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쪽이 거칠게 긁히는 느낌이 든다. 오웰이 북부 잉글랜드의 탄광 도시들을 걷는 모습이 낯설 만큼 또렷하다. 검댕이 낀 얼굴, 매캐한 공기, 눅눅한 이층집, 나무로 된 공동변소까지 그는 빠짐없이 쓴다. 보고 들은 것만이 아니라 냄새와 감촉까지 글에 옮긴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단순한 노동계급 탐방기가 아니다. 그것은 육체의 고통과 사회의 모순이 구체적인 언어로 증명되는 보고서다. 그러나 이 책이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후반부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오웰은 시선을 바깥에서 안으로 돌린다. 세상을 바라보던 눈으로 이제는 자신을 바라본다.
사실 조지 오웰은 처음부터 사회주의자도 르포 작가도 아니었다. 그는 자연주의 소설을 쓰고 싶어했다. 조용하고 인간적인 이야기, 어딘가 고장난 평범한 삶에 대한 묘사. 그러나 당시 영국은 그런 문학적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교육을 받지 못한 수많은 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식탁 위 빵 한 조각조차 불평등하게 배분되었다. 오웰은 책상머리에 앉아 픽션을 고민하는 대신 거리로 나갔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그 세계를 직접 살아봐야 한다는 직관이 그를 북부 탄광촌으로 이끌었다. 위건 부두는 문학의 이상이 현실의 바닥과 부딪힌 자리였다.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작가가 아닌 기록관이 되어갔다.
책의 전반부는 현실에 대한 관찰이다. 오웰은 광부들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고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한다. 석탄먼지를 뒤집어쓴 채 90센티미터짜리 탄광 갱도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사람들, 그들의 침묵과 무거운 눈빛. 그는 어떤 장식도 없이 이 현실을 보여준다. 이 묘사에는 동정이나 연민이 없다. 있는 그대로를 쓰는 것. 그것이야말로 현실을 존중하는 방식이라고 그는 믿었다.
하지만 더 인상적인 부분은 후반부다. 그는 노동계급이 처한 외적 환경보다도 중산층 지식인이 가진 내적 모순을 더 집요하게 파고든다. "나 역시 이들과 완전히 섞이지 못한다. 나는 그들의 식습관에 불편을 느끼고 말투에 거부감을 갖는다. 내가 지닌 도덕적 선의가 실제로는 무지와 거리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오웰은 스스로를 해부하듯 분석한다. 그 누구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자기 혐오를 그는 숨기지 않는다. 사회주의를 말하면서도 노동자와의 정서적 단절을 느끼는 이 아이러니. 그는 그것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는다.
오웰은 당시 좌파 지식인들이 이상만을 앞세우며 현실을 설득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대중은 정치적 구호보다 실제 고통에 대한 이해를 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상은 실감에서 출발해야 한다. 낡은 방 한쪽에 끼어 있는 곰팡이의 냄새를 모른 채 혁명을 말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란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감각이다. 불의에 대한 감각, 진실에 대한 감각, 그리고 부끄러움에 대한 감각.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지금도 여전히 낯설고 뾰족하다. 그 불편함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 안에는 얼마나 많은 거리감과 관찰자의 안일함이 섞여 있는가. 오웰은 그런 말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안다는 말보다 본다는 말을 택한다. 그리고 본 것을 끝까지 잊지 않는 태도를 택한다.
이 책은 정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그 질문이야말로 오웰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날카로운 유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