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겨진 눈 아래에 - 브릿G 단편 프로젝트
정도경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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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리뷰에는 도서에 수록된 작품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공주들의 이야기 중에서 하나를 꼽으라고 할 때면 <인어공주>를 먼저 떠올립니다. 비극적인 결말,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등 여러 가지 키워드가 있지만 무엇보다 작중 인어공주의 행동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고 그로 인해 많은 해석의 여지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때문일까요  <인어공주>를 떠올리면 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보다 바닷속 즐거웠던 한때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더욱 즐겁고, 왕자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뭍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을 인어를 그려보기도 해요.


브릿G의 단편집 [감겨진 눈 아래에]를 읽는 동안에도 저는 계속 인어공주를 떠올렸습니다.



표제작인 <감겨진 눈 아래에>는 더할 나위 없이 명징한 디스토피아 작품이어서 끝까지 읽는 데에 많은 호흡이 필요했어요. 가끔 남초 커뮤니티에서 볼 수 있는 주장들의 많은 부분을 옮겨놓으면 해당 작품과 비슷해지는 부분이 많아서 읽는 내내 참담한 마음뿐이었습니다. 

해당 작품을 읽어보신 다른 분들도 비슷한 생각이셨을 거예요. 가임기 지도, 부모가 원래 한국 국적이었으면 한국인인거지, 많이 배운 여자는 까다로워서 별로, 군대 안 가는 대신 의무적으로 임신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등등... 인터넷 게시판의 찌끄레기-라고 부르고 싶지만 찌끄레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다수의 의견인 이야기들이요. 더욱이 일부 설정이 극단적인 것뿐 베이스에 깔린 정서는 현대 한국 그 자체라서 더욱 고통스러웠어요.

책 뒤표지의 문구처럼 '혹독한 가부장적 세계의 속박 속에서 자유를 갈망한' 여성들의 이야기로 마무리되었지만 작중에서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고, 현실세계에서도 끝나지 않은 '불편한 이야기'였어요.

한국 땅을 밟고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충격을 받고 불편해하고 디스토피아의 탈을 쓴 현실 그 자체임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을거예요. 작품집에서 가장 읽기 어려운 글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여성혐오에 대해 노골적으로 토로하는 작품을 찾기가 쉽지는 않은 만큼 표제작으로 선택된 것도 당연해보였어요.


괴물은 죽인 남자는 영웅으로 대접받지만 괴물을 죽인 여자는 괴물로 취급받는다. <p.43>

<황금비파>는 물 밑에 사는 여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물 밑에서 살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녀들은 뭍에서 고통을 받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혹은 타살당했으나 물 밑에서도 무한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오르페우스처럼 단숨에 호수의 왕을 사로잡는 연주를 하여 원하는 보상을 단숨에 얻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혹은 잠든 괴물의 목을 한칼에 내려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원해서 들어온 물 밑이 아님에도 그녀들이 헤쳐나가야 할 시련이 너무나도 많아 읽는 내내 조바심을 감추기가 어려웠습니다. 


걔는 선녀가 아니고, 그냥 어린애야. <p.63>

<망선요>는 본 작품집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이었습니다. 초이도, 지영이도, 과거의 허난설헌도 이름이 있는 세계에서 이름을 가지지 못한 어머니와 딸. 

어머니의 저주가 딸에게 그대로 대물림 되어 딸이 겪은 이야기가 정말 딸의 이야기일지, 혹은 어머니도 겪은 이야기일지, 혹은 초이의 이야기일지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는 현실 그 자체였어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저주를 받은 것은 과연 한 명의 인어뿐이었을까요?

누군가가 가보지 못한 신선세계를 그리워할 때 또 누군가는 지옥 같은 검은 물 밑을 떠올리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도 이런 치사한 방법을 쓸 수만 있다면.
그러면 모든 것이 바뀌지 않을까. <p.99>

이산화 작가님의 작품은 항상 작가님 만큼의 희귀 생태계(은서 생물 포함)를 잘 알고 있는 채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줌 먼지 속>의 칙술룹이 그러했듯 <아마존 몰리>는 사실 제목부터가 노골적인 스포일러였거든요.

다리를 가진 인어에게는 왕자가 반드시 필요했을까?를 여러 번 떠올려봐도 꼭 물거품이 될 필요는 없었을 거예요. 인어공주는 바닷속에서 체득한 많은 지식이 있는걸요.


이대로 엄마를 내버려 두면 산 채로 죽어 버릴지도 모르는데도, 엄마가 엄마가 아니게 돼 버리기보다 차라리 엄마인채로 죽어 버리면. <p.129>

<망선요>와 비슷하게 <폐선로의 명숙 씨>도 어찌보면 모녀간의 대물림 된 저주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다만 <망선요>가 세상을 사는 동안 어머니가 체득한 불행이 그대로 딸에게 미끄러져 내려간 이야기라면 <폐선로의 명숙 씨>는 그 저주를 끊기 위해 애쓰는 모녀의 이야기였어요.

고통을 준 사람은 너무 쉽게 가고 또 아무렇지 않게 많은 것을 남기지만 남은 피해자들이 헤쳐나가야 할 길은 폐선로의 터널보다 더 길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살아있기에 강이 모녀가 앞으로 더 많이 많이 행복해졌으면 합니다.

한 번 떠난 용궁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지낼 용궁이 결코 좋은 곳만은 아니라는 걸 한국에서 나고 자란 딸들은 너무 잘 알고 있잖아요.


"(전략) 그것이 지옥으로 향하기 전, 저의 마지막 추억인 것입니다." <p.159>

여성 망나니로 꾸준히 차별적인 언사를 들으면서도 이에 대해 크게 마음이 흔들려본 적 없던 비르길리아. 그녀는 폭력을 참다못해 남편을 죽인 귀족 부인의 목을 베며 처음으로 자신의 '신성'과 '정당'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세 번에 걸쳐 고통스럽게 죽여달라 호들갑을 떠는 남자의 모습에서 생생함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새로운 뭍의 세계를 알게 되었으니 이후 더더욱 넓은 세계를 보게 될 인어의 이야기였어요.


너는 나를 볼 수 있을까. 나의 목소리를 듣고 나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p.201>

<애귀>는 목소리를 잃은 인어가 다시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과도 같은 이야기예요.

사람을 믿고 사랑을 믿고 그 모든 것에 배신당하면서도 다시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거든요.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지는 가정이라는 형태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인 입장이지만 이렇게 좋은 작품을 읽을 때에는 작품에서 느껴지는 혈육의 정에 이입을 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특히 사진만으로도 강웨이를 알아본 연주와 달리 '너'는 그러지 못했던 장면에서 많은 감정을 느꼈습니다.




최근에는 여성 서사 작품을 읽으면서 여자들만 많이 나온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지만, 브릿G에서도 여성 서사 작품집이라고 이름을 붙여 출간한 만큼 한 권 내내 여성들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제 상상속의 인어공주도 거품이 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도ㅡ뭍에서도 물에서도ㅡ힘차게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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