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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 삼국지 - 전11권 세트
나관중 지음, 리동혁 옮김, 예슝 그림, 저우원예 기타 / 금토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언론사에서 35년 넘게 일하다 퇴직하고 보니 가장 좋은 일은 책 읽을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주로 문화부 분야에서 오래 일했으므로 그때도 당연히 책을 많이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주로 일과 관계된 것이라 속독으로 일관해 깊이 있는 독서는 많지 않았다.
여유를 가지고 여러 분야를 섭렵하다 만난 책이 바로 <본삼국지>다. 어렸을 때 박종화 선생님의 <월탄삼국지>에 푹 빠졌던 터라 <삼국지>라면 우선 황건적이 어린 유비의 차를 빼앗는 것부터 떠올렸는데, 그게 실은 <미야모토 무사시>로 유명한 일본 작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가 일제 때인 1939년부터 43년까지 조성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에 일본 글로 연재한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배신감 같은 분노가 일었다.
그 무렵 <이문열 삼국지>를 대하게 되었다. 한 대학 수석입학생이 그 책을 읽고 논술시험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이 갑자기 화제가 되는 바람에 꼼꼼히 살펴보았으나 솔직히 실망뿐이었다. 작가 이문열 씨라면 그의 작품 <황제를 위하여>를 읽고 그 문체와 한문 실력에 경탄을 금치 못했는데, 그런 분이 어떻게 <삼국지>를 이처럼 무참하게 변형시켜 놓을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 후 <황석영 삼국지>를 접하게 되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장길산> 같은 역사적 대작을 쓰신 훌륭한 작가이지만 그 뒤로는 위작과 표절 등 여러 가지 논란에 휩싸였던 분이라 과연 <삼국지> 같은 어려운 옛 중국 기서를 제대로 옮길 수 있을까 의문을 품은 탓인지, 그 뒤에 쏟아지는 각종 소문과 평가들을 보고는 책에 대한 신뢰를 갖기 힘들었다.
그러다 한 신문에서 재중 작가 리동혁이라는 분이 대단한 공을 들여 <삼국지>를 정역해 펴냈다는 기사를 읽고 한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그 방대한 분량 때문에 미루다 이번에 책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그것도 인터넷서점의 할인행사를 틈타서,도서정가제에는 좀 미안하지만.
어떻든 처음부터 깜짝 놀랐다. 우선 중국에도 그토록 많은 판본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 많은 판본을 일일이 대조해 정본을 만들어낸 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 일은 상당한 규모를 갖춘 공공연구소에서나 가능한 일인데 혼자 그것을 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경의 마음마저 품고 찬찬히 읽어나갔는데, 역시 엄청난 공을 들인 흔적이 곳곳에서 배어나왔다. 서술의 구조와 문장에 상당한 짜임새가 있었다. <삼국지>가 원래 처음 시작할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해 맥을 잡기가 어지럽고, 역사적 사실을 너무 빨리 전개해 딱딱하기 마련인데, 그래도 정리를 잘해서 이해하기 쉽게 만든 것이 가장 큰 공이었다.
특히 작가가 중국의 옛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이 깊어서 본문에서 갖게 되는 의문점들을 상세히 설명해 놓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혹시 책을 읽어나가는 진도에 방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정역을 하자면 이런 정도의 친절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설명에 의하면 당시 중국에서는 실제로 차(茶)가 민간에 널리 보편화되지 않았다니 ‘황건적이 어린 유비의 차를 빼앗았다’는 내용은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또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에 모두 정연한 논리가 뒤따랐다. 한 나라의 재상에서부터 작은 성을 지키는 무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위치에 맞는 캐릭터가 뚜렷하고, 그 나름의 당위성에 설득력이 있었다. 아, 이래서 삼국지로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일일이 늘어놓기는 힘들지만 우리나라에 이런 삼국지가 있다는 게 자랑스러울 정도였다. ‘삼국지 중의 삼국지’라는 평이 과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삽화도 좋고 처음 소개되는 약도도 내용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