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진짜 내 일기장
질 티보 글, 조세 비세이용 그림, 최문영 옮김 / 끼리끼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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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직 나만 쓸수 있고 볼수있는 비밀 일기장이 있다면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하는 것들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적을수 있지 않을까. 이 일기장의 주인공인 말릴루 ( 이 이름은 가짜이다. 왜냐하면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실명을 그대로 썼다가 누가 이 일기장을 우연히 보기라도 한다면 내 비밀은 모두 탄로 날 것이다.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내 이름을 비롯해 친구와 가족의 이름까지 바꿔서 적었다.) 는 비밀 일기장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모든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그래서인지 일기장을 펼치면 페이지별로 총 3번의 경고문을 봐야 한다. 그만큼 말릴루가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은데, 얼마나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궁금증이 계속 커지면서 말릴루의 일기장을 훔쳐 보는 것 같은 미안함과 호기심이 동시에 든다.  

그렇게 보게 된 말릴루의 일기장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느끼는 점, 그리고 성숙한 생각이 들어있었다. 커서 작가가 되고 싶은 말릴루는 생각의 폭도 넓고 언어 표현도 탁월했는데, 또래에 비해 확실히 진지한 면이 많은 것 같다. 그러면서도 아이 같은 천진함과 귀여운 모습이 들어있어 빙그레 웃음을 짓게 만든다.

말릴루는 슬픔,실망,말다툼,생명,자유,기쁨과 행복,용기,두려움,전쟁,죽음,평화,외로움,자란다는것,희망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적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감정과 상황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어른들도 하기 힘든 자아성찰의 과정이 인상깊었다. 친구인 루루와 마틴이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말다툼을 하는 것과 의견을 주고 받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또 전쟁놀이를 하자는 친구에게 거절의 뜻을 전하며 '나는 전쟁을 싫어해. 그건 정말 너무 많은 불행을 가져오는 위험한 놀이야. 전쟁은 삶을 산산조각 내고, 집을 산산조각 내고, 새들을 산산조각 내.' 라는 생각을 하는 건 어른들을 반성하게 만든다. 아이의 눈에도 전쟁은 모든 걸 산산조각 낼 뿐이고 자유와 평화를 앗아가는 건데도 어른들은 근절시키지 못하니 말이다.   

 

또 말릴루는 슬픔과 실망, 그리고 외로움 등을 싫어한다. 이 세상에 생명과 기쁨, 행복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내 빨간 물고기 에밀리오가 죽었을 때의 슬픔을 비롯해 너무도 많은 것들이 날 슬프게 한다. 그래서 내 마음속 슬픔을 없애 주는 청소기를 꼭 만들어야 겠다고 말릴루는 결심한다. 엄마 아빠가 싸우는게 싫어서 놀이터로 도망쳐 나온 마틴의 모습은 또 얼마나 외로워 보였는지 모르겠다. 기쁨을 만드는 기계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모두 기쁨을 선물해줄수 있을테고, 마틴의 부모님도 싸우지 않아 결과적으로 마틴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텐데 말이다.  

말릴루의 일기장은 어떻게보면 아이의 눈높이를 가장한 어른의 일기장이 아닐까 싶다. 숙제하기를 싫어하고 시금치를 먹는데 큰 용기가 필요한 말릴루는 분명 어린아이의 모습이지만, 일기장에 적힌 다양한 이야기들은 어른들도 하기 힘든 고민과 깨달음이 적혀 있으니 말이다. 아니면 요즘 아이들의 생각을 내가 따라가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이들은 무조건 단순한 생각과 감정을 지녔을 거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한건 아닐까 반성을 해본다.  

분명 나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때도 큰 문제들을 통해 진지한 고민을 했겠지만 지금은 전혀 생각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고보면 나도 말릴루처럼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새 생명이 주는 기쁨 등을 통해 인생에 대해 나름 진지하게 생각해본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태어날 때부터 어른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아이였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동화책 한권을 읽고 참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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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앵그리 3D - Drive Angry 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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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싸우는 액션신과 황당한 스토리가 묘하게 어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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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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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영화와 드라마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혹성탈출》이 2011년 프리퀄로 다시 태어났다. 인간과 가장 닮은 유인원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이고 신선한 소재였기에 SF 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고, 생각할거리를 던져주기도 했다. 그동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며 자연을 지배해도 된다는 오만한 생각을 해온게 사실이다. 그로인해 인간의 편리함이 가치 기준의 1순위가 되었고 그 외의 것은 당연히 희생해야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며 소위 문명의 진화 라는걸 해 왔다. 그로 인한 피해엔 눈을 감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위했던 것들이 이제는 인간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그제서야 사건의 심각성을 깨닫게 됐다. 인간은 자연과 함께 살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걸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인간의 오만함에 경종을 울리는 영화 중 하나가 바로《혹성탈출》이지 않나 싶다. 동물 뿐 아니라 식물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는 와중에도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무거운 메시지를 보면서 많은 걸 생각해 보게 된다.    

과학자 윌 로드만(제임스 프랭코)이 '큐어'라는 약을 개발하게 된건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성공이라고 믿었던 약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고, 쓸모없어진 유인원들은 돈의 원리에 의해 가차없이 안락사 당한다. 그 와중에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새끼가 있었는데, 차마 죽일수 없었던 윌은 회사 규칙을 어겨가면서 새끼를 집으로 데려와 몰래 키우게 된다. 그렇게 윌의 집에서 살게 된 시저는 친구이자 가족으로 함께 하며 무럭무럭 자라게 되는데, 어느 날 윌은 시저가 보통 유인원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임상실험 대상자 였던 어미에게서 받은 약의 성분때문인지 시저는 놀라운 지능을 보였고 간단한 수화로 의사소통까지 가능하게 된다. 이 사건은 약을 실패라고 여겼던 윌에게 희망을 안겨다 주었고, 아버지를 치유할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게 했다. 

 

그 가능성은 곧 눈부신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데, 개발중인 신약을 아버지께 투입하자 알츠하이머 증상이 눈에 띄게 사라진 것이었다. 아프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 아버지의 건강함은 윌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고, 행복하고 편안한 일상을 누리게 해줬다. 하지만 집 안에서만 생활하던 시저가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되면서 감춰져 있던 공격성이 드러나게 돼 동물원에 갇히게 되고, 아버지도 심각한 부작용으로 힘들어 하게 된다. 모든게 잘 풀린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을 다치게 한 시저를 동물원에 가둬두는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법원의 명령을 따라야 했기에 윌과 시저는 헤어져야만 했다. 그동안 인간이 만들어 준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산 시저에게 이 곳은 살벌한 세계였다. 직원중 한명은 유인원들을 극도로 증오하며 못살게 굴었고, 유인원들은 연구소의 임상실험과 서커스 등 인간에 의해 이용만 당해 왔기 때문에 가슴 속에 분노만 있었다. 햇볕도 들어오지 않은 감옥 같은 이 좁은 곳에서 유인원들은 죽지 않을 정도의 환경속에서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처음으로 동족을 만나고, 모든 관계가 선의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시저는 윌이 찾아오지 않는 시간 동안 이 곳에 서서히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난 과연 누구일까? 윌의 친구일까, 가족일까, 아니면 애완동물이었나. 인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고 왜 이런 상황을 겪어야만 하는 것일까를 말이다.  

높은 지능으로 이제 이 곳의 우두머리가 된 시저는 탈옥을 감행하고 자신들을 이용하고 앞을 가로막는 인간들에게 경고가 담긴 공격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시저와 친구들의 공격은 인간에 비하면 잔인하지도, 끔찍하지도 않다. 꼭 필요한 순간만 공격을 했고, 자신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살려두었다. 그런면에선 인간보다 더 나아 보였다. 회사의 대표는 돈이 안된다면 유인원들을 죽이고, 돈이 될거라고 판단되면 유인원에게 고통스러운 실험도 지체없이 했으니 말이다.  

시저가 하고자 했던 건 인간사회를 정복하고 멸망시키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더 이상 인간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출했던 것 뿐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똑똑히 깨달은 지금, 더 이상 지체할순 없었다. 만약 인간이 똑똑하다면 시저의 일행들이 선택한 길을 존중하고 같이 조화로운 세상을 살도록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을 것이다. 시저의 진심을 알고 난 후, 그를 보내 준 윌 처럼 말이다. 그렇게만 되면 인간과 유인원의 싸움도 없었을 테고 각자 행복한 세상을 살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시저가 원했던 것이었는데, 대체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인간과 유인원이 대격돌하게 된 것일까.《혹성탈출》의 프리퀄인 이 영화의 결말을 보면 참 착하게 끝난것 같은데, 그 후에 벌어질 어떤 사건이 공생하길 바라는 시저의 마음을 돌린 것인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인간의 복수전으로 시작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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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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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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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사랑 - Incen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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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평범한 삶을 살 권리가 사치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이념과 종교로 인한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파괴시켰고, 나왈 마른완도 이 불행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그녀의 기구한 운명이 시작된 건 사랑, 순수하고 아름다운 감정인 사랑 때문이었다. 어떤 불손한 이념과 종교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를 좋아하고 같은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그런 사랑말이다. 하지만 레바논에선 사랑을 할 땐 조심해야 할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이교도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레바논은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얽힌 전쟁 때문에 내전이 끊이질 않았는데, 하필 기독교인 나왈이 사랑한 남자가 이슬람 난민 출신 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에겐 서로의 존재만이 중요할 뿐, 신분과 종교는 어떠한 제약도 아니었지만 나왈의 가족들 생각은 달랐다. 이슬람 난민을 만나는 것이 가족의 수치이고, 이는 명예살인이라는 악습을 행해도 될 만큼의 큰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알기 때문에 나왈과 남자는 마을을 떠나려고 하지만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한 채 오빠와 사촌에게 들키고 만다. 그렇게 나왈은 사랑하는 남자가 총에 맞아 죽는 걸 보게 됐고, 그녀 또한 총부리 앞에 운명을 맡긴 채 서 있을수밖에 없었다. 그때 할머니가 나타나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그녀 또한 가족에 의해 살해당했을 것이다.

한순간에 연인을 잃은 나왈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게 죽음의 이유가 될수 있다는 게 믿기질 않는다. 이 가여운 여인이 기댈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도 슬프다. 그리고 이미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끝내 키우지 못하고 떠나 보내야 하는 건 참으로 잔인했다. 전쟁과 미움이 아니었더라면 나왈은 남편과 아이가 있는 가정을 꾸리며 평화롭게 살았을 테지만,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 2명을 한꺼번에 잃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갓 태어난 아들의 발뒤꿈치에 표식을 새기며 반드시 너를 찾겠다는 나왈의 말은 과연 지켜질수 있을까. 엄마 없이 고아원에서 살아야 할 아이의 운명은 또 얼마나 가혹할까.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 된 나왈은 학생운동을 하게 되는데 기독교인 마을이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마을에 자신의 아이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왈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곳으로 향하는데, 그 과정에서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종교가 다르다는 건 언제든 죽임을 당할수 있다는 걸, 아이와 여자까지도 무참하게 살해하고 불지를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건이었다. 나왈이 기독교인 이라며 십자가를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이슬람교도 들과 똑같이 죽었을 것이다. 생지옥 같은 곳에서 겨우 살아나온 나왈은 더 정신없이 아들을 찾지만 이미 그곳은 대학살로 폐허가 된 채 불에 타고 있었다.   

아이를 찾겠다는 한줄기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나왈에게 이제 남은 것이라곤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증오 뿐이었다. "내가 겪은 것들을 적들에게 가르쳐 주겠어요"라는 나왈의 말 속엔 모든것을 잃은 채 상처투성이로 남게 된 여인이 있었다. 전쟁은 나왈과 같은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냈을까. 전쟁에 휘말려 인생이 뒤바껴 버린 사람들, 그러다 결국 그 전쟁의 고통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 분노를 표출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복수는 복수를 낳고 한번 시작된 폭력의 굴레는 누구도 끊지 못한채 계속 되풀이 된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 속에 발을 담근 후 였다.  

이런 나왈의 과거를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나왈의 품에서 큰 잔느와 시몽은 어머니의 죽음 후, 공증인 으로부터 황당한 유언을 듣게 된다. 아버지와 친형을 찾아 편지를 전해주고, 그 후에 묘지 비석을 세우라는 이상한 유언이었다. 아버지와 형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컸기에 놀라움을 넘어 화가 났고, 이렇게나 큰 비밀을 여태껏 말하지 않은 것에 배신감도 느꼈다. 거기다 나체로 묻어 달라는 유언은 평소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던 엄마를 더 낯설게 느껴지게 했다. 원래 다정하고 가까운 엄마는 아니었지만, 이 유언은 엄마를 타인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화가 난 시몽과는 달리 잔느는 어머니의 유언을 따르고 싶었고, 아버지께 드릴 편지를 가진 채 단서를 찾아나간다. 잔느가 가진 정보라곤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과 다레쉬 대학의 학생이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렇게 가느다른 실마리를 안은 채 어머니의 과거를 밝혀내는 과정을 통해 잔느는 나왈 이라는 여성의 아픈 삶을 마주보게 된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나왈이라는 여자는 그 마을의 수치라는 것도 알게 된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이슬람 난민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은 여자는 결코 용서할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왈의 딸인 잔느 또한 이 곳에서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게 홀로 어머니의 발자취를 따라가던 잔느는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어머니가 1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는 것과 72번 수감자인 노래하는 여인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 악명높은 감옥에서 어머니는 온갖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아부 타렉에게서 강간을 당하며 아이까지 낳았다는 충격적인 사실 앞에 잔느는 무너진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힘든 사실앞에 시몽을 부르고, 이제는 시몽이 내키지는 않지만 친형을 찾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이 남매가 밝혀 낼 진실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충격을 던져준다.  

젊은 여인이 겪어야 했던 그 고통을 상상해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왈은 이슬람 난민이 아니라 한 남자를 사랑했었을 뿐이다. 버스에 타고 있던 이슬람 모녀는 종교때문에 죽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런 편견없이 그저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수 없는 사회에선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될수 있다는 걸 나왈의 삶을 통해 알려준다. 그리고 이런 잔인한 삶은 어린 아이에게도 해당된다는 안타까운, 사실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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