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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평점 :
나는,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거나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도한 인간관계도 맺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인데, 그보다는 에너지를 안으로 집중하는 유형이다. 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민감해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주목받고 싶지 않은 것인데, 어디서건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행동을 자제한다. 그런가하면, 주변에서 ‘예민하다’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지나친 자극으로 인한 고통을 두려워하고, 매사에 결과를 예측해 행동하므로 적극적이지 않고 뒤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판단한다.
책을 읽기 전,
‘온전해 보이는 세계 안에 스며 있는 불안의 기미를 내성적인 사람들의 민감한 시선으로 날렵하게 포착...’
출판사 소개글을 읽으며, <지극히 내성적인> 혹은 <내성적인 지극히>는 바로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예민한 탓에 행동반경이 작고, 그나마도 결과를 두려워하며, 사소한 일에도 수십 번 목숨이 오락가락하도록 고민하는 나의 이야기일 터이니, 안 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적극적이고 외향적일 것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에서 힘겹게 스스로를 지속해 가는 내성적인 주인공들의 고군부투를 보며, 감각을 시멘트 바닥에 비벼서라도 좀 무디게 만들고 싶은 그간의 바람을 위로받고 싶었다. 책을 읽고 난 후에는 리뷰에 이렇게 적으리라는 다짐도 했다. ‘너무 아프게, 너무 세밀하게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라고.
책을 읽고 난 후,
<지극히 내성적인>이라는 제목 아래 모은 열편의 단편에 주인공들을 모두 ‘내성적이다’ 라고 해도 좋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떠올랐다. 그들은 상대방의 의중을 몰라 당황해 하다가, 나름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그의 생각은 이러이러할 것이라고 짐작하며,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누가 그랬을까,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들은 피해의식에 젖어있다고.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들의 피해의식은 망상에 가깝고, 그들은 두려움이라는 함정에 빠져 매사에 장애를 겪고 있으며, 그들이 느끼는 열등감은 가히 강박적이라고. 내성적인 것은 불안하고, 소심한 것에 다름 아니며, 그건 정상적이지 않다고, 과연 누가 그랬을까.
여자는 거실을 둘러보곤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었어요. 저를 두렵게 만든 것은 여자의 그 만족스러운 표정이었습니다. 타인의 집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온 사람의 머뭇거림이나 위축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9쪽, 구두).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까 불안해하는(구두, 팜비치), 과도한 건강 염려증과 치료되지 않는 불안으로 허덕이는(오가닉 코튼 베이브), 상대방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재단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까지 상대에게 미루는(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매사 어떠어떠할 것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진실과 대면하기를 회피하는(타투), 열등감으로 언제나 위축되어 있다가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틀니, 대머리), 거짓말을 통해 자신감을 갖는(홍로), 자신의 형편과는 상관없이 지나치게 오지랖이 넓은(집이 넓어지고 있어) 이들을 과연 ‘내성적’이라는 제목 아래 한데 모아도 좋은 것일까.
물론 작가가 내성적인 성격을 신경증의 프레임에 가두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성적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예민한 감각을 가진 바, 그들의 시선으로 일상의 틈에 자리 잡고 있는 불안을 끌어내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판단하는 나는 아무리보아도 과도한 불안과 망상, 지나친 집착과 열정으로 이상심리를 보이는 이들을 ‘내성적’이라는 제목 아래 묶었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타투’의 주인공은 서른 살에 클럽에서 만난 여자가 임신하자 결혼 했다. 딸 지나를 낳았을 때 여자의 나이는 스물이었다. 여자와는 아이를 낳고 바로 이혼했다. 직업이 기자인 주인공은 딸을 혼자서 키우다가, 기숙형 대안중학교에 보냈다. 그리고 열다섯의 딸은 임신을 했다. 병문안 온 지나의 학교 친구는 머리를 지저분하게 염색했고, 귀에는 피어싱을 세 개나 했다. 주인공은 딸이 꼴사나워 보이는 남자애와 어떤 식으로 스킨십을 하고, 그 순간 어떤 표정이었을지를 상상한다.
이 단편이 불편했던 것은 열다섯의 소녀가 임신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 어린 아이일 뿐인 딸이 남자와 어떤 표정으로 어떤 감각을 즐겼을 지를 상상하는 주인공의 고뇌가 변태적으로 비춰졌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일상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임에도 거슬렸던 점은 지나와 그 친구들이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설정이다. 임신에 대한 책임으로 홀로 키운 딸이 대안학교에 갔다, 열다섯에 임신했다, 병문안 온 친구들은 불량스러워 보였다. 이 이야기가 대안학교 아이들은 자유스럽다, 개방적이다, 규율이 없다, 통제가 되지 않는다, 충독적이며, 불량스럽다는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지 않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건 너무 위험한 편견이 아닌가.
작가는 주인공이 잠든 딸의 허리에 그려진 문신을 사진으로 찍어 프레임에 가두며 진실과의 대면을 회피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이미 도식화된 무의식에 갇혀 있는 것은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표현을 하지 않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내성적인 성격에 대한 범주화도 편견에 하나가 아닐까. 그것 또한 작가의 의도였다면, 역시 나는 지나치게 예민한 것일 뿐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무미건조한 일상만으로는 탄생할 수 없다. 아무런 변화도, 균열도, 불안도, 이상도 없다면 이야기될 여지가 없을뿐더러, 그러한 소설은 아무도 읽지 않는다. 그것이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불안을 이상심리라고 여길 만큼 극대화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만 본다면 <지극히 내성적인>은 충분히 재미있다.
그러나 열등감이나 죄책감, 피해 의식, 과도한 집착과 왜곡은 내성적이거나 외향적인 성향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느끼는 감정이다. 다만,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도의 ‘차’이다. 그것이 소설과 현실의 ‘차’이며, 재미있음과 없음의 ‘차’이고, 의미와 무의미의 ‘차’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을 포착하고 표현해 내는 능력은 소설가와 소설가가 아닌 사람의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