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세트 (반양장본) - 전3권 -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4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며 좋든 싫든 열하일기를 한 번쯤은 접해 봤을 거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반드시 배우게 되는 허생전, 양반전, 일야구도하기가 바로 열하일기에 실렸던 작품이기에. 그렇기에 한 번쯤은 전체를 다 읽어보고 싶었다. 몇번인가의 시도는 두툼한 볼륨과 어려운 고어체를 보고 질려버리고 금세 포기하는 걸로 끝나버렸지만.  

그런면에서 돌게베판 열하일기는 훌륭했다. 우선은 번역이다. 고어체가 아니라 현대 문어체로 번역했기에 정말 읽기 쉽다. 품을 많이 들였다는 출판사 광고는 과장이 아니다. 군데군데 삽화가 많이 들어가있기에(그래서 비싼 듯 하지만) 텍스트를 읽으면서 머리 속으로는 연암의 여정을 그려 낼 수 있다.  

지금으로 치면 우주여행이나 다름없는 연행길에서 만난 인물, 사물들에 대한 연암의 독창적인 묘사가 흥미롭다. 실사구시의 사상을 가진 그는 인분과 기와에서조차 치국의 도를 발견해 낼 수 있었다. 고적에서 옛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가 문헌에서나 접했을 역사적 현장을 발견하며 배낭여행 나온 대학생 마냥 흥분하기도 한다. 오랑캐에게 얕보이지 않을려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 벌컥벌컥 마시며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드잡이에 말려들어 자칫 봉변을 당할 위기에 쳐하자 짐짓 자신은 겁먹지 않았다고 허세를 부리는 장면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열하일기에서 내가 본 것은 실학의 거두 박지원이 아니라 인간 연암 박지원이었다. 

연암은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요, 그 계몽군주 정조마저 연암의 글을 읽고 과격하다며 문체반정을 어지를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열하일기를 읽는 내내 그는 철저히 춘추대의와 숭명대청을 부르짖는다. 오히려 양반전과 허생전과 같은 것은 그에 비하면 개미목소리만큼 작아보인다. 그런면에서 연암은 여전히 성리학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분과 기와에서 실사구시를 실천해보이고 수레와 벽돌의 사용을 주창한다고 해봐야 기껏 생활의 개선에 불과하다. 이미 썩을 때로 썩은 양반체제, 피폐한 소농민의 삶, 상,공업의 낙후, 화폐경제, 서구문물의 수입과 같은 근본적이고 시급한 문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연암은 전혀 답을 주지 못한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등 세계가 급변하고 있던 시대에도 조선의 지배층들은 고리타분한 중세에 머물고 있었다. 이러니 백년이 지나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오랫동안 읽고 싶었던 열하일기를 읽으니 무엇보다 뿌듯하다. 원전을 읽은 것과 그것의 요약을 보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같은 것을 읽어도 내 시선으로 맥락을 읽는 것과 발췌된 일부를 읽는 것은 천지차이였기에.  연암의 연행길에는 1여년이 걸렸지만, 지금 중국까지는 2시간이면 족하다. 연암처럼 거창한 준비를 하지 않아도 가벼운 몸으로 다녀 올 수 있는 길이다. 중국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나도 한 번쯤 연암이 밟은 길을 되짚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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