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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평점 :
우리는 여태까지 많은 ‘디스토피아’를 읽어 왔다. ‘디스토피아’라는 가상의 세계관을 설정한 작품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현대 사회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1984』나 『멋진 신세계』를 읽고 독자들은 전제주의에 대한 경계심과 우민화에 대한 우려를 갖고, 제각기의 방법으로 이에 대항해왔다.
두 차례 큰 전쟁을 겪으면서 기존의 이성이 파괴되었던 20세기에 발표된 디스토피아 작품들은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까지 위대한 메시지를 던진다. 20세기의 디스토피아는 21세기에도 파급력을 가졌다. 그렇다면 19세기의 디스토피아는 어떤가?
신성이라는 단어만 언급되어도 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흐려진다.
-184p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 존재의 절반의 놀라운 기능을 박탈하게 될 편협하고 배타적인 이성에 대한 시각에서
이중성이 추론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231p
새뮤얼 버틀러의 『에레혼』은 1872년 초판 된 디스토피아 계의 할아버지쯤 되는 풍자 소설이다. 『1984』나 『멋진 신세계』는 물론이거니와 조르주 페렉의 『W 혹은 유년의 기억』 중 W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에레혼과 매우 닮았다. 버틀러의 에레혼nowhere를 거꾸로 쓴 erewhon은 19세기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에레혼은 그야말로 ‘부조리’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질병은 큰 죄악이라 몸이 아픈 사람들은 법으로 처벌을 받는다. 오히려 범죄자들은 일말의 죄의식도 갖지 않는다. ‘비이성의 대학’이 존재할 정도로 이들은 이성보다도 부조리를 우선시한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도덕관을 역으로 뒤집어 놓은 것은 당대 영국의 풍습들에 대한 풍자로 보인다.
판사의 선고가 끝나자 죄수는 자신이 정당하게 처벌받았으며 공정한 재판이라고 중얼댔다. -132p
특히 11번째 챕터인 ‘병자에 대한 재판’에서, 부조리하다고 생각되는 병자에 대한 처벌을 모두가 이해하고 인정한다. 심지어, 병자인 죄수까지도. 만약 유리몸인 내가 에레혼에서 태어났다면 진작에 종신형을 받았으리라. 아니, 아기에 대한 이유 모를 비난이 당연시되는 사회이니 아마 태어나자마자 나를 향한 손가락질에 화병으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인간의 귀가 불필요해지고 기계 자체의 세밀한 구조에 의해 기계끼리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으며, 그 언어도 동물의 울음소리에서 인간의 언어처럼 복잡한 구조로 발전하는 때가 오리라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253p
하지만 이 소설의 백미는 소설의 끄트머리 쪽에 있는 기계에 대한 에레혼 사람들의 인식이다. 23챕터 이전까지는 에레혼의 전통을 소개하며 독자들이 가상의 세계관에 빠져들게 했다면, 이후부터는 에레혼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 예상되는 미래를 이야기하며 독자들이 살고 있는 현대 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에레혼에서는 대규모로 기계를 거부하는 러다이트 운동이 있었다. 반기계파의 승리로 모든 기계는 파괴되었고 화자의 시계가 문제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러다이트 운동은 실제로 19세기 초 영국에서 있었던 일인지라 소설에 당대의 시대상이 반영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반기계파에서 내세운, 화자의 번역으로 작성된 ‘기계의 책’ 챕터에서 보여주는 통찰력은 감탄스럽다.
증기기관에 의식 같은 것이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중략)…
현재 인간은 자신이 이 주제에 관심이 있다고 믿고
기계가 더 번식하게끔 수많은 노동과 시간과 생각을 투여한다.
19세기 중반인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고 학계는 큰 논쟁에 휩쌓였다. 기저에 창조론을 둔 종교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대립이 시작되었다. 버틀러는 이 진화론을 기계에 차용한다. 기계에게도 ‘의식’이 존재하며 인간이 그랬던 것처럼,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는 것. 기술의 발전이 현대 사회,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인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지배는, 당장 우리에게 주어진 문명의 이기를 앗아간다면 이전 같은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편리함의 지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제 와서 19세기의 러다이트 운동처럼 편리한 것들을 파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우리가 『1984』나 『멋진 신세계』를 읽고 비판 의식을 가진 것처럼, 편리함에 모든 것을 의존하지는 말아야 할 것 같다. 편리한 것들이 해결해줄 수 없는 필수 불가결한 불편함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그 불편함을 밀어내지 말아야 한다.
에레혼에서는 모든 기계를 파괴하는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이에 대응했다. 에레혼에서도 기계파와 반기계파 사이의 오랜 갈등이 있을 정도로 극단적인 방법이다. 에레혼이라는 국가가 디스토피아로 설정되었기에 과격한 모습을 보였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보여준 비판 의식은 그들의
'내재되고 자연스러운 부조리함'과는 달리 꽤나 건강해보인다. 어떤 면에서는, 에레혼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사이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친다. 인공지능을 포함한 고도의 문명의 혜택은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이 질문에 대한 논의로부터 ‘진정한 유토피아’로 향하는 길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