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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 1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37
르네 데카르트 외 지음 / 나남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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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사상과 교양이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했다는 평가에서 보듯이 데카르트의 주저 <제일철학에 대한 성찰>(이하 <성찰>로 옮김)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으로서 고전의 반열에 우뚝 선 작품이다. 그런데 너도 나도 주체의 죽음을 선포하는 지금에서부터 철학이 곧 데칸쇼로 치환되던 시절까지 단 한 번이라도 우리는 데카르트의 참 얼굴을 제대로 대면한 적이 있었던가? 원석영 선생의 기념비적인 노고 덕에 이번에 그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성찰>은 우리의 데카르트 이해가 피상적이었음을 고발하면서 철학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만든다.

 

 

  우선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완전한 모습의 <성찰>”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먼저 설명해야할 것 같다. 우리는 이미 이현복 선생의 <성찰>(이 번역본은 국내 최초의 라틴어 직역본인 기념비적인 작품이다)과 양진호 선생의 <성찰>, 두 개의 <성찰> 라틴어 원전 번역본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금번 원석영 선생의 번역을 통해 우리가 <성찰>의 완전한 모습을 보게 되었단 말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찰>의 출판 당시 구성과 편집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성찰>의 본문에 해당하는 전체 여섯 개의 성찰을 완성한 후 메르센을 포함한 주변인들에게 <성찰>의 본문을 보내서 <성찰>에 대한 비평을 요구하였다. 1641년의 초판본에서는 이 때 제기되었던 여섯 개의 <반론>과 데카르트의 <답변>이 본문과 함께 실렸고 1642년 재판본에는 초판에 더하여 한 개의 <반론>과 <답변>, 그리고 <디네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가  추가되었다. 오늘날 데카르트 전집의 표준으로 인정받는 아당과 타네리의 <데카르트 전집> 7권에는 재판의 방식을 따라 본문과 함께 <반론>과 <답변>이 함께 실려 있고, 캠브리지의 <성찰> 영역판과 펠릭스 마이너의 독역판에도 역시 <반론>과 <답변>이 불완전하게나마 함께 번역되어 있다. 원석영 선생이 내놓은 <성찰>은 본문이 아닌 <반론>과 <답변>의 번역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제야 우리는 데카르트가 편찬했던 <성찰>의 전부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찰>의 본문에 <반론>과 <답변>이 따라다닌다는 것으로, 혹은 이들을 함께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만으로 <반론>과 <답변>을 통해 <성찰>을 온전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성찰>의 온전한 얼굴과 드디어 대면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압축적으로 써진 <성찰>의 문구들을 훨씬 더 풍성하게 읽어내기 위해서는 <성찰>을 둘러싼 논쟁의 바다에 모든 지성을 던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 <반론>과 <답변>은 양적으로 풍부한 논쟁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심오한 깊이를 품고 있다.

 

 

  이 점은 <반론>과 <답변>을 작성했던 저자들의 면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확인 가능하다. 데카르트는 <반론>과 <답변>을 통해 한 편으로 홉스와 가상디 같은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유물론자들과 논쟁을 펼쳤고 다른 한 편으로 카테루스와 메르센 같은 당대의 저명한 스콜라 철학자들과 논쟁을 펼친다. 이는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중세 후기와 근대 초기 사이의 지적 긴장을 원전을 통해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고, 또한 이원론자인 데카르트와 유물론자들의 대결을 통해 심신 문제를 둘러싼 프랑스 형이상학의 전통이 확립되는 지점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이상에서와 같은 역사적 중요성을 차치하더라도 <반론>과 <답변>에 펼쳐지는 형이상학적 논변들은 그 자체로 너무나 근원적인 문제들을 담고 있다. 따라서 하나하나의 논박들과 <성찰>의 본문을 꼼꼼히 읽어나갈 때 우리는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카테루스, 메르센과 데카르트는 ‘신 존재 논증’에 대한 논박을 진행하면서 "신, 완전성, 있음과 없음"과 같은 전통 형이상학적인 논쟁을 치열하게 펼쳐나가는데이 과정에서 생각하는 나의 한계, 신 관념의 타자성과 같은 -코기토로 대변되는 데카르트의 주장 속에서 놓치기 쉬운- 생각들이 비교적 명시적으로 표현된다.

 

 

  홉스와 데카르트의 논박에서는 생각이라는 활동과 여타 다른 물리적 활동들을 대비하면서 생각의 기저에 있는 ‘생각하는 것(res cogitans)’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중에 ‘것’(res), 즉 존재자에 대한 상이한 입장차를 드러내는데 우리는 이 과정에서 물질과 정신에 대한 철학적 논변들이 다름 아닌 ‘생각과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문제의 한 표현’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생각이라는 활동성의 성격에 대한 상이한 규정에 따라 ‘나’의 존재론적 의미 또한 상이하게 바뀌는데, 이 논증들을 제대로 읽을 때라야 존재의 근거로서의 생각하는 ‘나’, 즉 코기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데카르트 자신이 성찰을 통해 해명하고자 했던 두 자기 주제- ‘신 존재 증명’ 과 ‘물질과 정신의 상이성’ -가 근대적 주체성의 발견인 코기토와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니라 함께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문제들임을 확인하게 해주고, 또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이해되던 코기토가 전통 형이상학의 계승과 불연속성을 모두 담고 있음을 고스란히 알게 해준다.

 

 

  그러나 짧은 서평에서 모든 것을 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방대한 이 책이 가치를 갖는 까닭은 그것이 데카르트의 주저이기 때문에도, 또 심오한 철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무엇보다 치열한 논쟁의 과정을 통해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제공해주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소중한 덕목이다. 데카르트는 「반론」에 대한 자신의 글이 해답이 아닌 「답변」으로 간주되기를 희망하였고, 강한 논쟁의 과정에서 진리가 드러날 것이라고 확신했다.(메르센에게 쓴 편지) 데카르트의 <성찰> 전체는 진리를 향한 하나의 거대한 , 변증법적 여정, 즉 대화(dialetik)인 것이다. 주체의 죽음을 선포하면서도 그 본원인 데카르트를 가벼이 읽고 해체조차 하지 않는 현대의 철학자들, 최신의 철학자들의 글을 읽고 요약하는 것이 마치 철학인 양 착각하는 몇몇 ‘인문학자’들, 그리고 장 뤽 마리옹과 같은 현대의 데카르트 연구가를 먼저 읽는 것만이 데카르트를 연구하는 길이라 착각하는 연구가들에게 데카르트의 논박은 근원적 문제에 대한 치열하지만 우스꽝스러운 논쟁의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방법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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