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슈퍼맨 : 레드 선 ㅣ 시공그래픽노블
마크 밀러 외 지음, 최원서 옮김 / 시공사(만화)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http://onoma.tistory.com/17
<책의 일부 대화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글을 남기게 되어 매우 유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정도를 넘어섰다.
나는 책의 내용 면에서 이렇다 저렇다할 생각은 전혀 없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것이 충분히 매력있는 이야기이란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고, 또 기대만큼은 해준다는 걸 인정하는 바다.
문제는 출판사의 번역과 편집이다. 이 책은, 번역자가 원문 언어만 할 줄 안다고 해서 번역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이며, 편집자가 출판에 있어서 역할을 제대로 못했을 때 얼마나 웃기는 결과가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오탈자는 기본이고 비문이 난무한다. 시공사에서 출간한 그래픽 노벨 중에 "킹덤 컴"이나 "시크릿 워" 등도 나름의 경쟁 상대가 되지만, 이건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몇 개만 골라서 소개한다.
"...난 심지어 사람들이 말하는 번쩍번쩍한 서커스 광대를 잠깐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더 경솔한 행동들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 적도 있다." (p.9)
"In my more introspective moments, I even wondered if people were behaving more carelessly in the hope that they might catch a glimpse of ther gaudy circus clown."
상당히 아름다운 비문이다. 이건 번역 작업에서 동반될 수 있는 원문 해석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원문을 확인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지만, 이 문장 전체의 주어는 "나(I)"이고, 전체 술어부는 "생각한 적도 있다(even wondered)"이다. 그리고 "사람들(people)"에 호응하는 술어는 "하고 있다(behave)"이다. 하지만 번역문에서는 if 절 이하 문장, 즉 "사람들~" 이하의 안긴 문장 처리가 제대로 안 되어서, "나"에 대응하는 술어가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 적도 있다" 처럼 보이며, 대신에 "사람들(people)"에 대응하는 술어부는 "말하는"처럼 보인다. 즉 번역된 문장 구조를 고려할 때 그 의미는 아마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거다.
"나는 경솔한 행동을 했고,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닌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사람들은 번쩍번쩍한 서커스 광대에 대해서 말했고, 나도 그걸 보고 싶었다."
원문에서 "하고 있다(behave)"의 주어는 "사람들(people)"이지 "나(I)"가 아니다. 이 모든 건 "사람들이 말하는"이라는 구절에서 "사람들"의 주어-술어 호응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혹은, 원문에 더 충실한다면, (아마도) "말하는"에 호응하는 주어인 "그들(they)"을 생략해버렸기 때문이다. -- 번역문에서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술어와 호응한다고 억지로 생각한다고 해도, 그런 경우엔 "말하는"과 호응하는 주어가 없으므로 역시 비문이다. 본래의 번역문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제대로 번역한다면 아마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거다.
"...난 심지어 사람들이 번쩍번쩍한 서커스 광대를 잠깐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더 경솔한 행동들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 적도 있다."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적어도 주어-술어 호응은 그럭저럭 이루어진다. 주어-술어 호응을 문장 안에서 구현하지 못한다는 건 영어 문제가 아니라 기초적인 한국어가 안 된다는 거다. 아니면 그걸 고칠만큼 성의가 없거나. 이런 예는 더 있다.
"난 그동안의 시간을 슈퍼맨이 나를 욕보이고 굴복시켰듯이 그를 욕보이고 굴복시키는 데 쓸 거야." (p.43)
"This time will be spent devising a plan to humilate and defeat Superman just as he has humiliated and defeated me."
놀랄만한 비문이다. 영어 수동태 문장이 한국어 문장으로 번역되면 일견 어색한 것이 사실이고, 능동태로 바꾸어서 번역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이 문장의 오류는 그것과 무관하다. 문장을 능동태로 옮기면, 의미상 주어가 "나(I)", 최종 술어는 "쓰다(spend)", 목적어가 "시간(time)"이 되는 건 맞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들의 호응 관계가 엉망이다. 원문을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이 문장에서 목적어인 "시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가리킨다. 즉 "앞으로 이런 저런 일에 시간을 쓸 것이다(will spend)"이지, "그동안 이런 저런 일에 시간을 썼다"가 아니다. 아마 "슈퍼맨이 나를 욕보이고 굴복시켰듯이 그를 욕보이고 굴복시키는"을 단일한 문장 수식 성분으로 번역하려고 하면서 발생한 오류 같은데, 그렇다면 "그동안"이 수식해야 하는 건 "시간"이 아니라 이 수식 성분 자체가 되어야 한다.
여하간에 이 문장은 너무 엉망이라서 손을 대기도 힘들다. 그래도 고쳐본다면,
"난 그동안 슈퍼맨이 나를 욕보이고 굴복시켰듯이 그를 욕보이고 굴복시키는 데 (앞으로의) 시간을 쓸 거야."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아예 just as 이하를 잘라내서 문장 두 개를 만들거나.
이정도만 해도 번역자나 편집자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번역/편집 작업을 한 건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대미를 장식할 표본이 아직 남아 있다. 난 아래 문장을 보면서 울었다.
"하지만 그는 최근 들어 기이한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너무 열심히 연구하면서 세상에 그들의 빛나는 '레드 선'이 내 힘을 약하게 하였으며 내 이성이 인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p.-5[뒤에서부터 5페이지])
"But he's been acting strange lately: working too hard and telling the world that our bright red sun that has dimmed my powers and aged my mind is in danger of consuming us."
희망이 없다. 의미 전달이 전혀 안 된다. 비문인 건 당연하고, 영어 문장 부호 콜론(:)에 대한 고려도 안 되어 있으며, 아예 해석 자체가 틀려 먹었다.
제일 큰 문제는, 번역문의 뒷 문장에 주어가 없다는 거다. 즉 "(말)하다"란 술어와 호응하는 주어가 없다. 주어 없이 완성된 서술문을 만드는 건 초등학생이나 하는 실수다. 대강의 사정은 이해가 간다. 원문에는 콜론이 들어 있으며, 따라서 뒷 문장은 앞 문장의 "그(he)"가 "기이하게 행동하는(be acting stange)" 것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들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독립 문장이 아닌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어 문장으로 옮겼을 때 마침표(.)로 콜론을 대체하고 두 부분을 다른 문장들로 완전히 분리했다면, 당연히 뒷 문장에도 "그"라는 주어가 있어야 한다. 아니면 콜론을 그대로 살리거나.
이런 사정을 고려한다고 해도, 번역자가 원문이나 제대로 이해했는지조차 의문이다. 원문에서 telling 이하만 보면, 이 술어와 호응하는 주어는 물론 "그(he)"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말했는가? 번역문에서 그는, 의미상 다음과 같은 걸 말한다.
- 빛나는 레드 선이 나(슈퍼맨)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나(슈퍼맨)의 이성이 인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Red sun that has dimmed my power. And My mind is in danger of consuming us.)
한국어 문장만 봐도, 책 전체의 이야기 내용만 봐도, 이 문장이 의미상 틀려 먹었다는 건 누구나 알 거다. 가장 큰 문제는 red sun 뒤에 있는 that을 관계 대명사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니면 그걸 못 봤거나. 전자라면 이건 언어적인 감각이나 번역 실력 이전에 영어 문법이 안 된다는 거다. 이런 결과물은, 그러면서도 대강의 의미만 끼워 맞춰서, 마치 인터넷 번역기 돌리듯이 해석한 결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제대로 번역한다면, 뒷 문장에서 그가 말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을 거다.
- 나의 힘을 약화시키고, 나의 마음(이성)을 지치게 한 빛나는 레드 선이 인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의미상으로도 이게 맞다. 한편, 이 실수가 너무 커서 뭐라 할 것도 없어 보이지만, 번역문에서 대체 "세상에"는 뭔가? 이렇게 써 놓으면, 읽는 사람의 대다수는 "세상에 빛나는"으로 붙여 읽을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단어를 목적어 뒤, 즉 동사에 붙여 쓰는 게 한국어에서는 더 읽기 편하다. 그런데 설마 정말로 저런 의미로 옮긴 것은 아니겠지. 그러길 빈다. 돈을 받고 번역 작업을 하는 전문 번역자가, 인쇄된 출판물을 판매하는, 그것도 꽤 이름있는 출판사의 편집자가 그런 실수를 한다는 건 진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전체를 다시 번역해보면,
"하지만 그는 최근 들어 기이한 행동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나치게 연구에 매진하면서, 나의 힘을 약화시키고 나의 마음을 지치게 한 저 빛나는 레드 선이, 인류를 집어삼키려 한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약간의 의역과 모호한 문장 성분이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이정도면 의미 전달에 이상은 없다고 생각된다.
실무 번역자들이 번역 자체에 관한 성찰을 반드시 할 필요는 없다. 번역 작업이 갖는 철학적인 의미들과 무관한 영역에서도, 번역은 극히 어려운 일이고, 언어 능력과 감각이 뛰어난 사람 역시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물론 나는 이 글에서 내가 번역해 놓은 문장들이 완전하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내 영어 실력은 그닥 좋지 않으며, 한국어 실력이나 언어 감각도 높지 않다. 아마 이 글에도 비문이나 문장 오류가 몇몇 있을테다. 따라서 나한테 다른 사람의 번역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건 꽤 올바른 생각일게다. 하지만 그런 내가 보더라도 너무하다고 여길 정도로, 이 책은 편집과 번역이 원서를 처절하게 망쳐놓았다. 이번에 출간되는 "아이언맨"마저 이 모양이라면, 이 번역자의 작품은 불매 운동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 그래픽 노벨에 대한 애정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번역자와 출판사가 더 많은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