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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었다.
성대가 발달하지 않았거나 폐활량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싫어했다. 누구나 꼭 자신의 몸의 부피만큼 물리적인 공간을 점유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훨씬 넓게 퍼진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뜨리고 싶지 않았다. (p.51)

오랜만에 한가했던 일요일 오전,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녀는 아이에게 제안했다. 오늘은 인디언 식으로 그들의 이름을 지어보자고. 아이는 재미있어하며 자신의 이름을 ‘반짝이는 숲‘이라고 지은 뒤, 여자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었다. 마치 가장 정확한 작명이라는 듯 단호하게.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
응?
그게 엄마 이름이야.
그녀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아이의 말간 눈을 들여다보았다. (p.100)

그때 왜 그렇게 가슴이 서늘해졌던 걸까. 느리디느린 작별을 고하는 것 같던 그 광경이, 헤아릴 수 없는 무슨 말들로 가득 찬 것 같던 침묵이, 여태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까. 마치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대답해주었던 것처럼. 뼈아픈 축복 같은 대답은 이미 주어졌으니, 어떻게든 그걸 내 힘으로 이해해내야 하는 것처럼.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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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씨가 녹슨 기타를 들고 커튼 뒤에서 걸어나왔다
친구들이여, 녹슨 씨는 일평생 친구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곤 말을 바꿨다
제군들이여, 그러나 녹슨 씨는 선생도 장군도 아니었다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를 너희들이여, 이곳은 너무 고요해서 소란하고 나는 귀를 잃었소
그러니 나는 당신들의 말을 듣지 못하고
내가 내뱉는 소리마저 듣지 못하오 이렇게 기쁠 데가
녹슨 씨는 청중들 앞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생애 첫 연주를 시작했다 <녹슨 씨의 녹슨 기타>부분

한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오래전 잃어버린 문장 하나가 입속에서 맴돈다. 이 거리에서 몇번 굴러야 할지 몰라 두 번만 굴렀다. 앞으로 두 번, 뒤로 두 번. 후회 반성 고쳐 말하기는 오래된 나의 지병. 얼룩이 남는다고 해서 실패한 건 아니다. 한 시절을 훑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먼지 같은 사람과 먼지 같은 시간 속에서 먼지 같은 말을 주고받고 먼지같이 지워지다 먼지같이 죽어가겠지. 나는 이 불모의 나날이 마음에 든다. <별 시대의 아움>부분

우리의 대답은 언제나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지. 청춘은 다 고아지. 헛된 비유의 문장들을 이마에 새기지. 어디에도 소용없는 문장들이 쌓여만 가지. 위안 없는 사물들의 이름으로 시간을 견뎌내지.
<발 없는 새>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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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 난 로봇들이 무서웠어요.

도민 왜지?

헬레나 그들이 우릴 미워하게 되지나 않을까 해서...

알퀴스트 이미 벌어졌죠, 그 일은.

헬레나 그래서 난 생각했죠... 만약 로봇들이 우리와 같아져서 우리를 이해하게 된다면, 우릴 그토록 미워하지는 않을 거라고요! 그들이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인간처럼 된다면요!

도민 아, 헬레나! 세상에 그 무엇도 인간만큼 인간을 증오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 돌덩이를 인간으로 변신시켜보라구. 그러면 그들은 우릴 돌로 쳐서 죽일거야!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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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안다. 그해 봄과 같은 순간이 다시 닥쳐온다면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초등학교 때 피구시합에서, 날쌔게 피하기만 하다 결국 혼자 남으면 맞서서 공을 받아안아야 하는 순간이 왔던 것처럼. (p.175)

여덟살 묵었을 때 네가 그랬는디. 난 여름은 싫지만 여름밤이 좋아. 암것도 아닌 그 말이 듣기 좋아서 나는 네가 시인이 될라는가, 속으로 생각했는디. 여름밤 마당 평상에서 느이 아부지하고 삼형제하고 같이 수박을 먹을 적에. 입가에 묻은 끈끈하고 다디단 수박물을 네가 혀로 더듬어 핥을 적에.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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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테 안경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희정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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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 더는 궁금해하지 않는 것, ‘내버려두는 것‘과 같았다.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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