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들 - 미국사에 감춰진 저항과 투쟁, 자유와 해방의 언어들
하워드 진.앤서니 아노브 엮음, 황혜성 옮김 / 이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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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도 체념도 없이 말하거니와,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거의 전부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자부도 체념도 없이"라고 담담하게 말하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는 나는 적잖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한다.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상당 부분이다."

2012년이 끝나가는 지금, 지난 1년을 돌아본다. 거기에는 '내 삶의 상당 부분'인 독서를 돌이켜보는 일도 동반된다. 올 한해 만화책 10여 권을 포함해 총 102권의 책을 읽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을 포함하면 103권으로 마무리될 듯하다. 출간 연도에 관계없이 그중 5권을 마음대로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올해의 책 ①] <시민을 고소하는 나라>

<시민을 고소하는 나라>(2012)는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변호사들과 한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MB공화국 5년, 표현의 자유를 말한다'는 주제로 '천안함 허위 문자메시지 사건'이나 'G20 쥐그림 사건' 등 표현의 자유 관련 사건을 맡은 변호사들과 나눈 인터뷰가 실려 있다. 


사실 이 책은 나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책이다. 이 책에 수록된 인터뷰 녹취록을 정리하는 작업을 내가 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책이다(관련기사: 조용해서 좋다? 그러다 망합니다).

개인적 의미를 떠나서 내용도 의미 있다. 이 책은 내가 아는 한 '표현의 자유'라는 주제로 MB정권 5년을 기록하려 한 시도 중 가장 충실한 시도였다. 국가보안법 문제를 다루지 않은 점은 아쉽지만, MB정권 5년의 표현의 자유를 말하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시작점 삼아 지난 5년을 함께 기억하고, 평가했으면 한다.  

[올해의 책 ②] <대한민국은 군대다>

<대한민국은 군대다>(2005)는 여성학적 관점에서 군사주의와 국가주의를 바라본 책이다. 구체적으로는 1980년대의 학생운동과 군대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학생운동을 기록한 부분이 흥미롭다. 1980년대 학생운동은 폭력투쟁을 주요 수단으로 채택함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역할 분담이 확고해졌고, 그에 따른 차별도 심화됐다. 여성들은 남성처럼 돌을 던지는 대신 구호를 외치는 제한된 역할만 수행할 수 있었고, 자연스레 학생운동의 주변부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들은 언더써클의 멤버로 '선발'되는 것도 어려웠다. 

학생운동의 비민주성을 지적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한 여성활동가는 학생운동의 주요 구호였던 "자유와 민주라는 말이 참 낯설었다"고 말한다. 학생운동에 투신한 사람들도 민주주의를 체화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하는 말이다. 저자는 학생운동 내부에는 민족을 위해 개인이 철저히 헌신해야 한다는 집단주의적 정서가 있었고, 그 때문에 운동 내부의 비주류나 소수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학생운동 내부의 여성 차별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 같은 책이 있기는 하지만, 학생운동에 대한 성찰이 담긴 보기 드문 책이다. 여성학에 특별한 관심이나 지식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다.

[올해의 책 ③]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

2012년 한국사회의 가장 큰 화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경제민주화였다. 여야를 불문하고, 모두 경제민주화를 외쳤다. 그러나 경제민주화라는 용어가 재벌 개혁이라는 특정 분야에만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로버트 달이 말하는 경제민주주의는 한국사회에서 통용되는 경제민주화와는 조금 다르다. 그의 경제민주주의는 자치 기업, 즉 "기업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통치하는 기업 체계"를 의미한다. 로버트 달은 노동자 협동조합, 혹은 자주 관리로 불리는 이러한 체제를 통해 기업 내의 경제적 불평등이 줄어들고, 이는 정치적 평등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한국사회에도 유의미한 시사점을 던지는 통찰이다. 

그러나 그보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2011)1장에서 민주주의가 다수의 횡포나 독재 체제로 귀결할 수 있다는 주장에 반박하는 대목이다. 특히 민주주의 체제에서 독재 체제로 전환한 13개국의 사례를 실증적으로 살피는 대목은 압권이다. 로버트 달은 이들 국가에서 민주주의가 붕괴된 것은 민주주의나 평등의 과잉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평이한 문장에 두껍지 않은 분량이지만, 만만치 않은 문제의식과 사유가 담긴 책이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김상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2012)도 추천할 만하다. 

[올해의 책 ④] <전쟁과 사회>

<전쟁과 사회>의 초판이 나온 때가 2000년, 개정판이 나온 때가 2006년이니 참으로 늦은 독서였다. 그러나 뒤늦은 독서에도 이 책의 의미는 퇴색하지 않았다. <전쟁과 사회>는 "과도하게 정치화되고 도그마화된 우리 사회의 한국전쟁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다. 

북한의 침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의 참상은 곧 북한과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해석이 대단히 이데올로기적임을 보여준다. 당대의 민중들은 반공주의 같은 이념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국군에 입대한 동기도 대부분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거나 이전에 좌익에 연루된 적이 있었던 청년들이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한 생존전략인 경우가 많았다. 결국 당시 민중들이 국군에 입대하는 것이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의 표시는 아니었으며, 이후 인민군 징집을 기피하는 행위도 반공과는 거리가 멀었다."(<전쟁과 사회> 142~143쪽) 

지면관계상 여기에는 옮길 수 없지만, 실제로 일반인들은 북한의 인민군, 특히 간부들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북한과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지금처럼 팽배해진 것은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의 담론만이 확대 재생산된 결과라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뒤에 실린 꽤 많은 주석도 유용하다.

[올해의 책 ⑤] <미국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역사학자이자 탁월한 활동가였던 하워드 진. 그의 팬을 자처하는 내게도 <미국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들>(2011)은 상당한 강적이었다. '참고문헌'과 '찾아보기'를 빼고도 1093쪽에 달하는, 좀 너무하다 싶은 두께. 정가 5만5000원이라는 비인간적 가격. 과연 이 책을 사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미국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들>은 하워드 진이 대표작 <미국민중사>를 쓰기 위해 참고했던 사료 중 중요한 사료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에는 마틴 루서 킹·말콤 X 등 저명한 활동가들은 물론이고 무명의 흑인 노예·인디언 등 다양한 민중들의 목소리가 시대 설명과 함께 담겨 있다. 

미국사의 주류를 차지하는 백인·남성·부자의 목소리 대신 그들에게 가려져 있던 민중(흑인·여성·인디언·빈자)들의 목소리를 생생히 들을 수 있는 역작이다. 체로키 인디언들의 '눈물의 행렬'을 묘사한 기록을 읽을 때는 울컥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읽고 나면 미국사는 이제 웬만큼 안다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긴다. 하워드 진의 역사관을 잘 보여주는 구절을 하나 옮긴다.

"표면 아래를 들여다보면, 거리와 공장에서, 미국 막사와 트레일러 캠프에서, 공장과 사무실에서 역사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불의에 맞서고, 전쟁을 끝내고, 여성과 흑인과 토착 미국인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는 곳이라면 어디든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소리를 높이고, 조직하고,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되살려 낸 역사가 있다."(<미국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들>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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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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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술 엄청 마셨다."

얼마 전 중등임용1차 시험을 본 친구에게 시험을 잘 봤는지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예전부터 "임용고시는 길이 아니다, 플랜B를 생각 중이다"라고 말하던 친구였지만, 막상 "망했다"는 말을 들으니 안타까웠다. 친구는 그 후로도 한참 '플랜B'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의 목록을 읊었고,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함께 한숨을 쉬었다. 

취업준비생이라는 이름의 백수들이라면 누구나 불안과 초조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터. 당장 나 자신도 언론고시를 준비하고 있지만, 준비할 건 너무 많고 능력은 부족하다. '걱정할 시간에 집중해서 공부하자'고 생각하지만 그런 다짐도 잠시, 금세 불안이 엄습한다.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이런 식으로 하는 게 맞나?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 

오랜만에 소설가 박민규의 첫 작품,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다시 집어든 것도 그 때문이다. '낙오자들에게 띄우는 연가'를 자처하는 책을 읽으며 지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싶었다. 기대했던 만큼 난 위로받았다.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평범한 야구 팀

야구를 좋아하는 이라면 1982년을 프로야구 원년으로 기억할 것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를 비롯한 6개의 구단이 창단되며 프로야구가 출범한 그 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그 무렵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이기만 하면 야구 이야기를 하던 시절.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한 주인공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조성훈을 비롯한 몇몇 친구들과 함께 고향 인천을 연고지로 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어린이 팬클럽에 가입한다. 그러나 그들의 열렬한 응원에도 삼미 슈퍼스타즈는 만년 꼴찌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기별 최저 승률(0.125), 한 시즌 특정 팀 상대 전패, 시즌 팀 최다 연패(18연패) 등의 대기록을 남기고, 치지 않고 달리지 않는 '노히트 노런'으로 정점을 찍는다. 친구들은 하나둘씩 팬클럽을 떠나고, 삼미 슈퍼스타즈는 해설자들에게까지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이런 팀이 냉혹한 프로 야구의 세계에서 오래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조롱과 멸시만 받다 1985년 6월 21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사라진다. 삼미의 팬이었던 주인공은 이 과정을 보면서 '프로의 세계'가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이 프로야구라는-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126p

삼미의 몰락을 지켜본 주인공은 삼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프로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한다. 가끔 힘들 때는 삼미 슈퍼스타즈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해의 여름을 기억하는 일은 체스판의 흑과 백을 구분하는 일만큼이나 선명하고 간편하다. 실제로 나는 공부를 하거나 쉬거나 둘 중의 한 가지만 했으니까. 가끔 힘이 들 때면, 수돗가의 미지근한 물에 얼굴을 적시며 삼미 슈퍼스타즈를 생각하고는 했다. 그게 다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133p 

노력이 헛되지 않아 그는 일류대에 입학하고, 어려움 없이 국내 최대의 대기업에 입사한다. 삼미와는 달리 프로의 세계에 무사히 안착한 것이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5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1998년 한국. 대기업에 들어간 주인공은 이혼까지 당하며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대규모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 그는 냉혹한 프로의 세계에서 탈락한다. 마치 삼미처럼···.

야구로 치자면, 1998년은 데드볼의 시기였다. 세상의 곳곳에서 데드볼을 맞는 사람들이 즐비했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바로 그 무렵-나는 이혼을 했고, 얼마 후 실직을 했다. 죽어도, 좋았고, 죽는 줄, 알았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215p

실의에 빠진 주인공 앞에 어린 시절 함께 삼미의 어린이 팬클럽이었던 친구 조성훈이 나타난다. 조성훈은 프로야구가 사람들을 냉정한 프로의 세계로 끌어들였으며, 삼미 슈퍼스타즈는 그런 흐름에 거역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라고 웅변한다.

요는 말이지. 어쩌다 프로가 되었나, 라는 것이야. 생각해봐, 우리는 원래 프로가 아니었어. 그런데 갑자기 모두 프로가 된 거야. 그 과정을 생각해보란 말이야. 물론 프로야구가 세상을 바꾸었단 얘기가 아냐. 요는, 프로야구를 통해 우리가 분명 속았다는 것이지.(중략)삼미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도 같은 존재지. 그리고 그 프로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모든 아마추어들을 대표해 그 모진 핍박과 박해를 받았던 거야. 이제 세상을 박해하는 것은 총과 칼이 아니야. 바로 프로지!-<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242-243p

마침내 의기투합한 둘은 삼미의 야구를 재현하기 위해 팬클럽을 만든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 삼미의 야구를 추구하면서 주인공은 점차 낙천적으로 변한다. "이곳으로 빠지는 것이 삼미의 철학에 절대 부합하는 일"이라며 삼천포로 떠난 일주일의 전지훈련 이야기에서 그는 생각한다.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라고.

삼천포에서의 일주일은 언제나 생생하다. 남일대 해수욕장(국내 최소 규모)에서 우리는 캐치볼과 러닝을 하고, 밤이면 맥주를 마시며 삼미 슈퍼스타즈의 시합 비디오를 보거나, 웃고 떠들거나, 자거나 했다. 언제나 새 치약을 꾹 눌렀을 때와 같은 기분의 시간이 우리의 주변에 흘러넘쳤으므로, 우리의 시간은 그런 민트향이라든지, 박하향이라든지, 죽염 성분이 가미된 솔잎향으로 가득했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277p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삶이 너무나 아름답다"

안타깝게도 이 서평에 삼미의 야구가 얼마나 아름답고도 유쾌한 것인지를 담아낼 재간은 없다. 직접 읽지 않으면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오랜만에 이 책을 읽으며 삼미의 야구에 비추어 내 인생을 돌아봤다.

돌이켜 보면 '새 치약을 꾹 눌렀을 때와 같은 기분의 시간'을 느꼈던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 그리고 우리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들어 필요 이상으로 빠른 공을 던지고, 필요 이상으로 무리하기를 요구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빨리 취업해야 한다는, 남에게 무시당하기 싫으면 좋은 직장 얻으라는 주변의 말들에 떠밀려 억지로 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달리는 세계에 과연 인생이 존재할까. 책을 읽는 동안 그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직 어떤 야구를 하고 싶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 야구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필요 이상으로 빠른 공을 던지거나 무리하고 싶지는 않다. 그게 가장 어려운 야구일지라도 나만의 야구를 하고 싶다. 가급적 즐겁게 살고 싶다.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니까.   

따라 뛰지 않는 것. 속지 않는 것. 찬찬히 들여다보고, 행동하는 것. 피곤하게 살기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속지 않고 즐겁게 사는 일만이, 우리의 관건이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302p~3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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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콘서트 무죄 - 이정희와 이시우의 국가보안법 대담
최진섭 지음, 이정희.이시우 대담 / 창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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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법원은 끝내 박정근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북한의 대남기구가 작성한 인터넷 게시물을 리트윗하고, 이적표현물을 작성한 혐의였다. 북한을 조롱하고 비판하기 위한 의도였다는 박정근의 항변은 묵살됐다. 

11월 21일, 재판부는 "북한 체제를 상징하는 대상물을 소재로 욕설하거나 북한의 혁명가 가사를 바꾸어 표현하는 등의 방법으로 장난을 치는 듯한 내용의 게시글을 게재한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반국가단체 활동에 호응하고 가세한 점이 인정된다"며 유죄 판결을 내렸다. 북한은 농담의 소재조차 될 수 없는 철저한 금기이며,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의 망령이 살아있음을 일깨우는 상징적 판결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보안법은 비판자들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데 있어 '전가의 보도'였다. 박정근이 그랬듯 사소한 농담이나 실수도 국가보안법 앞에서는 어김없이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역사상 거의 최초로 완전 무죄판결을 받은 사건이 있다. 무려 20개가 넘는 죄목으로 기소됐으나 "기념비적인 무죄판결"을 받은 사진작가 이시우 사건이 그것이다.

<법정 콘서트 무죄>는 저자인 최진섭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이시우 작가와 당시 그를 변호한 이정희 변호사(현 통합진보당 대선후보)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이정희와 이시우의 국가보안법 대담'이라는 부제처럼 두 사람은 '이시우 사건'을 통해 국가보안법의 현재와 미래를 논하고, 나아가 국가보안법이 낳은 분단 체제를 논한다. 

"서구식 '표현의 자유'로는 국가보안법 극복 못해"

2007년 4월 19일, 이시우 작가는 체포된다. 검찰은 이시우 작가가 미군기지를 촬영하고, 주한미군의 핵무기, 화학무기 등의 주제로 글을 써서 <통일뉴스>에 기고한 것 등이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그를 기소했다. 그러나 이시우 작가와 이정희 변호사는 효과적인 변론으로 마침내 2011년 10월 13일 대법원에서 공소사항 전부에 대해 완전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다.

이 서평에서 사건의 구체적 내용과 법 적용의 문제 등을 따질 생각은 없다. 검찰이 얼마나 무리한 기소를 했고, 그 과정에서 이시우 작가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국가보안법이 왜 문제이고 이시우 작가가 왜 국가보안법에 천착하는지 등은 독자들이 직접 이 책을 읽고 확인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법정 콘서트 무죄>가 던지는 중요한 두 가지 통찰을 이야기하려 한다.

사실 국가보안법 철폐는 진보진영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조금은 식상한 주제다. 그러나 이 책은 자칫 진부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 문제를 놓고 주목할 만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 첫째가 서구적 사상의 자유 이론만으로는 국가보안법을 극복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서구적 사상의 자유 이론을 차용한다. 이를테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빌려 '국가안보에 명백한 위험을 끼치지 않는 한 북한체제 찬양을 법적으로 처벌할 필요는 없다'면서 국가보안법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식이다. '북한체제를 찬양하는 사상마저도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허용되어야 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그러나 이정희 변호사는 "국가보안법은 서구적 사상의 자유 이론만 갖고 극복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변호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추진했다가 실패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싸움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보안법은 서구적 사상의 자유 이론만 갖고 극복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저는 한반도 상황에서 적이 눈앞에 있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로 존재하는 한, 또는 절반가량이 존재하는 한, 이 국가보안법 체제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요. (줄임) 노 전 대통령은 현실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법을 바꾸려고 했다고 봐요. 그런데 그건 불가능한 거죠.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고,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법이 바뀌지 않습니다. - <법정 콘서트 무죄> 226p~228p 

이시우 작가도 이 변호사와는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서구적 사상의 자유 이론만으로 국가보안법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국가보안법을 미국의 지배전략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빨갱이사냥은 매카시 이론이 있기 훨씬 전부터 1920년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어요. 사실은 매카시즘 자체도 중간에 일어난 작은 파도에 불과했죠. 2차 대전 이전에 벌써 독일로 이탈리아로 일본으로 수입되어 일본의 치안유지법이 만들어지게 되고, 그걸 거의 그대로 따다 쓴 게 한국의 국가보안법이었거든요. 국가보안법은 이승만을 비롯한 뛰어난 반공 전사들이 만든 게 아니고, 전 세계적인 기획이었던 거죠. - <법정 콘서트 무죄> 230p 

요컨대 사상의 자유 이론이 크게 발달한 미국이 사실은 '빨갱이' 사냥에 가장 앞장섰으며, 국가보안법 역시 미국이 주도한 반공주의 열풍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공산 진영에 맞선 자유 진영의 리더였음을 떠올리면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그래서 서구, 특히 미국식 사상의 자유 이론만으로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할 수 없으며, 남북관계를 튼튼한 평화 체제로 바꿔나가는 현실의 변화 위에서만 국가보안법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 책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남북관계는 주변 상황에 관계없이 6·15선언의 기초 위에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고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확실하게 각인되었어야 해요. 그래야만 미국의 정책방향에 따라 우리 민족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지 않도록 가닥 잡는 게 가능할 테니까요. 그렇게 해서 남북 사이의 평화정착 기조가 대결 상태에서 화해 단계로 들어섰다고 보여줘야,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만들어지는 거죠. - <법정 콘서트 무죄> 227p

"'빨갱이', 국가폭력을 합리화하는 백지수표"

이 책이 보여주는 두 번째 통찰은 국가보안법 문제를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시작된 국가폭력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시우 작가는 국가보안법의 탄생이 1948년 제주 4·3항쟁과 맞물려 있다고 말한다. 흔히 국가보안법의 탄생을 그해 10월의 여수·순천사건과 연결 짓지만 국가보안법의 모체인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은 그 전에 발의됐고, 그 배경에는 제주 4·3항쟁이 있다는 것이다. 

4·3항쟁 당시 군경과 극우단체 서북청년단(서청)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제주도민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그 과정에서 '빨갱이'와 거리가 먼 사람들도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서청의 위세가 드세어지고 법에도 없는 경찰보조 기능이 부여되던 1947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는 명분 아래 그들의 백색테러가 제주에서 노골화되었습니다. 그들은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 아래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공공연히 자행했고 설사 죽더라도 빨갱이로 몰면 그만이었습니다. 이러다 보면 잡혀간 이들을 구명하기 위해 가족들이 금품을 싸들고 오기 때문에 나중에는 금품을 노리고 억지로 빨갱이로 몰아 잡아가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빨갱이'는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불법적인 폭력을 합리화하는 백지수표에 다름 아니었던 것입니다. - <법정 콘서트 무죄> 315p 

4·3항쟁에서 발생한 국가폭력의 문제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도 직결된다. '거리의 철학자' 김상봉은 함석헌의 철학을 빌어 국가를 뜻의 공동체로 정의한다. 프랑스 공화국이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 아래 건국됐고, 독일 연방 공화국이 통일, 정의, 자유로 묶인 공동체이듯 국가는 어떤 이념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그런 이념을 제시하지 못했다. 자유민주주의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그 속에서는 자유도, 민주주의도 없었다. 이념이라 하기에는 부끄러운, 앙상한 반공주의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폭력이었다. 

다시 말해 무엇이 국가의 정당한 기초입니까? 오직 민중의 공유된 뜻이고 이상입니다. 그 때만 자발적인 만남에 기초한 국가공동체가 가능한 거지요. 그런데 그런 뜻과 이상이 없이 국가를 세우려한다면 가능한 방법은 폭력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4·3사건입니다. - <당신들의 대통령> 50p

즉, 대한민국은 폭력을 통해 건설됐고, 폭력의 근거를 제공한 중요한 기제가 바로 국가보안법이었다. 국가보안법이 누군가를 '빨갱이'로 규정하면 국가는 그를 향해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폭력으로 건설된 국가는 이후에도 폭력을 체제유지의 주요수단으로 삼았다. 때로는 어두운 남영동 대공분실 지하에서, 때로는 햇빛 쏟아지는 1980년 5월의 광주 금남로에서, 국가폭력은 다양한 층위로 수없이 되풀이됐다. 폭력이 자체 논리에 따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이시우 작가의 통렬한 지적은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그늘, 국가폭력의 문제를 성찰하게 한다.

제주에서 학살자가 급증한 시점이 유격대의 저항이 증가한 때가 아니라 오히려 양측 간의 교전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기 이후였고, 미군에 의한 지원으로 '서북청년단'과 경찰 등의 물리력이 증강된 시점이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희생은 저항의 강도가 아니라 국가폭력의 강도와 비례했던 것입니다. 베버의 표현대로 국가폭력이 합법적 폭력이라면 왜 우리에게 있어서 국가의 폭력은 합리적이고 합법적이지 않고 그와 정반대였을까요? 이 같은 현실이 반성되지 않을 때 그것은 극복할 수 없습니다. - <법정 콘서트 무죄> 329p

이명박 정권 5년, 국가보안법 위반 검거자 '482명'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불편했다. 소위 종북주의 논란에 대한 이 책의 관점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최진섭은 <진보의 블랙박스를 열다>라는 책에서 통합진보당 사태를 둘러싼 언론보도를 비판한 바 있다. <법정 콘서트 무죄> 역시 통합진보당 구 당권파를 종북세력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에게 '마녀사냥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대단히 논쟁적인 주장이고, 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다소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책을 읽지 않을 알리바이로 작용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종북주의를 다룬 대목이 책의 본질은 아니거니와 오늘날에도 국가보안법을 사유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국가보안법 자체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은 결코 박정근이나 이시우 작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에 따르면 이명박 정권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된 사람이 482명에 달한다. 이는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에서도 국가보안법의 위협이 수그러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둘째, 국가보안법과 연결된 국가폭력의 문제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쌍용에서, 강정에서, 용산에서, 그밖의 수많은 현장에서 국가의 이름으로 벌어진 폭력은 국가보안법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안보를 위해 정부에 반대하는 '빨갱이'들을 응징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된 국가폭력의 논리는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통해 유지·강화된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은 이중의 의미에서 현재진행형이다. 국가보안법을 사유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에 엄존하는 국가폭력의 문제를 성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야기했지만 아직도 달성하지 못한 과제, 국가보안법 철폐를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이야기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끈질기고 집요하게. 여전히 문제는 국가보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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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을 고소하는 나라 - MB공화국 5년, 표현의 자유를 말한다
구영식 외 지음 / 스토리플래너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경훈아, 이번에 내가 책 쓰는데 좀 도와줄 수 있겠나?"

2월 말이었다. <오마이뉴스> 15기 대학생 인턴기자 활동을 막 끝내고 쉬고 있던 기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인은 15기 인턴들에게는 '구 팀장님'이라는 명칭으로 더 익숙한 구영식 기자였다.  

구영식 기자는 'MB공화국 5년, 표현의 자유를 말한다'는 주제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변호사들과 인터뷰집을 내기로 했는데, 인터뷰 정리 작업을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의미 있는 작업이기도 하고,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흔쾌히 응했다. 

3월 2일, 류제성 변호사와 한 인터뷰를 시작으로 다섯 번의 인터뷰에 동석했다. 인터뷰이는 '천안함 허위 문자메시지 사건'이나 'G20 쥐그림 사건' 등 표현의 자유 관련 사건을 맡은 변호사들이었다. 그들은 판결과 법 조항의 법리적 문제를 따지기도 하고,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지를 두고 자신의 신념을 말하기도 했다. 

기자는 구영식 기자와 변호사들의 인터뷰를 들으며 타이핑하고, 다시 집에 와서 빠진 내용을 정리했다. 인터뷰를 보통 2시간 정도 했고, 그 내용을 완전히 정리하는 데 평균 8시간이 걸렸다. 5번의 인터뷰를 정리하는 데 총 40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인터뷰는 일주일에 한 번을 목표로 진행했지만,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아 연기될 때도 있었다. 작은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마침내 5월 6일 마지막 녹취록을 정리했다. 기자의 작업은 그것으로 끝났다. 녹취록을 바탕으로 보충 인터뷰를 하고 내용을 다시 정리하는 일은 구영식 기자의 몫이었고, 그것을 책으로 만드는 것은 출판사의 일이었다.  

10월 20일, 드디어 책이 출간됐다. 기자가 한 작업의 결과물이 <시민을 고소하는 나라>라는 한 권의 책으로 나온 걸 보니 뿌듯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구영식 기자에게 받은 책을 조심스레 넘겼다. 그와 함께 한 지난 인터뷰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골목길에서 눈 치우자고 플래카드 걸면 집회냐?"

인터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변호사들에게 현행 법 조항 및 판결의 문제점을 듣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부였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법 조항이 대단히 애매하고도 포괄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도 어떤 판결이 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작지 않은 만큼 자의적 해석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법 조항은 엄격해야 한다. 누구든지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애매한 조항 때문에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면 억울할 테니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용산참사 대책위 기자회견 사건'을 변론한 류제성 변호사는 "집회의 정의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집시법에는 집회의 정의 규정이 없다. 그냥 판례상 2인 이상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모이면 집회라고 해석한다. 딱 그 기준만 놓고 보면 기자회견은 2인 이상이 공동의 목적으로 모인 것이어서 집회 신고를 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신고를 안 했으니 해산명령의 대상이고, 해산명령에 불응하면 해산명령불응죄가 된다. 우리는 두 사람 이상이 골목길에서 눈 치우자고 플래카드를 걸면 그것도 집회냐, 그거 신고 안 했다고 해산시키고, 처벌할 거냐고 반문했다.(107~108p)

이처럼 애매하고도 포괄적인 규정은 필연적으로 표현의 자유 침해로 이어진다. 어떠한 성격의 행사든 2인 이상이 공동의 목적으로 모이면 집회가 될 수 있고, 집회인데 신고를 안 했으니 불법집회라는 논리로 처벌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규정은 특히 정부에 비판적인 집회에 주로 적용된다. 용산참사 이후 용산참사범대위가 주최하거나 참여하는 집회, 시위는 거의 다 금지됐다. 류제성 변호사는 MB정부의 이러한 행태를 소리 높여 비판한다.

집시법이 기계적으로 다 적용된다면 모든 기자회견은 처벌돼야 하고, 웬만한 집회는 다 처벌되어야 하는데, 왜 유독 용산참사만 그러냐? 이것이 경찰의 독자적 판단이겠냐? 용산참사와 관련한 정부의 인식과 대응이다. 그 정부의 인식과 대응이란 게 망루에 올라간 사람을 중벌에 처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피고인 방어권 등을 무시하고, 수사기록열람 등사조차도 금지하는 상태에서 중형에 처했다.(122~123p)

"<조선일보>를 <조선일보>라 하지 못하고…"

물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들이 MB정부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MB정부의 공안적 성격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결과를 심화시켰음은 분명하다. 김준현 변호사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법이 악화된 것은 아니지만, 법 적용이 확대됐다"고 말한다. 

사실상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률이 현 정부에서 더 악화된 것은 아니다. (중략)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에서 명예훼손죄 형량을 더 높이지도 않았다. 전기통신기본법도 이전부터 있던 법이고, 새롭게 법을 만들어 탄압하거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는 않았지만, 기존에 있는 법률의 적용폭을 확대했다. 공안적 통치라고도 볼 수 있겠다.(36p)

MB정부 아래서 심화된 공안적 통치, 표현의 자유 억압은 자기검열의 강화를 가져왔다. 한명옥 변호사가 맡은 '인터넷 대통령후보 비방글 사건'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어느 상류층 아주머니도 마찬가지다. '나는 진짜 평범한 아줌마다. 그런데 내가 뉴스를 보니까 시민으로서 답답해서 내 의견을 표현했는데 이게 죄가 되고 내가 재판까지 받고 있다. 민주사회에서 내가 후보자 비판도 못하느냐. 앞으로는 절대 뉴스도 안 볼 것이고 글도 안 쓸 것이다.'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해서 처음으로 사회정치적 의사를 표현했는데 이렇게 잡아들이니까 이들이 정치에 다시 무관심해지고 아예 정치혐오증을 갖는다. 정치에서 점점 멀어지는 거다.(292p)

어느 아주머니가 사회적 현안에 정치적 의견을 내놓은 순간, 즉 '시민'이 된 순간 각종 법적 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책 제목이 <시민을 고소하는 나라>인 이유도 여기 있다. 이 사례가 보여주듯 '시민을 고소하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검열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음은 너무나 명백하다.

심지어 법정에서 표현의 자유를 소리 높여 옹호한 담당 변호사조차 자기 검열에 빠져들었다. '장자연 리스트' 사건을 맡은 이재정 변호사는 어느 토론회에서 자신이 어느새 자기검열을 하고 있음을 느낀다. '장자연 리스트'에 거론된 <조선일보>를 직접 호명하지 못하고, '유력 일간지'라 돌려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몰랐다가 토론회 도중에 그걸 느꼈다. 무의식 중에 자기검열을 하면서 발언하고 있었던 거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조선일보>를 <조선일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웃음).(212p)

방금 전까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이야기하던 이재정 변호사가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털어놓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했다. 그 말을 한 후에도 또 <조선일보>를 '유력 일간지'라고 말하는 이재정 변호사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검열이 정말 무섭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조용한 것은 권력자들에게만 좋은 것"

한 가지 분명히 짚어둘 사실이 있다. 모두가 평등하게 표현의 자유를 누리거나 혹은 표현의 자유를 제약받는 일은 없다.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유린될 때조차 권력자의 목소리, 주류의 목소리는 결코 억압받지 않는다. 

그 이유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주체가 바로 권력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짓밟음으로써 '침묵의 질서'를 유지하려 든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가 억압됨으로써 피해를 받는 사람들은 언제나 비주류, 사회적 약자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나아가 사회 전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박주민 변호사는 인터뷰 전반에 걸쳐 이 점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이제 사회가 점점 양극화된다고 하고, 못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못사는 사람들은 더 어려워진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사실 발언해야 할 필요성과 발언해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 그래야 사회가 바뀔 수 있고 못 사는 사람들이 살 수 있다. (중략) 아무도 문제제기를 안 하면 가진 사람들과 힘 있는 사람들은 편안하고 조용하고 좋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이 사회에서는 점점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야 한다.(179p~180p) 

특히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을 예로 들어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대목은 집중해서 읽기를 권한다. 다섯 번의 인터뷰 중 기자가 가장 인상 깊게 들은 대목이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SF소설 <파운데이션>이 있다. SF소설 분야의 명작이다. 거기에 은하대제국이 나온다. 그 제국이 망해가는 단초를 주인공이 어떻게 파악하냐 하면 조용하다는 거였다. 이 조용하다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어도 조용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아, 이 제국이 무너지겠구나'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니까 조용하다는 것은 권력자들한테만 좋은 거지, 전체 사회와 국민들, 그리고 미래를 봤을 때 좋은 게 아니다. 오히려 많은 얘기들을 활발하게 하고, 활발하게 아이디어를 내고, 토론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것이다.(183p~184p)

조금이나마 세상을 바꾸는 '공적 기억'이 되기를

이 책을 읽으면서 신기한 경험을 했다. 책장을 넘기면 자연스럽게 책 작업을 했던 지난 시간들이 떠오른 것이다. 

인터뷰를 들으며 때로는 암담한 현실에 한숨 짓고, 때로는 변호사들이 보여준 표현의 자유를 향한 신념에 감동받은 기억들, 카페에서 혼자 녹음파일을 들으며 인터뷰 내용을 정리했던 시간, 카페 창문으로 쏟아지던 봄날의 햇살, 가끔 인터뷰가 끝나고 구영식 기자와 변호사들과 함께 한 술자리…. 책장을 넘기는 동안 그런 기억들이 자꾸만 되살아났다. 

공교롭게도 구영식 기자에게 받은 책에는 'Remember 2012'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아마 2012년을 기억하고 싶을 때면 가끔 이 책을 들여다보며 책장을 넘길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기자에게 2012년의 '기억'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자의 '사적 기억'일 뿐이다.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당초 기획대로 MB정부 5년의 '공적 기억'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잠시만이라도 MB 정부에서 벌어진 사건들과 그에 얽힌 사람들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정부의 잘못된 재개발 정책과 무자비한 경찰 진압 때문에 빚어진 용산참사, '명박산성' 이후 시민들을 둘러싼 차벽, 국가기관의 대대적 공세에 떠밀려 공영방송 사장에서 해임된 정연주, G20 포스터에 쥐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구속될 뻔한 박정수, 성상납을 강요받다 자살한 장자연과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무엇 하나 개선되지 않은 현실, 마지막으로 자유롭게 정치적 의사표현을 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우리 주변의 시민….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이들을 기억한다면, 나아가 독자들의 '공적 기억'이 18대 대선에서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작으나마 이 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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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가능하다 - 베네수엘라 현장 활동가들의 목소리
카를로스 마르티네스 외 지음, 임승수 외 옮김 / 시대의창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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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끝났다. 13년간 국가를 이끌어온 현직 대통령이 다시 연임에 성공했다. 남미의 베네수엘라 이야기다.

7일(현지시각) 치러진 베네수엘라 대선에 세계가 주목했던 이유는 단 하나, 우고 차베스 현 대통령 때문이었다. 그는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고 있다는 칭송과 독재자, 포퓰리스트라는 비난을 한 몸에 받는 논쟁적 인물이다. 

이번 대선 역시 차베스를 둘러싼 기존 논란의 연장선상에서 그의 재선 여부에만 관심이 쏠렸다. 그의 재선으로 베네수엘라식 사회주의 혁명이 차질 없이 추진될 것이라는 관측도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가능하다>의 저자들은 차베스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이러한 시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들은 "차베스와 정부 너머의 것을 보지 못한다면 베네수엘라의 핵심적인 정치 동력 하나를 놓치게 된다"며 볼리바리안 혁명(차베스 집권 이후의 혁명 과정을 일컫는 말)의 주체인 민중들에게 주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변화를 이끌어내는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이 혁명의 역동적 근원을 밝힐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 각 분야 운동가 30여 명을 만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변화를 이끌어내는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대도시 빈민가 주민들의 주거권 쟁취 투쟁을 비롯해 노동운동, 농민운동, 협동조합운동, 성소수자운동, 학생운동 등 다양한 부문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담아낸 이 책은 그대로 '베네수엘라 사회주의 혁명의 기록'이다.

"뭐가 어떻게 좋아졌냐고요? 모든 게 '엄청나게' 좋아졌죠"

이 책의 저자들은 분명하게 차베스와 볼리바리안 혁명을 옹호한다. 차베스 집권 후 빈곤은 줄어들었고, 민중의 삶은 개선됐다. 150만이 넘는 성인이 문자를 배웠고, 누구나 무상으로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은 무상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지역공동체 운동가인 히딜프레도 솔사노는 "모든 것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개선되었냐고요? 모든 것이 좋아졌죠. 보세요. 공공서비스, 교통, 도로, 전기, 급수 사업이나 수돗물 등 모든 부분이 나아졌어요. 단순히 나아졌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엄청나게' 나아졌어요. 완전 달라졌죠. 

이전엔, 우리는 어느 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응급 진료소와 문화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를 비롯한 꽤 많은 수의 미션이 실행되고, 각 활동은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있어요. 이를테면 건강, 스포츠, 문화 같은 식으로 말이죠. (중략) 이런 게 믿겨지세요? 이제, 당신도 여기 상황이 개선되었다는 생각이 들죠?"
- <사회주의는 가능하다> 427~428p

베네수엘라의 변화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생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보다 폭넓고 다양한 권리들이 신장되고 있다.

게이인권운동가인 마리아넬라 토바르 역시 차베스 집권 후에 생긴 변화를 강조한다. 차베스가 집권하고 베네수엘라에서 게이 행진이 시작됐고, 카라카스 시에서 게이 행진을 지원하기도 했다.

"차베스 집권 이전에는 게이 행진이 없었어요. 게이 행진은 차베스 집권 후에 생긴 새로운 분위기 중 하나예요. 첫 행진 때는 그다지 많은 사람이 참여하지 않았지만, 점점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많이들 참여해요. 저는 이번 행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카라카스에서 약 4만 명이 모였다고 들었어요. (중략) 예전에 열린 행진 때는 두 번 모두 무대를 비롯한 모든 것을 카라카스 시에서 지원했습니다. 시에서는 열린 마음으로 행진을 준비하는 조직들과 함께 참여했어요."- <사회주의는 가능하다> 150p

"이제는 민중이 통치방식을 바꿔야 할 때"

거대한 사회 변화는 반발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이 책은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변화를 옹호하면서도 볼리바리안 혁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어려움, '혁명의 그림자' 또한 비껴가지 않는다. 

이 책이 지목하는 '혁명의 그림자'는 차베스를 둘러싼 보수적 관료와 관료제다. 협동조합 운동가인 알폰소 올리보는 운동의 전진을 방해하는 관료와 관료제를 소리 높여 질타한다.

"차베스와 함께하는 집단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방식의 경제활동을 발전시키려 할 때 이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정부 내부에 분명히 있습니다."
- <사회주의는 가능하다> 221p

"이행인증서라는 서류 발급 때문에 협동조합이 깨지고 있습니다. 그 서류를 받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협동조합 대부분이 그 서류가 없어요. (중략) 20년 전에는 협동조합이 정부와 약정을 맺는 데 5단계가 필요했는데 지금은 20단계가 필요해요. 하지 말라는 것과 다를 바 없죠. 겉으로는 협동조합 운동을 지원한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관료제로 협동조합 운동을 방해하는 거예요!"- <사회주의는 가능하다> 216~217p 

그러나 볼리바리안 혁명을 이끄는 수많은 활동가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결코 낙담하지 않는다. 그들은 민중의 힘으로 보수적 관료들을 넘어서 볼리바리안 혁명을 전진시킬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며 믿는다. 학생운동가 세사르 카레로의 말처럼 "혁명 과정은 이미 차베스 대통령보다 더 커져 버렸다." 그래서 알폰소 올리보는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인다. 

"누군가 거리에서 '이것은 혁명이다. 나는 차비스타(차베스 지지자)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가 국가를 바꾸기 위해서 뭘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이전에는 권력자들이 착취와 도둑질로 통치를 했지만, 이제 우리 민중이 통치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 <사회주의는 가능하다> 219p

2012년 12월... 대선 후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책이 차베스와 볼리바리안 혁명을 미화한다는 '혐의'가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저자들이 제기하는 문제, 즉 보수적 관료들이 혁명을 후퇴시킬 가능성과 그것을 막기 위해 강력한 민중운동이 필요하다는 제언은 대선을 앞둔 우리에게도 가볍지 않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대선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모두가 대통령만 바뀌면 세상이 바뀔 것처럼 야단이다. 대선 후보들은 자신이 집권하면 한국사회가 유토피아가 되기라도 할 것처럼 선전한다.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남북평화… 어느 것 하나 5년이란 짧은 시간 안에 완수하기 어려운 목표건만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특히 야권 지지자들은 야권이 정권을 잡으면 이명박 정부에서 크게 후퇴한 민주주의와 민생경제, 남북평화 이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복원시킬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야권 지지자들의 바람대로 야권단일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세상은 별로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정부 내의 보수적 관료들에 포획되어 그나마 갖고 있던 한 줌의 진보성, 혹은 개혁성마저 탕진해 버릴 공산이 크다. 10년의 민주정부가 사람들에게 적잖은 실망을 안긴 이유의 상당 부분이 바로 거기 있다. 

그래서 김대중정권에서도 노무현정권에서도 진보개혁인사들의 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약화되어버린 반면에 관료들은 갈수록 힘을 얻게 되었다. 단적으로 노정권 출범 당시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 참모와 내각 중 32퍼센트였던 관료출신이 3년 뒤엔 40퍼센트로 늘어났고, 특히 경제라인의 경우 이정우 정책실장이 물러나면서 100퍼센트 관료로 채워졌다.
-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 68p

문재인 정권, 혹은 안철수 정권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되풀이될 수 있다. 최근 안철수 캠프에 '모피아의 대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영입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진보개혁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풍부한 실무경험을 갖춘 보수적 관료를 완전히 배척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보수적 관료들은 끊임없이 정부가 진보적, 혹은 개혁적 정책을 펴는 것을 막을 것이다. 

여기서 '대선 이후'를 사유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대선 후에 등장한 정부가 시민들의 열망과는 달리 진보적, 혹은 개혁적 노선에서 후퇴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저자들의 주장처럼 강력한 운동이 필요하다면, 어떤 운동을 어떻게 조직하여 정부를 진보적 방향으로 견인할 것인가. 간단치 않은 질문이다.

그래서 책장을 덮으며 "우리가 국가를 바꾸기 위해서 뭘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알폰소 올리보의 말을 자꾸 되뇌게 된다. 2012년 12월, 대선이 끝난 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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