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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ㅣ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평점 :
『광장』이라는 작품을 기억하시나요? 제목만을 기억하는 분도 계실 수 있고, 혹은 ‘중립국’이라는 단어를 듣고 떠올리실 분도 있으시겠지요. 저 역시 어렴풋이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에는 국어책에 실린 문학작품들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었습니다. 내신 공부, 수능 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없던 때였죠. 작품의 재미,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는 빠르게 주제, 의미, 출제 가능성들을 따지던 시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쉬워요. 왜 그때는 몰랐을까? 그 한편 한편이 재미있고 읽을 가치 역시 충분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분명 더 좋았을 텐데 말이죠.
그때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광장』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익숙한 제목인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고, 국어책에 선정될 정도의 작품을 새삼 한번 읽어보고 싶었던 이유였지요. 그렇게 당시 운영하던 독서모임을 통해 최인훈의 『광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작 읽어보지 않았음을 후회하였었죠.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에 대해 먼저 살펴보려 합니다. 그가 살았던 삶과 고뇌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지요.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명준은 흡사 철학자 같은 인물입니다. 언제나 생각에 잠겨있기 마련이지요. 이성관계 혹은 유흥 거리들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자신의 방에 앉아 책을 읽고 사색에 잠기기를 즐기는 인물이지요. 잠깐 그의 생각을 들여다볼까요.
무언가 마지막 것을 얻기만 하면 다시 생각이란 이름의 화냥년을 잠자리에 들이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면서, 낯빛과 몸짓을 가꾸는 마음의 거울 속에서는 자꾸 연지가 빗나가고 곤지가 번진다. 끝없이 실수를 거듭하고 뉘우침이 따른다.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주변에 보이는 늘상 생각에 잠겨있는 그런 인물이랄까요. 지금의 우리 젊은이들과는 시대는 다소 차이 나지만 그의 사색과 방황이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시대가 달라도 통하는 것이 있는 것일까요? 그나마 명준의 독특한 면을 보자면, 책을 많이 읽는다는 점입니다. 조금은 씁쓸한 사실이지만, 요즘의 우리들은 책을 많이 읽지 않으니까요. 유달리 명준이 자신의 책장을 바라보며 하는 생각이 제게는 기억에 남습니다.
윗목에 놓인 책장에 마주 선다. 한번 죽 훑어본다. 얼른 뽑아보고 싶은 책이 없다. 400권 남짓한 책들. 선집이나 총서, 사전류가 아니고 보면, 한 책씩 사서는 꼬박 마지막 장까지 읽고 꽂아놓고 하여 채워진 책장은 한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었다. 월간 잡지가 한 권도 끼지 않았다는 게 자랑이다. 그때그때, 입맛이 당긴 책을 사서 보면, 자연 그다음에 골라야 할 책이 알아지게 마련이다. 벽 한쪽을 절반쯤 차지하고 있는 이 책장을 보고 있으면, 그 책들을 사던 앞뒷일이며, 그렇게 옮겨간 그의 마음의 나그넷길이, 임자인 그에게는 선히 떠오르는 것이고, 한 권 한 권은 그대로 고갯마루 말뚝이다.
무언가를 찾는지 모르면서도 무언가를 찾는 명준. 그게 삶의 의미일지, 맺음말일지 모르지만 명준은 늘 생각하고 생각합니다.
그런 명준의 삶을 뒤흔드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소식도 모르는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경찰서에 불려가는 사건이지요. 이미 명준에게는 그 존재마저 희미한 아버지가 북에서 대남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상의 대립이 치열했던 시절. 명준은 현재의 자신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로 추궁을 받고 형사에게 얻어맞지요. 아무리 이성적으로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잃어버렸던 아버지가 명준에게 되살아나는 순간입니다. 형사에게 얻어맞아 코피를 흘리며 경찰서를 나설 때 명준은 생각합니다.
좋은 철
궁리질 공부꾼은
보람을 위함도 아니면서
코피를 흘렸는데
내 나라 하늘은
곱기가 지랄이다.
눈물이 흐르고, 분하고 서러웠던 그날. 명준은 그의 방문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명준의 밀실이 무너지는 소리였습니다. 튼튼하다고 생각하던 그의 문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순간. 자신의 밀실이 무너졌을 때, 그리고 자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고 생각했던 ‘윤애’가 명준을 거부했을 때, 명준은 남한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광장』에서 ‘광장’과 ‘밀실’의 개념은 핵심입니다. 인간은 광장에서만 혹은 밀실에서만 갇혀서 살수는 없죠. 그 둘 모두를 적절히 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살 수 있습니다. 명준이 보기에 남한에는 밀실만이 존재했습니다. 남한의 광장에는 추악함과 배신만이 남아있었죠. 모두가 그 광장에서 서로를 등쳐먹으며 오직 자신의 밀실만을 가꾸는 데 치중합니다. 마치 개미가 먹을 것을 물어다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듯이 말이죠. 그러니 명준 자신의 밀실이 무너졌을 때, 그는 떠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하지만 북에서마저도 명준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명준이 제대로 된 광장을 찾으리라 생각하고 간 북의 광장은 생각과 달랐습니다. 열정을 가장한 그곳에는 진짜 열정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게 되지요.
신명이 아니고 신명 난 흉내였다. 혁명이 아니고 혁명의 흉내였다. 흥이 아니고 흥이 난 흉내였다.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소문뿐이었다.
명준이 보람을 느끼고 살만한 광장은 남에도 북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북은 어딜 가나 흉내뿐이었고, 숨이 막히는 ‘잿빛 공화국’이었습니다. 아. 도대체 한 인간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광장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요. 결국 명준이 찾아낸 최후의 광장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그곳은 양손 끝을 맞잡아 만든 광장이었습니다.
두 팔이 만든 둥근 공간. 사람 하나가 들어가면 메워질 그 공간이, 마침내 그가 이른 마지막 광장인 듯했다.
그 안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명준이 북에서 만난 ‘은혜’입니다. 남한도 북한도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보람을 느낄 곳을 찾지 못한 명준에게 남은 것은 은혜뿐이지요. 당도 동무도 명준에게는 필요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조그마한 광장과 은혜만이 소중합니다. 하지만 시대가 낳은 끔찍한 전쟁으로 은혜마저 잃고만 명준은 어디로 가야 했을까요? 그는 광장을 잃고, 그의 밀실은 이미 비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익히 기억할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전쟁이 끝난 후 명준의 거취를 정하는 순간이지요. 남과 북은 각각 명준과도 같은 지식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설득합니다. 하지만 명준은 남과 북 그 어느 곳에도 가고 싶어 하지 않지요.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동무, 앉으시오.”
명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자랑스러운 권리를 왜 포기하는 거요?”
“중립국.”
……
“자넨, 어디 출신인가?”
“……”
“음, 서울이군.”
설득자는,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면서,
“중립국이라지만 막연한 얘기요. 제 나라보다 나은 데가 어디 있겠어요. 외국에 가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지만, 밖에 나가봐야 조국이 소중하다는 걸 안다구 하잖아요? 당신이 지금 가슴에 품은 울분은 나도 압니다. 대한민국이 과도기적인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는 걸 누가 부인합니까? 그러나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북한생활과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겁니다. 인간은……”
“중립국.”
자. 우리가 알던 ‘중립국’은 바로 이 모든 일들의 결과였습니다. 중립국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겪어본 두 곳이 모두 싫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중립국으로 가는 배를 탄 명준입니다. 명준의 고뇌와 슬픔 그리고 결정을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부디 바라는 대로 중립국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를 빌어보지만, 그는 중립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마저 소외감을 느끼고 고독해지죠. 그럴 때마다, 명준은 하릴없이 자신의 좁디좁은 광장을 찾아갑니다. 배 뒤쪽 난간 그 어딘가.
이야기의 끝에 명준은 광장을 찾아 떠납니다. 물론 그곳이 결과적으로 중립국은 아니었습니다. 명준은 은혜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르는 흰 새와 작은 새를 보며 남한도 아니고, 북한도 아닌, 그리고 중립국도 아닌 다른 광장을 찾게 되죠. 비로소 찾은 푸른 광장.
돌아서서 마스트를 올려다본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바다를 본다. 큰 새와 꼬마 새는 바다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다. 바다.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 부채꼴 사북까지 뒷걸음질 친 그는 지금 핑그르 뒤로 돌아선다. 제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그리고 곧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의 선장은 보고를 받게 되죠. 석방자 한 명이 사라졌다는 보고, 그리고 그 석방자는 이명준이라는 보고였습니다.
21세기인 지금. 우리는 어떤 광장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밀실은 안전한가요? 시간은 흘렀지만 확신이 없습니다. 우리의 광장은 이명준이 그토록 바라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곳인지요. 1973년 일역판 서문에서 최인훈 작가는 말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 작자는 이 소설의 주인공에 대해서 큰소리칠 자리에 있지 못하다. 그가 쓰러진 데서 한 걸음인들 내디뎠다는 믿음을 못 가졌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와 같은 아쉬움을 1989년판을 위한 머리말에서도 밝히고 있지요. 물론 우리의 부모님이 이뤄온 눈부신 업적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과거보다 경제상황과 생활환경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지요.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바람직한 ‘광장’을 가졌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생활이 단순히 살아 있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성공 신화, 대박 신화가 광장에 떠돕니다. 우직하게 자신의 꿈을 펼쳐 보란 듯이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들립니다. 작게는 모두가 풍족하게 사는 듯이 자신의 삶을 갖가지 창구를 통해 내보입니다. 모두가 잘 살고, 모두가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터넷, 티비, 핸드폰이라는 작은 창이 아니라, 내 주변 삶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마치 풍문만을 듣고 사는 것 같네요.
막상 나가본 현장, 지금의 광장 역시 아직 완벽하진 않습니다. 여전히 이명준이 남에서 느꼈던 배신, 탐욕, 추악함이 여기저기 보이고, 더불어 북에서 느꼈던 흉내와 소문이 즐비하지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사회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가치관을 들이밀며 내 방을 부수고 들어오는 경우도 여전히 허다합니다. ‘헬조선’이라는 말로 국내를 떠나려는 모습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명준의 선택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것일까요?
밀실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자유와, 바람직한 열정이 가득한 광장. 중립국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 우리는 여전히 광장과 밀실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때로는 한 쪽에 갇혀 숨이 막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광장과 밀실 어느 한 곳에서만 살 수는 없습니다. 평범한 이명준이 남과 북으로 그리고 중립국으로 갔던 이유입니다. 방황하는 모든 21세기 이명준에게 바랍니다. 부디 자유와 열정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광장과 밀실이 살아 있는 곳을 찾기를. 풍문에 살지 말고, 현장으로 나아가기를. 최인훈의 『광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