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을 향한 예리한 칼잽이, 춈스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를 읽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칼의 노래>가 마음 속에 얽히곤 했다. "이순신의 칼은 인문주의로 치장되기를 원치 않는 칼이었고,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는 칼"이라는, 이순신의 칼만큼이나 치열하고 순결한 김훈 선생님의 말씀도 맴을 돌았다. '정치'는 순수한  '정치'의 것으로, '무(武)'는 '무'의 영역 안 그 정확한 자리로, 라고 외치는 칼의 노래.  '정치' 와 '무', 그 둘 사이를 어정쩡하게 흔들리다 간 많은 정객들 틈에서 과거의 이순신은 아스라히 스러져 갔고, 오늘날의 춈스키는 그 '칼'로 자본주의의 구조와 모순의 이면을 가른다. 홍해를 가른 모세의 지팡이가 이처럼 날렵하고 다급했을까.

  내가 춈스키를 처음 알게 된 건 대학에서 변형생성문법을 배울 때였다. 그 때는 그저 언어학 쪽의 신선한 학자정도로만 마음속에서 매김됐었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한 신문에서 우연히 포리송 탄원서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룬 뒤의 춈스키와 그의 고언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은 어렴풋한데 아마 이러했던 것 같다. " 내가 누군가의 의견을 지지한다는 것과, 그가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지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책을 쭉 읽으면서도 가장 먼저 눈이 간 대목도 사실 이 글 전체 맥락과 다소 거리는 있으나, "어떤 이유로도 제한될 수 없는 표현의 자유"를 말하면서 프랑스 지식인의 폐쇄성을 꼬집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어디 그런 합리적이지 못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프랑스에만 있으랴.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토론 문화에 대한 경험이 비천하고 분단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의 배타성이 벽으로 가로막힌 경우,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예 귓바퀴를 틀어 막아버리거나 적대적인 감정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표현의 내용과 표현의 형식을 '포를 뜨듯이' 아주 합리적이며 예리한 칼날로 갈라 사고하는 진보적 정치 운동가로서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그것만큼이나 새롭고 설레는 과정이었다.
  이 책은 1999년, 현대 정치, 언론, 경제, 지식인의 문제에 대하여 프랑스의 두 언론인(드니 로베르, 베로니카 자라쇼비치)과 춈스키와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대화 형식 그대로 담아놓았다. 우선, '지식인'과 '진실'에 대한 뜻매김부터가 인상적이었다. 춈스키는 '지식인'이란 "인간의 문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통찰해보는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이라 정의하면서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정규교육을 얼마나 받았는지, 또 얼마나 저명한지, 그리고 우리 체제 안에 반체제 운동을 하건, 우리 적의 체제 안에서 체제 전복적 활동을 하건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기반 위에서건 진실을 말하는 이가 바로 '지식인'이라 본다.
  그리고 '진실'이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한 사실"이라 했다. 우리 세계는 '진실'이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을 칼로 예리하게 발라 찾아내는 참 지식인(춈스키는 "책임 있는 지식인"이라 했다.)도 거의 없는 듯하다. 춈스키는 진실이란 "의자 위에 있는 책"을 두고 "책이 의자 위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간단하다고 했지만, 우리 세계 속에서 진실은 그처럼 간단하거나 자명하게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 진실을 제대로 밝혀내는 지식인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의 세계는 가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판을 친다. 권력의 중심은 부자나라들에 있다.  최강대국들(미국, 일본, EU)과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 금융기관(IBRD, IMF)과 국제기관(WTO)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거대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다. 이러한 체제와 국가 권력 기관은 서로 공생하고 있다. 더욱 암담한 것은 그 속에서 '지식인'의 제대로 된 역할을 감당해야할 언론이나 학교, 인텔리겐차, 그리고 여론에 영향을 미치면서 통제하는 연구기관들이 권력에 동원되어 대중이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권력기관들은 지식인들을 앞세워 대중의 정신을 통제하며 권력을 강화시킨다. 춈스키는 예전에는 폭력적 수단으로 대중을 억압하고 진실을 은폐했는데, 이제는 정교하게 꾸며진 여론조작이라는 전략으로 대중을 통제한다고 "조작된 동의"란 분석 틀을 가지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가짜 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주입을 통해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천박한 것'에 집착하는 인생관을 갖게 되면서 장시간 노동은 기꺼이 수용하되, 타인에 대한 연민과 연대와 같은 인간적 가치는 완전히 망각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는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민주주의를 확대시키려는 소수 대중과, 민주주의를 제한하려 안간힘을 다하는 지배계급간의 투쟁만 계속될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형편도 춈스키가 분석한 바와 결코 다른 걸음을 걷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미 IMF로 인해 우리 은행들은 대부분이 외국자본으로 넘어가 있는 실정이고, 다른 공공기업도 민영화의 위기를 겪고 있다. 공공기업의 민영화는 공공기업을 민간기업이나 외국계 다국적 기업에 넘기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모습은 과점형태의 경제활동을 우려케 하므로 우리 경제구조나 사회 전반에 걸친 부작용을 낳을 것임은 분명하다. 또, WTO로 인한 우리 농업경제는 얼마나 피폐해져 있는가. 이라크 파병 문제의 저변에는 또 얼마나 큰 경제문제가 걸려있는가. 하루를 멀다하고 쏟아지는 정치권력자들의 부패, 비리는 언제나 경제 경영자들과 짝을 이룬다. 이런 정치와, 경제의 암담하고도 탄탄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는 체제 속에서 언론이나 지식인의 작태는 또 얼마나 '조작된 동의'를 구하고 있는가.
  춈스키는 이런 곤경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중의 결집된 힘에 있다고 본다.  억압받는 대중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이 만들어지고 또, 우리 세계가 느리나마 진보의 역사를 걸을 수 있게 된 것도 여론의 압력, 즉 조직화된 대중의 역량에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 언론과 지식인은 민간기업(대기업)에 시청자나 팔아 넘기지 말라고, 이해관계가 밀접히 연결된 국가권력에도 종속되지 말라고, '조작된 동의'의 배달부가 되지는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춈스키의 그러한 예리하면서도 따끔한 충고는 비단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언론과 지식인들만을 겨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언론을 포함한 지식인은 '조작된 동의'가 아닌 '진실'의 배달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식인은 인간 문제에 대한 진지한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진실을 밝혀내고 한편, 언론은 자신의 고유 영역으로 돌아가 진실을 밝혀내는 태도와 모순된 체제에 대한 비판, 깊이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노력에 경주해야 할 것으로 본다. 정치나 다른 경제 분야도 역시 본래 영역과 범위에 충실한 활동과 책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인간 문제 각 영역의 고유함과 영역이 분명하지 않다 보니, 언론은 정치의 수단이 되고 정치는 경제의 목적이 되고 하는 옳지 못한 구조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춈스키를 읽는 동안 계속 떠올렸었다. 정치적인 알력구조 속에는 절대 자신의 '무'의 세계를 건설하고 싶지 않았던, 너무나도 사실적인 이순신과 그의 외로운 '칼의 노래'가 자꾸 맴돌았던 것이 이 책에 대한 잘못된 읽기가 아니었다면, 어느덧 춈스키는 분리되고 선명해져야 할 세상을 향해 예리한 칼을 갈고 있으리라.
          2004년 5월 4일 쉬는 시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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