.

 
실패했다면 실패의 기록이, 뭔가와 싸워왔다면 싸움의 기록이 몸과 얼굴에 남는 사람들. 사람 나이 마흔을 넘기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도 있듯, 오감독은 이 겸손한 몸의 기록을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요. 실패했고, 사회의 바닥 중의 바닥이어도, 얼굴을, 삶을 배신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에로영화를 찍게 되는 그의 얼굴에도 "좀 더 벌려봐"가 새겨질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왠일인지 굳건해보입니다. 역시 어머니의 고기는 효과가 있는 모양입니다.

  

- 실패자의 긍정은, 성공자의 긍정과 다르다

 
여타의 소설에서 실패자의 긍정을 성공자의 긍정과 구분하지 않거나 뒤섞어버리거나 했을 때의 어떤 불쾌함을 받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농락일 수도 있고 오도일 수도 있는, 긍정을 위한 긍정일 때, 실패의 경험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생각을 ㅡ 가령, "난 할 수 있어, 모든 게 잘될 거야"식의 긍정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 소설에서는 철저히 실패자의 긍정을 보여줍니다. 여전히 사회 밑바닥이고, 여전히 과거는 치부처럼 고개를 들어도, 이미 방구석에서 빠져나와 움직이게 된 사람들은 정말 조금씩 움직여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도 삶에 새겨진 실패의 기록을 기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투명한 소설? 아직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톡톡 튀는 문체나 가독성을 최대한 살린 문장들도, 이 소설의 큰 장점입니다. 너무 가볍지 않은가, 설정이 너무 막장은 아닌가 하는 걱정은, 오히려 몇 가지 질문을 던져봤을 때, 작가가 바라보는 암중모색의 현장을 함께하는 기분에 상쇄됩니다. 마흔 이후의 삶을 끔찍해도, 두려워도 말고 살 힘이 생기는 것은 오로지 '이렇게 망한 사람들도 살잖아?'하는 식이 아닙니다. 그런 경쟁, 비교 구도는 이 투명한 사람들 앞에서는 힘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저, 고기를 배불리 먹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별 것 아닌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것, 이것이 과연 별것 아닌 것으로 끝날까요. 모두가 살고자 하는 방향대로 살수는 없으니, 내 얼굴에 새겨지는 것이 무엇이 될지를 기대하고 설레하며 기다리게 됩니다. 이것이 작은 움직임일까요. 큰지 작은지가 문제가 안될 것입니다. 이미 움직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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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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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시작점

- 가볍게, 취향에서부터 시작해본다. <휴먼 스테인>의 세계가 유난히 견디기 힘들다면, 취향이 다음과 같을 수도 있다.

투명한, 선악이 분명한, 우리편과 적의 경계가 분명한, 0이거나 1이거나 어느 쪽인지 분명한 디지털 신호처럼 경계선이 명확한 세계가 역시 좋다거나,
이중의 태도, 모호한 대답, 애매한 상황이란 것은 도무지 못마땅하다거나.

하나 더, 습관에서 이야기해본다. '콜먼 실크'가 처한 상황에서 부메랑처럼 날아드는 어떤 느낌에 모골이 조금 송연해졌다면, 습관을 되짚어 본다.
성공 가두를 달리는 유명인은 언제나 '뒤가 구릴 것'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는지,
그 구린내가 날 것 같은 지점, 단서를 밝히고자 하는 데서 약간의 희열이라도 느껴보았었는지,
버릇처럼 "알고보니 쟤 저렇다더라"로 '근데 난 안그렇지'를 말하고 싶은, (이야 말로 '뒤가 조금 구린') 생각의 버릇이 있는지.


- 아니, 그런데, 과연 그 명확한, 야트막한 수심의 수영장처럼 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세상이란 것, 과연 가능한 걸까? 그 야트막한 수영장의 수면도 바람에, 뛰어드는 사람에, 저렇게나 일렁이는데?
게다가 <휴먼 스테인>의 수면은 검은 기름띠가 떠있다. 이방향 저방향에서 볼 때마다 마구 색깔이 뒤바뀌며 일렁거린다. 이 속에서 정말, 투명함을 기대하는가.

취향으로 우월감을 드러내자는 것도, 습관을 캐서 잘못을 가려보자는 것이 아니다.(이런 뜻이라면 이 글이야말로 '뒤가 조금 구린' 것이다.) 저 경계모호한 기름띠가 둘러진, 일렁이는 수면 아래 보이는 것들에서, '알고 보니'의 세계가 섣불리 판단되는지, 다만 그것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운동장에 선 앞에 서서 저편의 적들에게 증오의 불꽃슛을 날려본 경험이 있는지, 경험이 있다면, 대체 그 선은 누가, 언제 그은 것이며, 선이 그어졌다고 슛을 마구 날려도 된다는 의미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되짚어보는 것이다.


경계 - 모호한, 너무나 모호한

- 혼잡한 링 위에서 스파링을 하고 있는 콜먼. 그에게 잽을 날리는 상대는 그가 원래 말하려던 spooks, 즉 유령들 같다. 콜먼의 말을 조금 변형시켜볼 수 있다. "이 적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없나요? 이 적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아니면 유령들(spooks)인가요?"

검둥이, 라는 단어의 애매한 경계에서 검둥이 사이에선 '백합처럼 흰', 백인 사이에선 수상한 빛깔의 피부색. 애매한 정체성, 경계에 선 사람은, 각기의 욕망이 부딪칠 때, 욕망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선밖으로 밀어내기도, 내 편으로 끌어당기기도 좋은 표적이 된다. 콜먼은 일 대 일의, 상대의 패턴을 읽고 상대하는 것에는 능통하다. 그러나 상대는 유령처럼 에워싼다. 그에게 날아든 편지의 말처럼, '모두가 알고 있다'라면 특히나 더욱.
그런데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이 한낱 악의넘치는 오해에 불과하다면, 콜먼은 결코 그 오해를 풀지 못한다. 아무도 '모두'와  말할 수는 없으니까. 칠흑같이 어두운 링위에서 상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섀도우복싱 만을 할 수 있을 따름이다.

-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 전까지는 함구할 것. 콜먼이 검둥이인 것을 감추는 것은 그것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 잠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묻기 전에 일부러 말하지 않고 "경계를 감출 것".
청년 시절 내내 '검둥이'라는 단어의 가장자리에 있으면서, 그 선을 흐리게 하고, 일부러 지우고, 결코 말하지 않고 모호한 대로 두며 견뎌온 그에게 다시 유령처럼 쏟아진 인종차별의 단어로서의 '검둥이spooks'라니. 이 예민한 단어를 마주하고, 콜먼과 욕망으로 엮인 사람들은 그를 선밖으로 툭, 밀어버린다.


변치 않는 아름다움, 스테인레스의 세계 ?

- 콜먼의 섀도우복싱, 그러니까 전방위에서 날아드는 숱한 공격들, 그의 뒤엔 '뭔가 구린' 그것이 있다며 들춰보는 사람들, 심지어 그의 도덕성에 분개하는 사람들에 대항하는 <편치 받아 넘기기>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조금만 솔직해보면, 삶이란 것이 얼룩이 전혀 가지 않는 반짝반짝한 스테인레스의 세계이길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꿈이 아닐지. 매력적이게도 콜먼은 얼룩을 적극적으로 만든다. 오해와 누명의 덫에 사로잡혀 미라처럼 굳어가는 것이 아니라, 젊은 애인 포니아를 욕망하며, 자식들에게 항변해가며, 애인의 전남편을 경계해가며, 여전히 욕망하는 쪽을 택한다.

- 흥미로운 지점은 삶이 얼룩덜룩해지는 것에 개의치 않는 콜먼이거나, 단 한 순간도 얼룩을 가실 일이 없었던 불운의 포니아나, 인생의 한 지점에 생겨버린 전쟁의 흔적에 빨려들어가버린 팔리나,
콜먼의 욕망을 저주하면서 동시에 콜먼을 욕망하고 있던 델핀 루이거나. 스테인레스는 단지 미망일 뿐. 파장을 일으키고 파장을 받으며 나의 얼룩과 너의 얼룩이 교집합을 이룬다. 여기서 너와 나의, 잘못이 없는 아군과 잘못이 있는 적군을 구별하는 선은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

- 콜먼이 여전히 총기가 넘치며 노인네다운 지혜를 보여주는 점은, 그 일렁이는 수면 아래서 익사해버리지 않고 늘상 무엇인가를, 선택해가는 면이다. 스테인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로. 스테인레스를 욕망하지 않은 채로.

- 지워야 할 얼룩인지, 그대로 두어도 좋을 삶의 무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솔직하게 말해, 나의 몫은 아닌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때, 의도하지 않은 채로 링 위에 세워졌을 때, 다만 흐름에 부유할 것인가, 다만 두드려 맞고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섀도우 복싱을 멈추지 않는 데에는 어떤 겸허함, 우연을 받아들이는 혜안, 노인의 맷집이 있다.
자신의 욕망을 '모두'라는 말 뒤에 숨겨버리는 델핀 루의 약삭빠름을 눈여겨 볼 것인지, 아니면 겸허히 우연을 받아들이고 우연의 무늬를 새겨갈 것인지는, 그래도 선택할 수 있는 '나의 몫'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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