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의 세계사 - 스탈린 대 트루먼, 박정희 대 김일성, 아이슈타인에서 김정은까지
정욱식 지음 / 아카이브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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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일반 국민들은 나라 안팎의 외교와 안보에 대한 균형 잡힌 생각과 판단을 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접할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는데다가, 교과서에 실린 얄팍한 정보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으로써 갖게 되는 전쟁에 대한 불안감을 늘 품고 살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은 새빨간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곳이고 핵무기를 손에 넣으려 혈안이 되어 있는 위험한 족속들인 것이다.(이들에게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은 군량미를 대는 것 밖에 안 되는 것이고...) 그리고 신문 광고 등을 통해서 안전하고 깨끗한 원자력에너지와 원자력발전소의 효율에 대해 친숙하게 접해왔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같이 인적자원 외에는 수출하거나 소비할만한 천연자원이 전무한 상황에서 원자력은 달콤한 유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이용하면 마치 석탄 석유로 만들어지는 에너지에만 의존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나름 합리적인 이유도 기인했을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사태는 그곳이 엄청난 강도의 지진이 발생했기 때문에 생긴 천재지변이지 한국과 같이 그런 강도의 지진이 발생할리 만무한 지역에서는 안전하다는 생각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주류 언론과 매스컴에 의해 교육받아온 우리들의 이런 생각이 편견에 지나지 않음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것도 날카롭고 통쾌하며 반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꼼꼼한 논지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심 '뭐 하나 시원찮은 소리가 나오면 바로 반박 할테다!'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으나, 읽는 내내 빈틈을 찾기 어려웠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객관적 사실을 기초로 두었다는 점이다. ~카더라 통신 같은 찌라시 정보가 아닌 당시 사건과 정책에 대한 국가간의 외교문서, 당시 주요 언론보도, 대통령과 참모들의 외교적 공개발언에 대해 꼼꼼히 살피고 분석했다. 당시에는 비밀이었으나 그 기밀유지기한이 끝난 외교기밀문서들을 위키리크스등을 통해서 다각도로 검토하고 분석함으로 나오는 저자의 이야기는 이념과 이권이 아닌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 것이라는 강력한 토대를 제공한다. 실제로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이야기할 때 그가 주장하는 것에 대해 반대편 패널이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는 모습은 그러한 저자의 탄탄한 논지로 인함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각 나라별 입장에 대한 분석도 놓치지 않는 부분이다. 국가 간의 외교에 있어서 어떤 절대적인 부분은 없다. 어제의 적국이 공동의 목표에 대해서는 서로 협조하고 화해를 맺는 동맹국으로 변하는 것은 불과 수십 년 전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었다. 이러한 든든한 토대와 내공으로 저자는 하나하나 두껍게 쌓여있던 우리의 편견을 무너뜨려간다. 그 단초가 되는 키워드는 바로 핵이다. 2차 세계대전부터 시작된 핵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국제 외교와 정세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샤우론의 절대반지와 같이 휘둘려져왔다. 이 책은 바로 핵을 통해 2차 세계 대전부터 지금까지의 세계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그 편견은 우리가 보통 세계사 및 국사 시간에 미쳐 짚어주지 못한 부분이기도 한 부분이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일본에 핵폭탄 2방을 투하한 것이 일본의 전투력에 크나큰 타격을 주기 위함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종전을 향해가는 이 전쟁에서 승전국의 위상이 높아만 가는 소련을 겨냥하여 무력시위차원에서 진행된 사건임은 알지 못했던 부분이다. 우리는 오늘날 미국이 우리를 북한으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천사이자 우방국으로만 알고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한국은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애치슨라인에 한국을 제외했고 막상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에 앞서 한국을 핵폭격 고려대상 지역으로 삼았던 데다가, 한국전쟁 내내 핵공격 대상으로 삼고 인근에 핵무기를 전진배치까지 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리고 이승만은 북한에 핵폭탄을 터뜨리지 않는 미국에 불만이 가득했으며, 우리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맥아더 장군도 북한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북한 전역에 핵폭탄 수십 방을 투하하여 향후 수백 년간 생물이 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까지 했다는 사실은 우리는 잘 알지 못했던 부분이다. 미국이 핵을 못 쓴 이유는 자국 내를 포함한 서방 동맹국들의 반대와 3차 세계대전의 위협에 대한 부담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또한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당시 박정희는 국내 핵무기개발을 시도했다가 무산되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진바 있다. 이 밖에도 다양한 국가와의 주고받은 외교문서에서 밝힌 강대국 미국의 행보는 매우 치졸한 동네깡패와 다를 바 없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실상 알고 보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국제 안보기조는 딱 하나, 핵무기를 앞세운 협박이었다. 시대적 상황에 의해 가장 먼저 핵무기를 손에 쥔 미국의 모습은 국제 평화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철저히 자국의 이익에 기인하여 행동했다. 한국전쟁 내내 그리고 직후에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 본토에도 핵폭탄 카드를 끊임없이 만지작거리며 위협하였다. 내가 가진 핵무기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매력적인 선물이지만, 남이 갖게 되면 나를 해칠지 모르는 가장 무서운 칼날과 같다고 여긴 미국의 행보는 나 이외에 다른 모든 이들을 협박하며 핵을 통한 국제무대에서 으름장을 놓으며 자국의 군수산업을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시장은 소련을 향했고, 중국을 향했고, 베트남을 향했으며, 중동을 향하다가 현재는 북한을 향하고 있다. 국제정세 불안이야말로 미국이 바라는 바요, 그들이 갖고 있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바로 미국 매파와 네오콘의 탄생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로 인해 당연히 미국의 동맹국들도, 중국도, 오랜 냉전의 라이벌인 소련도 미국의 협박에 대항하는 길은 그들과 같이 핵무기를 손에 쥐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우후죽순으로 남몰래 핵개발에 성공한 국가들이 생겨났고 우리 지구의 현재 평화라고 여기는 상태는 바로 이런 각국의 '핵에 의한 평화'의 결실이다. 그리고 미국이 주장하는 미사일방어체계를 통한 평화이기도 하다.

 

물론 이에 대한 자체적 반성의 목소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핵을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만 활용하는 것이 아닌 이를 에너지원으로 활용하자는 과학자들의 의지가 전기를 만드는 원자력발전소로 결실을 맺게 되기도 했다. 허나 정작 핵융합의 원리와 핵 처리 과정, 그리고 핵을 통해 전기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이 또한 석탄이나 석유를 이용하는 것 못지않은 에너지가 소모되거니와 따지고 보면 바닷물을 데우는 난로이기도 함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핵발전소는 지녔다는 것은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가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비핵국들이 핵무기를 지니기 위해 먼저 착수하는 것은 핵기술을 보유하기 위한 핵발전소 건립이다. 허나 최근에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통해서 원전에 대한 환상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한 방사능 유출은 과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인해 발생된 방사능 수치를 육박하거나 능가하는 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또한 원자력을 가동하며 발생되는 폐기물에 대한 처리는 아직 인간의 기술로 정복하지 못한 부분이다. 이로 인해 발생되는 방사능의 폐해는 국경과 대륙을 넘나든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해 방사능에 좋은 먹을거리가 동이 난 경우를 봐도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불안감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저자는 핵을 통해 바라보는 세계정세의 역사적 흐름을 짚어주면서 현재 가장 첨예하다 볼 수 있는 북한문제에 대해서도 되짚어본다. 북한의 외교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역시 핵이었다. 북한이 핵을 고집하는 이유는 불과 5~60년 전부터 미국이 핵을 고집하며 국제사회의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이유와 닮아 있다. 북한이 강압 외교의 수단으로 핵위협을 하는 모습은 과거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중국과 북한에 했던 방식과 닮아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는 이유로 미국의 핵위협을 거론하며 자신의 핵무장을 자위용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모습은 미국이 과거 소련과의 냉전체제에 돌입했을 때 내세운 주장과 국가명만 다르지 똑같다. 이렇듯 북한은 핵외교를 이용해서 중국과의 종속관계에서 나름의 자주권을 확보하려고 하고, 미국으로부터 핵위협에서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경제적인 도움도 꾀하려는 수단으로 지금껏 얄미울 정도로 적절하게 활용해 왔다. 그리고 김정은 체제 때는 더욱 집요하게 이를 이용할 것이 자명하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 북한이 핵을 지녔으니 아무리 우리가 미국의 핵우산 방어의 그늘아래에 있더라도 불안하니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해서 안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가? 아니면 북한을 더욱 경제적 안보적으로 압박해서 이들이 순순히 힘들다고 포기할 때까지 위협적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핵의 세계사를 살펴보면 이런 외교적 태도는 긍정적이고 효과적인 성과를 기대하지 못했음을 알게 해준다. 따라서 현재의 오바마는 우리 입장에서는 세련된 애티튜드의 또 다른 부시와 다를 바 없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바로 '탈핵'이요 '탈원전'이다.

 

우리는 핵에 의한 자유를 누려왔다는 선전에 현혹되어왔음을 자각해야 하며 진정한 평화는 핵으로부터의 자유를 통해 이뤄진다는 대명제를 명확히 해야 한다. 서로 칼을 겨누고 총을 겨누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이것이 평화겠는가? 이 시간이 수십 년이 되어가면서 우리는 이것을 마치 평화임을 착각하고 있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대화와 협력을 통해 서로의 핵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도록 하는 외교에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힘쎈 놈이 자신의 힘을 포기함으로 상대적으로 약한 놈으로 하여금 안심하게 할 필요가 있다. 즉, 북한에게만 핵을 포기하라고 하면 북한은 죽어도 포기하지 않을 거란 말이다. 과거 중국이 핵을 포기하지 않고 미국과의 국교수립을 이뤄낸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이 핵무기에 의한 안보의존에서 완전히 벗어날 테니 너희도 핵무기에 대한 집착을 놓자고 제안하는 방식도 필요할 것이다. 유명무실한 사교모임으로 전락할 위험에 놓인 핵안보정상회의에서 실질적인 핵무기 감축에 대한 논의를 제대로 활성화시켜야 할 것이다.(그러라고 오바마에게 노벨상도 준건데...) 또한 자체적으로도 원전시설 및 핵 재처리 시설에 대한 보유를 포기하는 선언을 하면서 북한에게도 이런 우리의 노력에 발맞춰서 과거 김일성이 주장했던 "조선반도의 비핵화"에 대한 노력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그 일환일 수 있다.

 

아울러서 우리는 '탈원전'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의 산업구조도 그렇고 일상에서도 원전없는 세상에서 살기 위한 생활습관을 길들일 필요가 있다. 과거 수십 기의 원전을 가동하다가 지금은 단 1개의 원전만을 가동하고 있음에도 전력 비상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일본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는 말만 녹색성장만을 외치지 실상 대체에너지에 대한 투자는 지극히 미비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또한 독일의 경우도 대체에너지로 상당한 수준을 이뤄내고 있다. 모두가 전쟁 무서운 줄 알고 핵 무서운 줄 아는 전범국가들이다. 핵의 탄생은 인류에게 또 하나의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여겨졌으나 그 실상은 파괴와 절멸의 도구가 됨을 깨닫는데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이 매력적인 "독이 든 사과"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개인의 노력을 넘어 전 국가적이며 지구적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 이 지구를 단번에 수십 개는 날려버릴 수 있을 만한 핵무기 위에 살고 있는 우리 지구의 멸망의 시계는 예상보다 더 일찍 앞당겨 질지도 모른다. 이 책은 우리를 일깨우는 또 하나의 예언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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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옹호하다 -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 / 모멘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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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굉장히 저명한 양반이라는 말을 들었다. 더군다나 마르크스주의자라는 흔치 않은 base를 지닌 분이라니... 알고 있는 어휘가 남달라서 그런지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지 모르겠다만 2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을 읽어내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 단락을 읽고는 이해가 안 되서 다시 되풀이해서 읽는 식으로 책읽기가 진행된 경우는 아주 오랜만인 것 같다. 그리고 워낙 넓은 학문적 토대를 기초로 말하고 있는 문장들이 많아서 그의 조롱섞인 표현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알고보니 이 양반은 원래 이렇게 시크한 독설을 하는 방식을 즐겨한다고 한다. 철학과 문학적인 깊이가 있지 않고서는 이글턴의 글을 접하는 것은 큰마음을 먹어야 할 것 같다. 원제는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이다.

 

계몽주의에서 발전한 무신론자들의 주장.... 이제 겨우 2~300년에 지나지 않는 과학과 이성의 발전은 신이라는 망상에 대해서 아직 명확히 증명하지 못했지만 그 방향만큼은 틀리지 않았으며 종국에는 이를 넘어설 것이라고 외친다. 도킨스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욕망을 해소하려는 인간 스스로가 만든 것이 바로 종교이며 여기서 벗어나야 참 인간해방이 일어날 것이라 꼬집는다. 히친스는 여기에 덧붙여서 돈이 없으면 아무런 능력도 없는 신을 섬기는 종교는 이 지구상에 병폐만을 일으키는 악이라고까지 언급한다. 과학과 이성은 과거 종교가 독점하고 있는 진리의 영역을 점차 정복해가고 있고 이 역시 생명의 진화의 한 흐름이라 말한다. 허나 이러한 신의 비합리성에 대해 끊임없이 증명하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전히 다양한 종교의 신들은, 그 중에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그 영향력이 막강하다.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인간은 결코 합리적이고 이성적 판단만을 내리는 동물은 아님에 분명하다. 단지 인간이 종교의 족쇄에 사로잡혀 있는 노예근성이 남아있어서일까?

 

내가 보기에 이글턴은 이 책에서 시종일관 강도 높은 비판과 조롱을 빗대어 크게 3가지를 주장한다. 도킨스와 히친스가 말하는 과학과 이성을 근간으로 하는 무신론이 갖고 있는 맹점, 그들의 말하는 것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도, 표현되어지지도 않지만 인류와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소중한 부분들이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신앙과 이성을 통합하여 지구 문명을 건설적으로 발전해 갈수 있는 주요 솔루션이 될 수 있는 사회주의의 비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글턴은 디치킨스(도킨스와 히친스)를 비롯한 소위 계몽주의의 후예인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일으키는 유해한 점만을 추출해내고 이를 확대 재해석해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기독교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발현은 자생적이라기보다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로 인한 반발에서 비롯되었을 확률이 매우 크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종교가 초래했다고 주장하는 일련의 사건들의 이면에 있는 추악한 자본과 권력의 실체에 주목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문제는 신의 존재보다는 인간의 내면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디치킨스는 이러한 구조적 폭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들 자신들이 이미 높은 계급에 있는 인텔리들이라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비꼬기까지 한다. 그저 생명과 진화의 신비를 과학으로 밝혀내어 신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짐을 보임으로 종교가 사라진다면 지구는 낙원으로 바뀔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듯 그들을 조롱한다. 폭력과 야만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열쇠라 여겼던 계몽과 이성이 문화와 문명의 이름으로 또 다른 폭력과 야만으로 둔갑해버린 지금의 현실에 대해 디치킨스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또한 이글턴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반박할 때 도킨스가 신 존재 증명에 대해 비난했던 아퀴나스의 신학을 이용한다. 오히려 그의 신학적 이해부족을 비판하며 문제시하는 기독교가 진짜가 아니라고, 경험과 실험으로 통해 신의 존재는 결코 입증될 수도 없고 부정될 수도 없다고 말이다. 이성이라는 것도 정의되어지는 비이성적인 가치들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본질에서 멀어진 것은 박애 즉 사랑이 실종되어서이며 이를 유발한 것은 권력과 결탁한 권력자들의 정치적 야욕에 의한 것들이 매우 많다고 말한다. 일례로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문제들 중에는 선진국들의 석유에 대한 욕망으로 자신들과 닮아 있는 탈레반들에게 뒷돈을 대고 있는 CIA와 그 뒤에 있는 열강들이 문제가 된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무신론에 대해, 이성과 과학만능주의로 흘러가게 될 때 나타나게 되는 문제점에 대한 이글턴의 날카로운 분석과 진단에 대해서도 충분히 눈여겨 볼만하다. 기독교와 이슬람 근본주의가 생겨난 원인은 오히려 이성과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생겨난 자유주의의 과잉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적, 초자연적 유일신론의 왜곡에 대해 인격적이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설명, 알게 모르게 실험과 검증을 하지 않는 “믿음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바로 이성이요 과학이요 다원주의이자 포스트모더니즘이지 않냐는 지적 등,,, 이 책 곳곳에 어렵지만 재기넘치는 언급들은 그의 날카로움을 대변해준다.

 

이 책은 적어도 내게는 의역한 제목처럼 신을 제대로 옹호한다고는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오해를 사지 말아야 할 부분은 디치킨스에 대한 비판이 그들이 지적하고 있는 종교비판을 조금도 퇴색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순간 디치킨스의 지적은 어떤 면에서는 진보에 가깝다고 여겨도 무방하겠다. 이글턴은 무신론자들이 바라보는 기독교에 대한 문제점은 지적하되 그럼 “제대로 된 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유신론에 대한 반론을 하는 수단이 아퀴나스의 신학이라는 것도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아퀴나스 이후 근대에 와서 더욱 폭넓게 발전적인 신학적인 담론은 이글턴의 전공이 아니어서 일까? 그는 과거의 왜곡된 유일신론을 잘 고쳐서 쓰면 되는 듯이 말하고 있다. 허나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을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근대 이후 새롭고 폭넓은 현대 신학과 그 흐름은 오늘날 이성과 과학을 배척하지 않고 서로 공존하는데 매우 유의미하다. 그저 디치킨스의 의견에 반박한다고 끝나면 안된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아퀴나스의 신학을 든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디치킨스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에 비해 신학적인 반박은 허술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터라 아퀴나스의 신학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만 있는 상태에서 그것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말하긴 힘들다. 허나 이전의 책 『종교전쟁』에서도 말하듯이 진화론적 유일신론 같은 의견이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책은 원제목처럼 이성의 의의와 한계, 믿음의 역동성을 보다 집중해서 이야기한다.(개인적으로 『만들어진 신』에 대한 대척점 느낌을 주려는 외도가 보이는 의역한 제목이 좀 아쉽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종교와 신앙보다 그가 토대로 삼고 있는 사회주의와 막시즘적인 생각이 더 중심에 자리잡고 있음이 느껴졌다(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종교라는 수단을 차용한 것처럼 말이다. 문득 드는 생각은 종교 혹은 기독교와 사회주의운동이 동일시하거나 혼용될 수 있냐는 점이다. 나는 좀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인간해방과 구원을 위한 기독교에서 파생되어 나온 열매들 중 하나가 막시즘이요 사회주의라고 생각한다. 그 무게감을 뒤바꾼 듯한 후반부 서술은 기독교인으로써 아쉬운 부분이 든다. 그럼에도 이처럼 압축해서 강렬하게 글을 쓰는 저자의 신랄한 글은 매력점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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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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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저자의 의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느님이 없는 사회는 지상의 지옥이 될 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입에 담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라니... 『신 없는 사회』는 약 1년간 덴마크에 살면서 스웨덴과 덴마크의 비종교성에 대한 연구를 한 결과를 담고 있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내용도 명확하다. 덴마크와 스웨덴 같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은 빈부의 격차가 크지 않고 막중한 세금을 내지만 그에 합하는 강력한 복지정책을 통해 안정된 국민생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국민 대다수가 기독교인이라 생각하고 있는 이 나라 국민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없고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신을 믿지 않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율배반적 표현이 어째서 가능한지를 저자는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사람들과 많은 인터뷰와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서 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종교가 반드시 필수적이지는 않음을 역설한다.

 

사실 이 책은 기독교의 힘이 거의 미비한 스웨덴과 덴마크의 모습을 소개하는 것과 동시에 저자가 주로 살고 있는 미국의 왜곡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도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근본주의적인 기독교가 맹신하고 있는 초자연주의적 유신론이 낳는 패단에 대한 경계와 우려를 곳곳에 표출하고 있다. 세상의 분쟁이 일어나는 주요 원인 중 하나인 종교간 갈등은 왜곡된 종교상이 낳은 결과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 않은가?

 

이 책을 통해 재고할 수 있었던 편견 하나는 (어떤 형태라도)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면 도덕적으로도 타락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내 속의 욕망과 탐욕을 절제하고 이웃과 뭇 피조물들을 사랑하라는 종교의 가르침이 없는 곳이 과연 살기 좋은 곳이 될 수 있을까? 내세에 대한 기대도 구원에 대한 희망도 없이 우리를 악의 세력에서부터 스스로를 지키면서 현실을 잘살 수 있을까? 헌데 저자가 인터뷰한 덴마크와 스웨덴 국민들에게 이러한 불안과 걱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책의 전개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고 느껴졌던 것은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내용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은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삶의 의미란 없으며, 신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고,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교회는 거의 나가지 않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며 종교는 개인적인 문제이기에 당연히 정치와는 분리되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들의 자연스러운 세속화가 이뤄진 이유에 대해 저자는 크게 3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이들 국가에서 가장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루터파 교회는 국민들에게 자연스레 스며든 것이 아닌 통치자들의 정략적 이점을 얻고자 기독교를 들여온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수세기 동안 국가의 지원까지 받으며 사실상 국교나 다름없는 종교적 독점은 사람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두 번째로 (가장 설득력 있게 생각되는 부분인데) 사람들이 점점 안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서 종교에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 삶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이 충족되면서 가난과 질병에서 멀어짐에 따라 안정적인 생활을 영유할 수 있게 되고 굳이 초월적 절대자에게 의지하지 않게 된 것이다. 엄청난 재벌도 없지만 비참하게 가난한 사람들도 없는 스웨덴과 덴마크 국민들은 전반적으로 현재의 삶의 수준에 만족하고 있다. 세 번째는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증가하면서 점점 종교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밖에 여러 의견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 이 모든 것들이 크거나 작게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이른바 “문화적 종교”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은 무척 중요하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 책에서는 문화적 종교에 대해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적 전통에 일체감을 지닌 사람들이 종교 안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확연히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이 나라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내가 속한 교회에서도 기독교에 대해 일종의 문화적 종교로 대하는 젊은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교리적 지식이나 신앙적 깊이는 알 수 없지만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사회적 기여나 봉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신을 믿지 않고 교회는 그저 자신들 삶에 매우 친숙한 환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이 구원을 받지 않고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것은 무척 무식한 생각일 것이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것이 이 세상에 종교적인 갈등이 없어지는 길이 되지는 아닐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사회학자의 관점에서 충분히 유의미한 결과물로 인정되는 이 책에서 물론 동의하지 않는 것들은 있다. 한국이 종교적이지 않다는 것에는 나는 좀 다른 생각이다. 그저 기독교인의 비율이 낮을 뿐이다. 어느 통계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종교에 등록된 교인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5배 ~ 2배라고 하니 한국은 (다양한) 종교적 영향력이 강하게 존재하는 나라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마 저자가 한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한 저자가 바라보는 기독교라는 것은 여전히 미국국민 대다수가 생각하고 있는 초자연주의적 유신론을 근간으로 하는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라는 점이다. 저자가 미국사람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기 위한 목적에 충실한 책의 구성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이 책을 읽은 내가 생각하는 종교의 정의와는 차이가 있다. 덴마크와 스웨덴의 이 현상들과 정확히 다른 대척점에 알맞은 근본주의적 종교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저자가 언급하는 종교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신을 믿지 않고도 이렇게 행복하게 잘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로 (저자가 정의하는)종교가, (일반적 신자들이 생각하고 있는)신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가?”라고 저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아직도 개발도상국이나 문명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신을 잘 믿고 살면서도 행복도나 삶의 만족이 높은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과연 덴마크와 스웨덴에 기독교의 힘이 미비한 것처럼 보여도 정말로 그런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비록 저자가 정의하는 종교나 현상적으로 종교기관의 힘이 약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약자를 돌보고 더불어 잘사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면서 현재를 충실히 살고자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은 종교가 지향해야 하는 “현실에서의 새 하늘과 새 땅 혹은 땅에서도 이뤄진 하늘나라”에 근접한 모습이란 생각이 든다. 책 뒷면에도 적혀 있듯이 사람들의 가치관이 종교에 바탕을 두고서 살아가는 것... 그것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범위를 국가에까지 확장시키면서 낙원을 건설하려는 성숙한 국민의식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런지... 분명 현재 그들이 만들어가는 “신이 필요 없는 사회“는 왜곡된 신앙이 낳은 초자연주의적 유일신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증거이자 참된 신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가야 하는 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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