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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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사회를 뒤흔든 위대한 소설' '20세기를 마무리 하는 작품' '우엘벡 최고!' 와 같은 미사여구로 치장되는 우엘벡의 <소립자>를 드디어 읽었다. 열린책들의 세계문학은 하드커버임에도 장정이 가볍다는 것 말고는 빽빽한 글 때문에라도 도저히 좋아할 수 없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면 그런대로 빽빽한 자간과 행간에 적응되는 이상한 특성이 있다. 특히 <소립자>의 경우 미셸 우엘벡이란 작가의 이름도 어렵지만, 소립자라는 과학용어도 몹시 낯설었음으로 책을 펼치기까지 어떤 각오가 있어야 했다. 20세기 최고의 작품을 읽어내고야 말겠다는!

 

소립자가 뜻하는 것이 파편화된 각 개인이라는 것을 알겠다. 현대의 각 개인들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종교나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 쾌락을 쫓는다. 어떻게 살아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삶은 천하고 비열하기에 말초적인 관계속에서 죽음의 고통을 잊고자 하는 것이다. 그 속에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희망인 사랑은 없다. 우엘벡은 혹시 인간에겐 본시 남녀간의 사랑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연민도 없다는 그 말을 하고자 어쩌면 변태적으로 여겨질만 한 그렇게 많은 성애 장면을 그렸던 것은 아닐까.

 

서구인들이 <소립자>를  세기말을 반영하는 최고의 소설로 지칭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다소 의아하다. 우엘벡은 소설의 여기저기에서 인종 차별주의적 발언을 서슴치 않고, '이슬람은 가장 어리석은 종교'라고 칭할 만큼 종교에서 조차도 편파적이다. 또한 우엘벡은 육체조건으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듯한 발언도 서슴치 않으며, 이는 유성생식을 하는 인류 대신 무성생식을 하는 새로운 종의 탄생의 예고로까지 이어진다. 인간 존엄의 가치를 최고로 치며, 가부장적 권위와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가족간의 사랑, 인간에 대한 연민, 휴머니즘을 전통적으로 지지해온 동양에서조차 우엘벡의 소설이 찬사를 받는 것에 다소 어리둥절한 것이다. 어쩌면 겉으로 드러나 추구되어온 가치와는 다른, 추함을 뒤집어쓰고 숨겨져있던 본성을 드러내줬기 때문에 더 환영받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서구사회는 1970년대를 전후해 피임의 합법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성적인 해방을 맞고, 사회 전반에 쾌락을 쫓는 기류가 형성된다. 그 속에서 한 개인은 육체의 미적 가치와 젊음의 정도로 판단된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해서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쾌락을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젊은 육체만이 존중받을 만한 것으로 치부되고, 그러한 세계는 점차로 인간적인 가치들이 메말라가며 황폐해진다.

동양적 가치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주인공 미셸 제르빈스키의 인간에 대한 기계적이고 비정한 세계관이 그다지 거북스럽지 않았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처럼 고통을 벗어나 늘 행복한 혹은 도취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또 서로 우월해지려는 다툼없이 합리적 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회가 가능하다면 인간 외의 다른 종으로 진화된다한들 어떠한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사랑이란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투영이고 보면, 한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음에도, '흰머리 파뿌리되도록'이란 말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강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가족적 가치만이 소중한 것으로 여기며 한 인간을 억제한다고 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드러나지 않게 곪은 사회가 더 무서운 사회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거짓으로 가득찬 세상이라는 것은 이미 누구나가 느끼는 바가 아닌가.

 

한편 이 소설은 인간 공통의 고통과 쾌락을 떠나, 미셸과 뷔르노의 개인사이기도 하다. 미셸과 뷔르노는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그둘 모두 어머니의 사랑은 알지 못하고 성장한다. 이후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를 결정하는 '절대적 존재와의 유대'라는 초기경험이 둘 모두에게 전무한 샘인데, 이는 미셸과 뷔르노의 이후 삶에 정반대의 모습으로 발현된다.

미셸은 사랑도 쾌락도 추구하지 않은채로 비정하고도 기계적인 감정으로 인간을 뛰어넘는 '종'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한 미셸도 전 인생을 통해 바라는 게 있었다면, 그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였다고 고백한다. 반대로 뷔르노는 쾌락을 쫓는 삶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주고받는 말초적 쾌락 속에서 뷔르노는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5세 이전의 초기경험을 중요시한 프로이트의 이론이 아니더라도 절대적 존재에 대한 의지의 경험은 개별적 인간을 서로 묶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는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아니던가. 

불교에서 보는 세상에 대한 관점 '인드라망'이 생각난다. 인드라라는 한없이 넓은 그물에 꿰인 구슬들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비추어주는 관계라는 인드라망. 우리는 모두 인드라의 넓은 그물에 걸린 구슬이다.

 

미셸이 할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괴물같은 울음을 토해내는 장면과, 절대적 쾌락의 표현으로 뷔르노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느끼는 크리스티안의 최후의 모습은 너무 가슴이 아팠다. 최정례 시인은 '죽음'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다는 듯이 / 본처들은 급습해 첩의 머리끄뎅이를 끌고 간다 / 상투적 수법이다 / 저승사자도 마찬가지다'

미셸 체르빈스키의 연구가 실제로 성공할 수 있는 그런 것이라면, '죽음'도 모르는 그런 종이 탄생했으면 좋겠다. 너나 할 것없이 우리 모두가 슬픔 속에 지척대는 이유는 언제 어느순간 덮칠지 모르게 매복해있는 '죽음' 때문이려니. 체르빈스키처럼 비정함은 갖추지 못한 나는, 인간 '종'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런 반면 뷔르노와 크리스티안의 성애장면은 외설스럽기보다 지루하고도 지루해, 우엘벡이 포르노에 가까운 장면에 왜 이토록 집요하게 집착하는 것인지 다소 당황스럽기도 한 한편으로, 인간 모두가 '죽음'이 두려운 만큼 '성'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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