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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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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은 하찮은 농담 한마디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쿤데라는 <농담>에서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어떤 질서 속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만이 그 행위를 좋게도 나쁘게도 만든다고 말한다.
<무의미의 축제>에 등장인물인 다르델로는 자신이 암에 걸리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처음으로 마주친 옛동료에게 자신이 암에 걸렸고, 곧 죽을 운명이라고 가볍게 이야기 한다. 그것을 자신이 중병에 걸리지 않은 것을 확인함으로써, 마치 새생명을 얻은듯한 남자의 농담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 다르델로의 농담을 과연 타인을 속일 목적으로 행한 나쁜 의도로 봐야할까.
중요한 것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 행위로 야기된 결과일 것이다. 다르델로의 농담은 라몽으로 하여금 죽음을 앞둔 다르델로의 차분함에 경외감을 느끼게 했고, 그것은 새 삶을 얻음으로써 죽음과는 다소간 멀어졌다고 믿는 다르델로의 기쁨을 배가 되게 했다.
 
그가 의아했던 것은 그 거짓말을 왜 했는지 자기 자신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거짓말을 한다는 건 보통 누구를 속이거나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서다. 그런데 생기지도 않은 암을 꾸며 내서 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자기 거짓말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그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19쪽
그런가 하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스탈린의 스물네 마리 자고새 이야기는 어느 누가 들어도 농담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지만, 스탈린이라는 독재자를 둔 주변의 협력자들에게 그것은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은 독재자 앞에서 스탈린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여 웃지 않았을 뿐더러,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비난도 하지 않는다. 독재자의 시대는 농담이 진실 또는 거짓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쿤데라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농담도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그 농담이 어떤 질서 속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만이 진실이며 거짓인 것이다. 그것은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독재자를 빚댄 쿤데라의 농담인 것이다.
 
'욕실에서 손을 씻으면서 우리는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해 댔다. 그의 말은 거짓이었다. 거짓말!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31쪽
<농담>은 쿤데라의 첫번째 소설이고, 현재 나이 85세인 그를 생각해 볼 때, <무의미의 축제>는 어쩌면 쿤데라의 마지막 소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고국 체코를 떠나 프랑스에 정착한 쿤데라는 명작가로써 여러 작품을 써왔는데, 그의 작품의 줄기를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에 관한 것'으로 봐도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희안하게도 쿤데라의 소설에서 시간은 평행선이다. <농담>이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시간의 순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는데, 이번 작품은 더더욱 그러해 마치 앞뒤 맥락없는 단막극이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무언극을 본 것만 같다. 그러나 이토록 대사가 많은 무언극이라니. '그가 배꼽의 신비에 처음 사로잡힌 것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이다'와 같은 긴 제목을 달고 있는 각각의 단락들을 순서에 상관없이 뒤섞어도 소설 전체를 이해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을 것만 같다.
<무의미의 축제>에서 시간은 그만큼이나 소용이 없는 것인데,  불쑥 끼어든 과거의 사건은(한여자의 살해 장면 같은) 그것이 과거에 벌어진 일이라거나, 혹은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걸 한참 뒤에 알게되어도 소설 전체를 이해하는 데 전혀 어색하지 않다. 
때문에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무의미의 축제>가 대가의 말장난이거나 다소 성의없는 무의미한 글쓰기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무의미의 축제>의 각 단락들은 뜬금없고, 그 결말은 더더욱 황당하다. 나 역시 소설을 덮으며 '이건 뭐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은 이 소설의 제목이 '무의미의 축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쿤데라가 말하는 '의미없음'은 무엇에 관한 것일까.
 
일을 하고,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쟁취하고, 파티를 열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누군가에게 이해받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에로틱함에 취하고, 성에 집착하고...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죽음에 다가서기까지 시간을 보내기 위한 행위일 뿐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럼으로 삶에서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런 아포리즘이 아닌가 나름 짐작해 본다. 그러니까 죽음을 앞둔 삶은 축제이다.  반드시 죽음을 전제로 해야만 삶이 즐거움이며 기쁨일 수 있는 것이다.
 
 
죄책감을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 모든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 같아. 삶이란 만인에 대한 민인의 투쟁이지. 다들 알아. 하지만 어느 정도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 투쟁은 어떻게 펼쳐지지? 보자마자 사람들이 서로 달려들 수는 없잖아. 그 대신 다른 사람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우는거야. 다른 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자는 승리하리라. 자기 잘못이라 고백하는 자는 패하리라.
사과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57쪽
<무의미의 축제>를 소개한 글에는 무의미한 에로틱함으로 배꼽에 대한 의미가 많이 해석되어있지만 사실 나에게는 배꼽의 의미보다는 죄책감에 대한 알랭의 견해가 인상적이다.
나역시 알랭과 마찬가지로 틈만 나는 죄책감을 느끼는 '사과쟁이'이기 때문에 알랭에게 몹시 공감했는데, 고작 다른 사람의 환심이나 사자고 매사에 죄인인 양 행동하는 것이라는 샤를의 견해가 다소 당황스러웠다. 아니 그보다는 태어나면서부터 환영받지 못한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이해받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가 '사과쟁이'로 표현되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인데, '태생이 잘못이지만, 그러나 나는 존재하고 있다'는 슬픈 고백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무의미의 축제>를 읽기전 책 제목을 보고, 의미가 없기로는 '삶'만 한 것이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과연 들어맞았다는 것에 어느 정도 나도 삶에 도통한 나이가 되어가는 것 아닐까 싶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이미 의미가 없다라는 것을 관조하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앞서 <무의미의 축제>는 쿤데라의 첫소설<농담>과 한 줄기라고 했지만, '삶의 무의미'에 관해서라면 쿤데라를 더더욱 유명하게 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도 맥을 같이 한다.
모든 삶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죽음을 바라보는 혹은 기다리고 기대하는 모든 삶은 결국 축제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를 논하기 전에 오늘을 느껴라. 유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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