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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문득, 리베르탱고

―구병모,『파과』를 읽고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문득, 리베르탱고가 듣고 싶어졌다. 평소에 이런 종류의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요즈음 나는 리베르탱고에 꽂혀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리베르탱고였을까. 그럴 듯한 이유를 댈 순 없지만, 감상을 시작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리베르탱고를 듣고 있다. 스페인어로 자유를 뜻하는 단어인 ‘Libertad’에 'tango'를 합친 단어가 리베르탱고이니 해석하자면 아마 ‘자유의 탱고’쯤 되지 않을까. 어쩌면 네일아트를 받은 조각의 오른손에서 나는 자유를 엿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사라진 왼쪽 손목에서 본 것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파과’가 편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너무 기대를 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려하다 못해 과하다는 느낌의 문장들에 나는 쉽사리 책장을 넘길 수 없었고, 똑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기 일쑤였다. 파과를 다 읽은 지금에도 차라리 문장이 매끄러웠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떤 문장은 거의 한 페이지에 걸쳐 늘어져 있었고, 솔직히 많이 불편했다. 거기다 비문과 오문도 곳곳에 보여서, 한 번에 뜻을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파과’가 좋았다. 문장만으로 ‘파과’를 판단하기엔 그 속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장의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보다는 ‘파과’ 그 자체를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크다.

 

  8월의 주목 신간을 써야했을 때, 나는 ‘파과’를 가장 먼저 목록에 올려두었다. 60대 현역 여자 킬러의 이야기라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곁가지처럼 펼쳐져 있을 주변 인물들과의 이야기가 더 궁금했기 때문이다. 강 박사와의 이야기, 투우의 어릴 적 이야기, 무용에 관한 이야기, 당숙 집에서의 이야기, 류와 조의 이야기 등등. 실제로 어느 것 하나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은 게 없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많은 것들을 끼워놓은 게 아닌가 싶지만,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았음으로 실보다는 득에 가까운 게 아닐까? 거기다 흐름이 끊기는 것도 아니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사이엔 공백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높은 밀도가 느껴진다. 특히 강씨 아버지를 고통 없이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조각 자신이 낳았던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고통 없이 죽이고 싶었다는 생각으로 번지고, ‘그러니까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는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까지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어쨌든, 영원한 주류는 없다. 조각만 봐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무리 최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까지 온전하게 막을 수는 없다. 물론, 흐름을 더디게 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흐른다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늙음이 죄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파과’를 읽고 나서 그 생각은 더 단단하게 내 속에 자리 잡았다. 늙음은 죄가 아니었고, 더군다나 젊은 날의 잘못으로 인해 받은 벌이 아니었다. 방역업자로서는 늙음이 치명적일지 모르겠으나, 자신이 키우는 늙은 개에게 도망갈 길을 가르치고, 파지 줍는 노인들 돕기 위해 자신의 목표물을 놓치는 조각에게 나는 연민이 들었다. 게다가 조각이 자신의 신체적인 노화에 초조해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그냥 모든 걸 다 내려두고 치킨집이나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다. 다른 사람을 피도 눈물도 없이 죽이는 조각에게 드는 연민이라니, 아이러니 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조각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그의 편에 서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각이 방역을 하는 장면이 나올 때에도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나 무자비하게 죽일 수 있냐는 둥, 조각의 어린 시절이 조각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둥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무리가 아쉽다는 생각과 동시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강 박사의 딸이 어떻게 구해졌고, 강 박사가 조각을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등등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서 좋았다. 실은 남은 이들의 이야기도 궁금했지만, 그렇게 얘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투우가 완전히 눈을 감은 다음에야 그가 누구였는지 떠올린 조각이었지만, 글쎄, 너무 구구절절하지 않아서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쉬운 것 같기도 하고 이 부분만큼은 조금 헷갈린다. 자신이 누구인지 조각이 기억해냈다는 걸 투우가 알았다면 정말 좋아했을 거란 생각 정도는 든다. 그렇지만 조각이 박카스 할머니로 오해받고, 네일아트를 받는 장면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방역업자로서의 모습을 지운 채 살아가는 것 같아서, 마음 한편에 이상한 안정감이 찾아왔다. 소설에 너무 몰입해서 드는 마음이겠지만, 이렇게 몰입하는 것도 생각해보니 정말 오랜만이었다.

 

  구병모의 소설은 처음이지만,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파과(破果)와 파과(破瓜)에 관한 감상은 글쎄?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든다. 그냥 전자의 파과 홀로 쓰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구병모 자신도 대출혈 자폭 서비스라 말하는 것을 보니, 같은 발음의 두 단어로 장난을 치는 것에 대해 큰 자신감이 들지는 않나 보다. 판잣집에서 미군을 해치우고 나온 조각에게는 두 번째 단어가 어울리겠지만, 갱년기는 훨씬 오래 전에 지났을 조각에게는 좀, 그렇지 않을까? 어쨌든 흠집이 난 과실이라는 뜻의 파과와 조각이 소설 속에서 보여준 완벽하게 일치했다. 흠집이 난 과실도 처음부터 흠집이 나있진 않았을 것이고, 파과도 처음부터 늙어있었던 게 아니니 말이다.

 

  감상을 마무리하는 지금에도 나는 리베르탱고를 듣고 있다. 만약에 파과가 영화로 나오게 된다면 마지막 장면엔 리베르탱고가 좋을 것 같다. 또한, 조각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영화 ‘피도 눈도 없이’에 나온 배우 이혜영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생각은 그냥 개인적인 견해이니, ‘그냥 그렇다고’란 말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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