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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러스트
필립 마이어 지음, 최용준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아메리칸 러스트'를 처음 보았을 때 받은 느낌은 참 투박하다는 것이었다. 두툼한 책의 두께와 단조로운 책의 표지가 그러했다. 표지에는 커다란 대못 그림 하나가 전부였다. 못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못은 온전치 못하다. 온통 녹이 슬어있다. 피할 수 없이 점점 부식되어져가는 과정에 놓인 표지의 못처럼, 아메리칸 러스트는 하나의 온전했던 도시가 사람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허물어져가면서 생기는 이야기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주인공들의 마을 부엘은 애초부터 이렇게 무너져가는 도시가 아니었다. 부엘에도 분명히 화려했던 시절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고 그 속에서 부엘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며 마을은 날로 활기를 띄고 발전해나갔다. 하지만 부엘은 지금,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넘쳐나는 죽은 동네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메리칸 러스트의 배경이 된 부엘은 실제로 미국의 펜실바니아 파예트 카운티다. 파에트 카운티는 철강산업으로 유명한 도시였지만 1980년대 후반 미국의 철강 산업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마을 전체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산업혁명 이래, 산업들은 나날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왔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산업은 사양산업으로 내리막을 걷는가하면 어떤 산업들은 엄청난 발전 가능성과 가치를 지니고 나라에서 중점적으로 키워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아메리칸 러스트 속, 부엘에 더욱 마음이 갔던 까닭은 산업 하나가 한 도시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내 고향인 경남 거제는 우리나라 조선 산업의 메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조선 산업으로 활성화된 곳이다. 메이저급의 조선소 두 개 이외에도 다양한 규모의 조선소가 들어와있고 지역 경제 역시 조선 산업과 밀접하게 맞물려 돌아간다. 조선소에서 보너스가 나온 날은 근처 술집과 고깃집이 회식의 여파로 불이나고, 백화점 매출은 평소의 네다섯배로 뛰고 할인마트 역시 북새통이 된다. 경제 인구의 엄청난 비율이 조선소에서 일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우리나라의 조선업은 거의 10여년간 세계 1위 자리를 공고히 지켜왔지만 며칠 전, 처음으로 중국에게 선박의 수주량, 수주잔량, 건조량 등 주요 3대 지표에서 우리나라가 중국에게 밀렸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문득 '과연 부엘의 철강산업처럼 거제에서 조선업이 사라지게 된다면 어떻게될까?'라는 생각에 순간 아찔해졌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순간의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아찔한데 아메리칸 러스트 속, 부엘은 이미 최악의 상상이 현실화되어버린 곳이었다.
폐허의 마을에도 천재는 존재한다. 더욱이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비운의 천재가 되고 마는 소년, 그가 바로 아이작이다. 아이작은 어렸을 때부터 무척이나 영특한 천재 물리 소년이다. 아이작의 꿈은 단 하나, 바로 부엘을 벗어나는 것이다. 더불어 어렸을 적부터 그를 옥죄이기만 하는 아버지 헨리로부터. 어머니가 자살하고 누나인 리는 예일대에 합격하면서 마을을 떠나고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작의 유일한 친구는 바로 포이다. 포는 아이작과는 정반대의 캐릭터다. 한 덩치하는 포는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로 제대로 날렸던 소년이다. 포와 아이작의 겉모습이나 성격은 정반대지만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무너진 마을 속에서 앞날을 보장받지 못하는 위태로운 청춘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분명히 각자의 재능이 있다. 만약 이들이 부엘이 아닌 다른 마을에서 태어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이 그들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아이작은 천재 물리학자로 칭송받는 머리 겔만에 버금가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르고 포는 하인즈 워드와 같은 인기있는 미식축구 스타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를 읽어가는 내내 우리는 더욱 안타까워진다.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지만 그들이 부엘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일의 확률은 절반 이상 낮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책을 읽기 전에, 책 뒷면의 쓰인 '가난과 절망으로 부식되어가는 인간들의 살인과 배신, 서글픈 희망으로 가득한 속죄의 오디세이'라는 문구를 보고는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전형적이고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빠른 속도로 빠져들게 되었다. 아메리칸 러스트는 분명히 전형적이고 다소 구질구질할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단순한 이야기 속에 다양한 인물들의 풍부하고 농익은 감정을 제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주인공인 아이작과 포를 비롯한 그들의 주변인인 헨리, 리, 그레이스, 해리스까지. 더불어 신예작가라는 필립마이어는 군더더기 없는 짧고 간단한 문장만을 사용하면서도 누구보다 섬세하고 풍부하게 그들의 속마음을 읽어주고 있었다. 한 소설 속에서 화자가 자주 바뀌게 되면 독자들이 다소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는데, 필립마이어는 적절히 화자 변경의 지점을 잘 배치함으로써 그러한 혼란스러움을 없애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흥미를 가중시켰다. 더불어 문학이 사회의 현실이나 역사적 측면과 너무 동떨어져서 걸어서는 안된다는 개인적인 내 견해와 부합할 때, 필립 마이어는 미국인들의 뇌리 속에서도 잊혀져가는 녹슨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재조명해낸 것 같다.
아메리칸 러스트는 두툼한 장편소설이다. 하지만 거대한 서사를 지닌 이야기라기보다는 여러 인물들의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다양한 감정들을 담은 긴 이야기이다. 만약 책의 두께만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책을 펼치기 주저하시는 분이 있다면 몇 페이지라도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나 또한 그러했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자 아메리칸 러스트는 빠른 속도로 내 속에 들어왔다. 아메리칸 러스트는 담담하면서도 간결하게 물 흐르듯 흘러간다. 하지만 그렇게 유유히 흐르면서도 전해야 할 이야기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신예 작가 필립 마이어가 주목받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