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취임사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 추가) 알라딘 싱글즈 특별 기획 3
대한민국 / 알라딘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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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다운 나라를 위한 위대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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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 세트 - 전10권 - 2003년 개정판
나관중 지음, 김구용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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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能臣이요, 亂世奸雄'이오


국인이 아니더라도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읽어봤을 소설. 읽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주인공을 알고 그들의 활약상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소설로는 삼국지가 빠질 수 없다.


삼국지의 매력은 무엇일까?

혹 자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다양한 인물이 나오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영웅들이 야망을 펼치는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외에도 삼국지를 읽은 사람들의 수만큼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모두가 시간이 지나도 삼국지의 인기가 시들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그렇듯 삼국지는 무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어릴때는 유비와 관우, 장비의 매력에 빠졌다면, 나이가 들어서는 조조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는데, 단순히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없는 매우 입체적인 조조의 모습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三國志演義는 評譯한 것이 아닌, 김구용이 청나라 모종강(毛宗崗) 본을 완역한 책이다. 삼국지는 그 인기만큼 많은 평역본과 번역본이 있고, 비판도 많다. 김구용의 삼국지연의는 한학에 조예가 깊은 역자이기에 좋은 번역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정역삼국지를 지은 정원기에 따르면 가장 원전에 충실한 완역본이기는 하나 底本의 문제, 옛날식 한문 어투, 몇 곳의 오류 등을 문제로 지적받고 있다.


그래도 글 중에 나오는 한시를 멋스럽게 번역한 것은 김구용 삼국지연의의 매력이고(詩가 없는 삼국지는 춤이 빠진 뮤지컬이 아닐까?), 옛스러운 말투 또한 읽다보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 기분을 느끼게도 하니 삼국지를 선택하는 사람이라면 큰 후회는 없으리라. 다만, 문장 자체가 건조하여 때론 지루한 점이 있다는 것은 잊지 말기를. 물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된다면 좋은 번역의 삼국지로 꼽히고 있는 리동혁의 本삼국지와 정원기의 정역삼국지를 읽어보고 싶다.


지난  '항우강의'(우미인아, 우미인아 너를 어찌할 거나)에서 드라마 삼국지(三國志)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드라마라는 특성상 원작과는 다소 다른 부분도 있지만, 구성 전개는 원작에 최대한 충실했다고 생각된다. 특히 인물을 해석하고, 걸맞는 배역 선정이 매우 탁월했는데, 앞서도 얘기했지만 그중에서 조조(曺操)역의 진건빈이 단연 압권이다.


나중에 이중텐의 삼국지강의에 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조조의 성격은 단순하게 판단할 수 없다(누구의 성격이 단순하겠느냐만은). 삼국지를 처음 접한 어린 시절의 조조는 충의를 저버리지 않는 유비의 앞길을 막는 간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조조에게는 유비보다 더 많은 출중한 인물들이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비는 뒤늦게 제갈량을 얻어 겨우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과 비교해, 조조에게는 이미 순욱, 정욱, 곽가 등 당대 최고의 인물들이 그를 선택하였고, 그들은 뛰어난 활약을 한다. 당시 조조의 세력이 컸으므로 명예를 얻으려는 자가 모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이 조조를 따를 당시에는 오히려 원소, 원술, 유표 등의 더 큰 세력이 존재했기에 그러한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과연 당대의 뛰어난 인재들이 어째서 간사한 성격의 소유자, 아니 간웅을 선택했을까? 조조에게는 어떤 매력이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이중텐의 삼국지강의에서 다시 얘기해보기로 하자.


끝으로 여전히 조조를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조조를 미워할 수 없는 장면을 얘기하고 끝내기로 한다.




관우를 보내기 아쉬워하는 조조의 모습 ▼

 

(관도대전을 준비하던) 조조가 (짬을 내어) 유비를 공격하고, 관우의 투항을 받아내는 것은 삼국지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장면일 것이다. 관우는 유비의 행방을 알게 되면 언제든지 돌아가는 조건으로 조조에게 투항하고, 조조는 관우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재물과 벼슬을 비롯해 많은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나 관도대전을 앞두고, 원소 휘하의 안량과 문추를 죽임으로써, 조조에게 보답했다고 생각하는 관우는 유비의 행방을 알자마자 바로 떠나고, 뒤늦게 조조는 관우를 뒤따라와 배웅을 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조조는 관우에게 옷 한벌을 선물 하지만, 관우는 가는 길이 바빠 말에 내릴 수 없다며 창에 걸어달라고 내민다. 조조는 관우의 예에 어긋나는 행동에도 개의치 않고 옷을 창에 걸어주고는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물론 이 장면은 관우의 굳은 신의를 대표하는 장면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조가 인재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대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떠나는 관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관우와 같이 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조조의 애처로운 표정을 보노라면, 조조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관우가 오히려 야속하게 느껴진다.


결국 고개를 숙이는 조조. 이런 조조를 과연 누가 미워할 수 있을까?


KBS 해외특별드라마 삼국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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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1 - 개정2판 사기 (민음사)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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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다.1


옛날 西伯2은 羑里에 갇혀 있으므로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陳나라와 蔡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에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離騷"를 지었고, 左丘明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를 잘림으로써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좌천되어 세상에 "呂覽3"을 전했으며, 한비는 秦나라에 갇혀 "說難"과 "孤憤" 두 편을 남겼다. "시" 300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인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4


백삼십편에 52만 6500자로 씌여진 방대한 책을 쓰면서 사마천은 壺遂와의 대화에서 "나는 이른바 지난 일들을 적어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간추려 정리하려 할 뿐 창작하려는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것을 "춘추"와 비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라는매우 겸손한 말로 사기를 칭하지만,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모든 면을 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책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지난간 일이 서술된 사기를 통해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할 수 있는게 아니겠는가.


宮刑을 당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 당시에 살지 않는 자로서 똑같이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겼던 당시였기에 죽음보다 더 괴로웠으리라 미루어 짐작해본다. 치욕스러운 일을 겪어야 했던 사마천은 그보다 앞서 고통과 굴욕을 당했던 이들과 그들이 남겼던 뛰어난 업적을 항상 생각다. 고통이란 뛰어난 결과를 얻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양분이 될 것이라는 생각. 이는 사기 전체에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물론 그런 생각에는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 생각이 옳든 옳지 않든, 최소한 그런 자기위안이라도 없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는 스스로 생각이 깊고, 합리적이며, 포용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때마다, 그전까지의 내가 얼마나 편협하고 어리석었는지 깨닫고는 놀라게 된다. 사기에 나오는 많은 인물 중에서도 자신의 능력에 자만하고, 탐욕을 그치지 않는 자들은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 의해서 몰락한다. 그러나 자신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은(최근 유행하는 말로는 자신을 객관화) 거친 소용돌이를 피해 각자의 인생을 만들어간다. 그들은 항상 겸손하고, 상대를 존중하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꼭 필요한 삶의 지침이다.


민음사에서 완역 출간된 사기는 表와 書를 제외해도 本記, 世家, 列傳이 2,000여 페이지가 넘는다. 따라서 항상 옆에 두고 삶의 지침을 삼아야지, 한번 읽고 덮어버릴 책은 아니다.


본기本記는 지루하며, 세가世家는 재미가 시작되고, 열전列傳은 소설을 읽듯 무척 흥미롭다. 유방을 도와 한漢나라를 건국한 주역들의 삶과 심리상태를 묘사한 열전, 재미있는 얘기를 담은 골계滑稽열전이 재밌고, 개인적으로는 숙손통(叔孫通) 열전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사기의 白眉는 누가 뭐래도 각 편마다 끝에 나오는 "태사공이 말한다" 부분임에는 많은 이들이 동감할 것이다.


다만,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지도자료가 첨부되고, 익숙치 않은 연호(年號, OO왕△년) 옆에 서력기원(기원전◎◎◎년)을 같이 표기했다면 좀 더 이해가 편했을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물론 이 책은 완역完譯 본이지 해설서가 아니므로 한편으로는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끝으로 기억에 나는 구절을 적어본다.


의복이란 입는데 편하기 위한 것이고, 예란 일을처리하는데 편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책 속의 지식으로 말을 모는 자는 말의 본성을 다할 수 없고, 옛것으로서 지금을 만들려고 하는 자는 일의 변화에 통달할 수 없다. - 趙世家 p518~521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도 살아있는 자는 부끄럽지 않다.

곧은 신하는 재난이 닥치면 절재가 드러나고 충성스런 신하 또한 재앙이 이르게 되면 행동이 분명해진다. - 趙世家 p525

평 상시에는 그의 가까운 사람들을 살피고, 부귀할 때에는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살피며, 현달을 했을 때에는 그 사람이 추천하는 사람을 살피고, 곤궁한 때에는 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살피고, 가난할 때에는 그 사람이 가지려하지 않는 것을 살피십시오. - 魏世家 p558

뱀이 변하여 용이 되는데, 그 무늬는 변하지 않는다. 家가 변하여 國이 되었지만 그 姓氏는 변하지 않는다.

- 外戚世家 p749

주는 것이 곧 얻는 것임을 아는게 정치의 비책이다. - 官·晏列傳 p74

안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렵다 - 老子·韓非列傳 p502

물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의 길흉을 알 수 있다.

성공했으면 그 자리에 오래있지 말라. - 范雎·蔡澤列傳 p502

욕심이 그칠 줄 모르면 하고자 하는 바를 잃고, 가지고 있으면서 만족할 줄 모르면 가지고 있던 것마저 잃는다.

- 范雎·蔡澤列傳 p503

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아야 장사를 잘할 수 있다.(韓非子) - 范雎·蔡澤列傳 p504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 廉頗·藺相如列傳 p545

너무 곧은 것은 굽어 보이고, 길은 본래 꾸불꾸불하다. - 劉敬·叔孫通列傳 p112

힘들때 치욕을 참지 못하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없고, 부귀할때 뜻대로 하지 못하면 현명하다고 할 수 없다.

- 季布·欒布列傳 p124

자기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시행되며, 자기 몸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해도 따르지 않는다. 속담에 '복숭아나 오얏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밑에는 저절로 샛길이 생긴다' - 李將軍列傳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데 사귀는 정을 알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으로써 사귀는 모습을 알며, 한 번 귀했다가 한 번 천해짐으로써 사귀는 참된 정을 알게 된다. - 汲黯·鄭列傳 p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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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파티아 성 - 개정판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7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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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cula’s castle (출처: http://www.yoshay.com/when-literature-meets-history)



과묵한 남자와 그것을 벌충할 만큼 수다스러운 남자 두명이 길을 떠났다. 그 중에 젊은 남자는 삼림감독관을 하는 닉 데크이고, 또 다른 남자는 파타크 의원醫員으로 모두 웨트로슈 마을 사람들이다.


웨트로슈 마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인 트란실바니아1에 있는 작은 마을로 산업 중심지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에 문명의 이점을 얻지 못했다. 또한 자연이 주는 혜택도 받지 못한 웨트로슈 마을은 길, 그저 넓은 길 뿐이다. 그리고 마을의 하나뿐인 길을 따라 60여 채의 집들이 불규칙하게 무리지어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런데 그 마을사람 둘이 길을 떠나고 있다. 목적지는 카르파티아 성城. 그들이 가는 카르파티아 성城의 유래는 12세기나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2 건축가가 누구인지 확실치 않은 그 성의 소유자는 고 르치 남작 가문으로 아득한 옛날부터 이 지방의 영주였다. 한때 독립을 위해 헌신적인 희생과 노력을 했던 그 가문은 모두 쓸쓸히 사라졌고 이제 마지막 남은 인물은 로돌프 데 고르치 남작이다. 그러나 그도 동참했던 헝가리의 압제에 저항하는 루마니아 농민의 휴혈 봉기가 패배하자 성을 떠나게 되었고, 성의 일부는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후 마을 사람들에게 카르파티아 성은 버려진 성, 유령이 나오는 성, 신비로운 성 등으로 환상이 가득 채워졌다. 그것은 웨트로슈가 있던 트란실바니아가 유럽에서도 가장 미신적인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처럼 문명의 혜택을 많이 받지 못하고 초자연적인 믿음을 버리지 못한 마을에 한 유대인 상인으로부터 망원경을 구하게 되고, 망원경으로 카르파티아 성에 연기煙氣가 솟아 오르는 것을 보게되자 조용하던 마을은 술렁이게 된다. 결국 그 이유를 밝히고자 두 사람이 그 성을 향해 길을 떠났고, 그들이 바로 닉 데크와 파타크이다.


그러나 그들은 카라파티아 성의 비밀을 밝히는데 실패한다. 파타크는 공포에 휩싸인 채, 닉 데크는 작은 부상을 입고 마을 사람들에게 구조되어 돌아오고, 평소 신을 믿지 않지만 악마는 믿었던 파타크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갑자기 무시무시한 굉음이 대기를 가득 채웠어요. 그보다 들짐승이 포효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 아아! 정말 무서운 광경이었어요! (…) 나는 싸우려고 했지만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 그 순간 비명이… 실로 무시무시한 비명이 들여왔습니다. 그 소리를 낸 사람은 닉 데크였어요."3


웨트로슈 마을 주민들은 공포에 휩싸였고, 모두 그 고장을 떠날 이야기만 하였다. 실제로 몇몇 집시 가족은 그런 성 근처에 살기 싫다고 마을을 떠나기도 하였다. 그러던 그곳에 낯선 남자 둘이 찾아온다.


그들은  프란츠 데 텔레크 백작과 그의 하인인 로츠코이다. 둘은 루마니아 지역을 여행하던 중 웨트로슈 마을을 지나게 되었고, 요나스가 운영하는 (그 사건 이후 두려움으로 마을 사람들이 기피하는) '마티아스 대왕'에 묵게 되었다.  뜻밖에 지체높은 사람의 방문에 마을 사람들은 기뻐하고, 아무도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카르파티아 성에 대해 우연히 알려주게 된다. 악마와 유령의 짓이라는 마을 사람들 얘기에 그저 상상일 뿐이라고 단정하며 큰 흥미를 갖지 못한채 다음날 떠나려고 했던 텔레크 백작은 그 성의 주인이 로돌프 데 고르치 남작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질정도로 놀라게 된다.


텔 레크 가문은 루마니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가문이다. 어린시절 크라요바 성을 떠나지 않은 채 살았던 텔레크 백작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자신의 지평을 확대하고자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가수 스틸라에게 사랑에 빠진다. 그곳에는 스틸라의 음악의 매혹에 빠진 또 다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고르치 남작이다.


라를 만나기 위해 찾아드는 다른 남자들과 달리 고르치 남작은 무대에서만 스칼라를 찾았고, 그 횟수가 반복될 수록 스라는 미지의 인물인 고르치 남작에 대해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은퇴와 함께 텔레크 백작과 결혼하기로 선언한 스라는 마지막 공연에서 갑자기 숨을 거두고, 고르치 남작은 사라진다. 그것이 5년 전 일이다.


카라파티아 성에 흥미를 갖지 않았던 텔레크 백작은 고르치 남작의 이름을 듣자 5년 전 일이 떠오르고, 카라파티아 성에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이 고르치 남작이 저지른 일이 아닌가 의심을 하게 된다.


그날 밤, 텔레크 백작은 스틸라의 노래소리를 듣게 된다. 스틸라가 죽던 그날 밤 공연에서 불렀던 노래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텔레크 백작은 꿈이라고 위안하지만, 미노스 왕의 딸4에 대한 사랑이 테세우스를 이끌듯 텔레크 백작은 점점 카라파티아 성에 이끌리고, 로츠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성 위에서 두 팔을 벌리며 텔레크 백작을 부르는 듯한 모습을 한 스틸라를 보게 된다.


"스틸라… 스틸라가… 살아 있어!"5

 

갑자기 나타난 스틸라에 이끌린 텔레크 백작은 먼발치에서만 살펴보겠다는 생각을 잊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카라파티아 성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곧 어두운 지하에 갇히게 되고, 거기서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데




쥘베른의 소설 『카르파티아 성』에서 카라파티아 성과 로돌프 데 고르치 남작의 이미지는 흡사 드라큘라 성과 드라큘라 백작이 떠오르는데 책 후반의 작품 해설6을 보면 실제로 드라큘라 성城과 배우 흡사하다고 한다. 그러나 쥘베른이 그 성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유럽 사람들에게는 트란실바니라는 지역이 문명이 뒤처진 원시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기에 초자연적인 것을 믿는 마을 사람들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지역을 배경으로 한, 유명한 『흡혈귀 트라큘라7가 5년 후 출판된다.


소 설의 후반에 이를때까지 미지의 인물로만 묘사되고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고르치 남작과 그를 따르는 발명가 오르파니크는 『해저 2만리』의 네모 선장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데, 문명을 거부하고 사람들을 피해 은둔하는 모습에서 기시감旣視感을 갖게 한다. 이를 "네모 선장은 후기의 염세적 경향을 예고하는 중요한 요인"8이라고 작품 해설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스틸라의 다른 노래가 담긴 축음기가 있음에도 마지막 남은 축음기 박살나자 고르치 남작이 카르파티아 성과 운명을 같이한 이유는, 오르파니크도 소설 속에서 설명할 수도 없다고 말하지만, 무엇이었을까. 스틸라의 '마지막 노래'만이 고르치 남작에게는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고르치 남작은 알지 못했지만(또는 뒤늦게 깨달았지만) 고르치 남작은 카르파티아 성의 또다른 모습이었을까.


지구 속과 바다 속, 우주를 자유롭게 여행하는 기존의 쥘 베른 소설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지만, 쥘 베른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추천한다.






  1. 마자르어(헝가리어)로 '에르델리' 즉, '숲의 나라'다., p12 
  2. p33 
  3. p130~p132 
  4. p219 주석 
  5. p207 
  6. p287 
  7. p288 
  8.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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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교양강의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9
가이즈카 시게키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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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른바 지혜(智)라는 것은 미묘한 말이다. 미묘한 말은 지혜가 뛰어난 사람(上智)도 알기가 어렵다. 지금 뭇사람들을 위해 법을 제정하면서 지헤가 뛰어난 사람인 상지마저 알기 어렵게 만든다면, 백성이 그것을 따라 이해할 수 없다.1



국 고전을 다루는 교양강의 시리즈가 꽤 많이 출판되어 있다. 대부분 해당 분야의 저명한 학자가 강의형식으로 구성하였기에 초심자가 접근하기 좋고 재미도 있는데, 한비자(韓非子)를 읽기 전 도움을 받고자 읽기 시작했다.


<동양의 마키아벨리>로 언급되는 한비자는 마키아벨리보 다 무려 1700여년전의 사람이니만큼 한비자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칭호일지 모른다. 오히려 마키아벨리를 일컬어 <서양의 한비자>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게 불리지 못한 것은 근대이후 서양 문화의 지배력이 동양을 압도한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한비자>를 잘 모른다는데 있을 것이다.


한비자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통해 얻은 지식 정도이다. 법가(法家)의 사상가로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卿)의 제자이며, 한비자의 재능을 시기한 이사와 요고(姚賈)의 참소에 죽음을 당하게 된다2는 것이 흔히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인 지식은 한비자에 대해 더 큰 오해를 하게 만들고, 더 미지의 인물로 만들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한비자 교양강의』의 저자는 이러한 신비와 무지의 인물 한비자를 현실세계로 끌어냄으로써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한비(韓非)의 시대적 배경


한비(韓非)를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저자는 먼저 한비 개인과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첫째, 한비의 신분은 무엇인가. 둘째, 한비는 순자의 제자인가. 셋째, 정말로 이사가 한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 그리고 당시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진(秦)나라가 어떻게 전국(戰國)을 통일해 가고 있는가-을 통해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한비가 순자의 제자가 아닐것이라는 추정은 먼저 『순자』에 이사와의 문답이 있는 반면, 한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3 그리고 『한비자』에서도 한비의 시대보다  1세기 이상 앞선 신불해(申不害)는 자주 화제에 오르지만 순자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점4과 순자의 후반생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점5 등으로 볼때 한비와 순자가 직접적인 접촉이 없으리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비는 이사와 동문(同門)이 아니었다는 할 수 있는데, 그럼 왜 이사는 한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을까. 저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한비의 죽음은 이사가 아닌 한비 자신이 초래했다고 말한다.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간 한비의 목적은 한(韓)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산 동 네 나라의 연맹에 대해 진나라는 반격을 하고자 요고로 하여금 사국연맹 반대 운동을 추진케 하였는데, 한비는 이를 막기위해 요고의 스캔들을 터뜨렸다. 그러나 한비의 뜻과는 달리 요고와의 논쟁에서 지게 되고 결국 이것이 죽음에 이르게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6


전국시대 진(秦)을 제외한 육국(六國)은 이처럼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 중에서 한(韓)나라는 강국 사이에 끼어 항상 압박을 받는 처지였고, 마치 진(秦)나라의 속국과 같은 나라로 전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7 한비는 이러한 자신의 나라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이상적인 정치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오히려 진(秦)나라가 한비의 사상을 받아들여 한(韓)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게 된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그러나 그로인해 진(秦)나라도 결국 멸망을 피할 수 없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비의 사상(思想)의 변화


저자는 한비의 사상과 그 변화를 전반부(제3편 난언 ~ 제21편 유로) 19편, 중반부(제22편 세림 상 ~ 제35편 외저설 좌하) 14편, 후반부(제36편 난일 ~ 제55편 제분) 20편으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8


혹독한 법률만능주의로만 생각되는 한비의 초기는 황로(黃老) 또는 도가(道家)사상의 영향을 받았기에 "예를 강조하기보다는 소박한 심정에 호소해야 한다"9, "민중의 소박한 심정을 잊으면 혼란이 일어난다"10라고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초기 저작들이 한비의 저작인지에 대해 용조조(容肇祖)11와 양계웅(梁啓雄)12은 의견을 달리한다. 저자는 1973년 장사(長沙)의 마왕퇴(馬王堆) 3호 한묘(漢墓)에서 나온 대량의 백서(거의 완전한 두 종류의 『노자』 초본(抄本))을 통해 이러한 의문에 한발 더 접근한다.


이처럼 황로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았던 한비는 그 후 개인주의적 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와 국가를 위해 활동하겠다는 결심을 다진다. 그리고 법률에 의한 통치를 주의(主義)로 삼는 법가 사상으로 전향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망국의 위기에 직면한 한(韓)나라의 현실적인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고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새로운 정치학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고, 국가통치는 법을 통해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고민하게 된것13이다.


그럼 법이란 무엇인가? 「식사」편에서 다음 내용을 통해 한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한비에게 법이란 도량형과 같이 기준을 판단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중략) 지혜와 재능은 도를 다하더라도 남한테 전할 수 없다. 도와 법에 의존하면 모두 안전하며 지헤와 재능에 의존하면 실패가 많다. 무릇 저울대를 매달아 평형을 알고 규구(規矩)를 써서 원을 아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다.14


한비는 소국 한(韓)나라를 혼란한 정세에서 지킬 수 있는 길은 군주독재를 실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법에 의거한 통치 기술을 연구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적 혁명은 「고분」, 「세 난」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편을 두국상은 순자의 영향이라고 하지만, 냉정하고 객관적인 분석의 순자와는 달리 개인적 감정을 바탕으로 주관적이고 통렬한 비판을 한다는 점에서 둘의 성격 차이가 명확하게 달라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순자』의 이론에서 촉발되었지만 완전히 다른 전개상을 보인다는 것이다.15


법이란 득실을 재고 곡직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며, 법이 서면 감히 페지할 수 없다. 따라서 (도를 쥔 자는) 능히 스스로 재며, 그렇게 한 뒤에 천하를 실제로 알아 미혹되지 않는다.16



한비의 법法, 술術, 세勢


『한비자』에서는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은 도량형처럼 객관성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지능(智能, 지혜와 재능), 즉 자의(恣意)가 섞여들면 법의 안정성이 훼손된다", "오로지 법에 의해서만 지배해야 하며 지능, 곧 자의가 섞여서는 불가능하다".17 이는 『관자』의 「임법(任法)」의 영향을 받아 법가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법에 대한 사고방식은 상앙과 신불해의 영향을 받게18 되는데, 상앙의 변법을 통해 스스로 철저한 혁명사상을 부과함으로써 국가의 위기를 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함으로써 독자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19


한비는 오기(吳起)와 상앙(商盎), 신불해(申不害) 등의 법술이론은 받아들여 자신의 법술이론을  '법'法, '술'術, '세'勢라는 세 가지 요소를 담아 구축하게 된다. 여기서 '법'이란 성문법을 말하며, 군주의 입장에서 이를 운용하는 것을 '술'이라 하고, 이러한 법과 술을 보완하고 성립하게 만드는 것이 '세'라는 개념이다.20 즉 법과 술은 법학적·정치적 개념이라면 세는 역사철학적 개념이다. 저자는 한비가 신불해의 술을 중시한 한 분파, 상앙의 법을 중시한 한 분파, 신자(愼子)의 세를 중시한 한 분파를 평등한 입장이 아니라 한 단계 높은 입장에서 종합했다고 해석한다.21


한비는 이러한 법치주의를 저해하는 요소라 다음 다섯가지를 꼽았다. 첫째 학자, 둘째 유세가, 셋째 칼을 찬 협객, 넷째 군주와 가까운 신하, 다섯째 상공업자.22 지금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군부의 권력, 권력에 기생하는 무리, 시장 질서를 왜곡하는 재벌권력, 잘못된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부역학자 등이라고 한다면 한비가 뽑은 요소가 현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비의 법가 사상은 당시 신흥 지주계급이 점차 통치 계급으로 등장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간주하지만 실상은 군주의 독재체제를 강화하는 정책을 주장한다.23 이 는 인민의 동의를 얻지 않으면 법령을 제대로 실행할 수 없다는 제(齊)나라와는 사뭇 다른 주장으로 제나라와 같이 민주주의적인 전통이 발달하지 못하였고, 진(晉)에서 갈려져 나온 이후 여러 법이 섞여 있는 당시 한(韓)나라의 특수한 상황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인 진(秦)나라가 제나라외 동쪽 여러나라로 부터 강한 저항을 받게 된 원인이 된다.24


비록 한비가 군주의 독재체제를 주장하였다고 해도 그것은 한비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제25를 지지했던 것과 같다. 만일 한비가 현재를 산다면 그는 주관적이고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제도가 아닌 객관적이고 명확해 항구적인 제도를 주장했을 것이다. 그것이 한비에게는 법치주의였다. 군주도 지켜야 하는 법. 법에 대한 그의 사상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비자』를 알지 못한채 한비자를 설명하는 책 한권만으로 한비의 사상을 모두 다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어떤 면에서는 잘못 이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는 후에 『한비자』를 읽고 다시한번 이 책을 읽음으로써 수정, 보완해야 할 것이다.






  1. p266 [본문으로]
  2. 사기열전1, 노자한비열전, 민음사, p85 [본문으로]
  3. p55 [본문으로]
  4. p56 [본문으로]
  5. p82 [본문으로]
  6. p129 [본문으로]
  7. p94 [본문으로]
  8. p141 [본문으로]
  9. p165 [본문으로]
  10. p165 [본문으로]
  11. 용조조容肇祖(1897~1994) 중국 민속학과 중국 민간문학의 전문가. p140 [본문으로]
  12. 양계초梁啓超(1873~1929)의 동생, p141 [본문으로]
  13. p190 [본문으로]
  14. p197 [본문으로]
  15. p212 [본문으로]
  16. p191 [본문으로]
  17. p219 [본문으로]
  18. p221 [본문으로]
  19. p231 [본문으로]
  20. p242 [본문으로]
  21. p242 [본문으로]
  22. p252 [본문으로]
  23. p254 [본문으로]
  24. p261 [본문으로]
  25.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도 선천적 노예 제도를 인정하였는데, 이는 즉 태어날 때부터 노예인 사람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위키백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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