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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사나흘이 멀다 하고 답이 없는 대답을 궁리해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왜 그래, 뭐가 문제야,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게 뭐니.’
질문에 적절한 심오한 진심을 담아 답을 쏟아내면 부실한 철학보다 불성실한 일상 덕에 설득력을 잃어 버렸던, 더없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음에도 으레 ‘평범하게’라던가, ‘다른 애들처럼’이란 훈계로 끝을 맺었던. 비단 학창시절의 어느 한 때로 단정지어 얘기하기엔 모자람이 있다. 단순히 치기 가득했던 반항기로 정의하거나 통과의례적 질풍노도라 말한다면 내 발육이 많이 느린 것 같다고 할 수 밖에. 애정 어린 걱정이 앞서 추궁 아닌 추궁이 되어 버린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마음만 다잡으면 너도 빛을 낼 수 있다는 무한한 응원이 외려 부담으로 다가왔던 한 편, 절실히 믿고 싶기도 했다. 스스로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모호하게 뒤섞여 뭘 하고 싶은지, 뭘 잘하는지 도통 모르겠던, 누가 보아도 빛나는 한창 때였지만 그래서 더 마음속 산란들이 못마땅하게 여겨지던 때.   


아마 예순을 지긋이 넘긴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문학계의 거성도 별 잘날 것 없이 목 놓아 하늘만 올려다 보았던 개밥바라기 같은 시절이 있었나 보다. 젊은 시절 작가의 초상으로 분한 준이가 회고하는 1960년대, 소년도 청년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을 부유하는 젊은이들의 소소한 일상이 세심하게 적혀 있다. 교과서에 몇 줄로 정리된 역사적 사건들이 속속 등장하고 그걸 친히 체험하게 되는 시국 속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지만 황폐해진 조국을 추스르려 사활을 다하는 영웅담이나, 암울한 시대에게 희생을 강요 당하는 뼈아픈 인생사가 들어 있진 않다. 지금과는 달리 고등학생이면 식자 취급을 받던 시절, 명문고교에 몸 담고 있는 차세대 지식인이자 사회지도층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던 이들에게 시국에 대한 개탄이 없었을 리 만무하지만 작가는 시대의 아픔 뒤로 개인의 소소한 일상을 가려 놓지 않았다. 분명 시대는 변했을지언정 탄식이 절로 이는 어지러운 시국은 변하지 않은 요즘을 둘러봤을 때, 정작 이 와중에도 중요한 건 다이어리 빼곡히 적어 둔 나의 오늘과 내일이니 작가가 옳다 싶다.  


준이의 자퇴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들의 부유기는 유쾌 발랄하지 않다. 그보다 아슬하고 무모하다. 제 스스로 궤도를 이탈한 소행성이라 말하는 준이의 표현을 빌려 쓰자면 “소행성이여, 궤도 따위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발광(發光)하며 원하는 대로 흘러가라.”는 종용이 담겨 있다. 그래서 위험해 보이고, 무모해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애초에 방황이란 정처 없이 목적 없이 떠도는 것이다. 분명한 목적과 확고한 의지가 있다면 시간이 좀 더디 걸렸더라도 그건 방황이 아닌 여정이라 하는 게 맞을 게다. 준이처럼 혹독하게 떠돌며 자신을 궁지까지 내몰라는 달콤한 꼬드김이 아니다. 고루 답답한 일상임에도 우물쭈물하다 시간만 흘려 보낸 용기 부족했던 그때를 비판하라는 것도 아니다. 분명 읽는 내내 지질한 나의 기억들과는 많이 다른 그들의 일상이 자주 저울질 되며 부러움이 피어나지만, 이제 망설임은 접어두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되는대로 한 번 질러 보라는 뜻은 아닌 것 같다. 되려 도닥인다. 배부르고 등 따시니 복에 겨워 만들어낸 줄 알았던 그때의 허튼 상념들이 정말 쓸데 없었는지 그이들을 통해 다시금 들여다 보게 한다.  


고향집에서 어머니와 화초나 손질하며 사는 것이 꿈인 인호와 사서 고생을 일삼는 준이, 이루지 못할 애정문제로 고민하는 상진이, 그러한 감성들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정수, 그렇게 떠도는 그들이 염려되는 영길이. 누구 하나 고민거리 없지 않지만, 누구 하나 그것으로 수선을 피우지도 않는다. 언젠가 정수가 쓴 봄비라는 시처럼 ‘감자밭을 적시기엔 아직 적은’ 얕은 지식과 모자란 감성 그대로, 그때의 지질했던 감성이 보탬이나 덜어냄 없이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소년기의 풋내가 서려 있는 듯해 자기 이름이 싫다던 인호의 모습이나 삶의 절실함을 갈구했던 준이의 모습에서, 사랑이라 부르기엔 설익은 감정 때문에 쩔쩔매는 상진이나 이런저런 이유로 흥미 없는 건축과에 진학한 정수, 이런 그들을 지켜보는 노심초사한 영길이. 학비가 없어 재수하며 돈을 벌어 기어코 대학에 입학한 미아. 아빠와의 기싸움의 일환으로 반항을 일삼는 철부지 공주님 선미. 


비록 준이를 중심으로 가장 많은 화두가 던져지고, 그 과정이 보여지지만 결국 그들 모두가 떠올리기 지난한 그때의 내 모습이었다. 떠올리면 가위 눌리듯 답답하기만 했던 그때의 상념들을 저이들이 하나씩 나눠 안고 내가 모지리여서 그랬던 것이 아니고, 그 땐 그런 거라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도 위로를 한다. 인생에는 답이 없다니 준이의 여정만이 참된 것이라 할 수는 없겠다. 다만 가장 속 깊은 이야기였다 할 수 있겠지. 어쨌든 그들 모두 부질 없는 상념들과 진심을 다해 용기 있게 대면했으니 그걸로 됐다.  


그들이 그렇게 부유하다 어디로 흘러갔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지금쯤 “넌 꿈이 뭐니?”라는 심오한 질문을 주책없이 내뱉는 기억상실증의 기성세대가 되어 있겠지. 준이가 유랑 끝에 발견한 깨달음이 뭔지도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가 여정 중에 마주했던 진솔한 삶과 정겨운 이웃, 시대와 동떨어질 수 없었던 그들의 아픔과 정직한 노동, 그냥 오늘을 살아내자는 신명은 분명 길을 나섰기에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대한민국 문학계의 거성이 된 황석영의 소설 여기저기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한 이가 있을까?  


“목마르고 굶주린 자의 식사처럼 맛있고 매순간이 소중한 그런 삶”에 시시한 생각이나 시시한 일상 따위는 없다. 한창 때의 발랄함과 철 없는 무용담 뒤에 가려두었던 부질 없이 흘려 보낸 시간들을 담담히 되짚어 봐야겠다. 매순간 치열하지 않았던 삶이 부끄럽지만 박차고 나가는 것만이 용기는 아니다. 숨겨 버리고 싶은 어느 때의 자신의 모습을 돌이키고 싶은 마음 없이 부끄러운 대로, 후회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적잖이 치열한 사투일 것 같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란 시 구절처럼 뭘 몰랐던 내가 안타까웠던 시절이 있다. 그 때 알았으면 했던 지금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을 그처럼 예순이 넘어서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생겼다. 궤도를 이탈한 소행성들에게 개밥바라기별이 작은 힘이나마 반드시 보탬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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