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고속버스를 탔다. 표를 끊을 때 "혼자 앉는 자리를 주세요." 분명히 말한 다음 스스로 대견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잊어버리지 않고 말했어.
"네. 한 분이시죠?"라는 말이 돌아왔다. "네. 한 사람이요." 대답하고서, 돈을 내밀고 표를 받아 주머니에 넣고 아침으로 토스트를 사서 티비 앞에 앉아 생각했다. 토스트가 참 맛있네. 짐 싸느라 잠도 설치고 해서 입 안이 까끌거렸는데 빵이 이렇게 잘 넘어갈 줄이야. 난 빵보단 밥이 좋은 사람인데. 다 먹으면 하나 더 사먹을까. 그런데 내 표는 제대로 혼자 앉는 자리로 끊은 게 맞을까? '네. 한 분이시죠'의 '네'는 혼자 앉는 자리를 주라는 요청에 대한 긍정이었을 거야. 분명히.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못 듣고 '혼자 뭐 뭐 뭐 주세요' 이런 식으로 들었다면? 그걸 한 사람 표라는 걸로 듣고서 '한 사람 표요? 네. 한 분 맞으시죠?' 의 뜻으로 말한 거였으면 어쩌지.
불안해서 타야 할 버스가 오자마자 달려가 내 자리를 찾았다. 혼자 앉는 자리였다. 그런데 내 앞자리 좌석이 미리부터 내 쪽으로 꽤 많이 젖혀져 있었다. 앞자리의 주인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좌석은 한 번 앞으로 당겨졌다가 처음보다 훨씬 많이 내려왔다. 좀 어릴 땐 그런 일이 불쾌하게 느껴졌지만 지금 와선 어차피 그러라고 만든 기능인데 뭘. 상관 없지, 기억 속의 어린 나를 달래는 듯한, 겨우 그런 일로 어른인 체 하는 나다.
앞자리의 주인은 의자를 꽤 많이 움직였다. 처음엔 꽤 많이 기울이기에 잘 모양이다 싶었는데 의자 기울기를 계속해서 조절해댔다. 앞 뒤로 움직여대면서 안락의자에 앉은 기분을 내볼 셈일까. 그보다 난 도중에 있던 시골길에서 수천마리의 까마귀 떼를 보고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가로등 전선을 따라 빼곡히 줄을 맞춰 앉거나 지금 계절엔 비어있어 뭘 심었던 곳인지 모를 밭에서 이 쪽을 구경하듯이 쳐다보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사실은 그게 까마귀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동물농장에 나올 만한 사람도 아니니. 그렇게 온 몸이 새까만 걸 보면 사실 까마귀가 아니래도 까마귀라 부르는 게 꼭 지적 받을 일은 아닐 것 같다. 앞자리 사람은 계속해서 의자를 움직여대고 있었다. 종종 힐끔 뒤돌아보기도 했다. 나를 신경 쓰느라 편하게 쭉 눕혀버리지도 못하고 불편하니 너무 세우지도 못하고 왔다갔다 하는 중이었다. 나는 신경 쓸 필요 없으니 그냥 끝까지 눕혀버려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낯선 사람에게 그러는 건 오히려 쑥스럽고 이상한 일처럼 느껴진다. 대신 텔레파시로 그런 내 의사를 전해 봤지만 아무래도 전혀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텔레파시 수련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
사실 뒤에 앉은 나는 아랑곳 않고 망설임 없이 끝까지 의자를 눕혀버린 채 목적지까지 갔다면 조금 기분이 나빴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이 쪽을 신경 써주니 오히려 내가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이 된다. 내가 앞 사람보다 훨씬 연장자거나 어린 아이라면 그런 말 정도는 쉽게 건넬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어린 시절의 나라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서로 너무 조심하다보니, 혹은 이상한 사람에게 말려들 위험을 아예 배제하기 위해 낯선 이의 접근을 아예 차단하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에게 건넨 말이 무시당하는 민망한 경험을 하지 않기 위해 아예 말을 건네지 않는 사람들이 겹치고 겹쳐져있다 보니 낯선 사람에게는 목적 없는 말 한마디 꺼내기가 참 힘들다. 결국 의자는 애매한 위치에 머물렀고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또 그런 까마귀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도착해서 집까지 지하철을 타고 왔다. 아침에 고속 터미널로 갈 때는 택시를 탔었는데 기사분이 소녀시대 팬이신지 내릴 때까지 소녀시대 노래만 연달아 대여섯 곡을 들었다. 나도 좋아하는 노래들이라 사실 꽤 좋았고 자리도 안락했는데, 지하철은 딱 죽지 않을 만큼 붐볐다. 적어도 소녀시대 노래를 들으면 아침의 택시 안에서와 반 정도는 비슷해질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이어폰을 꺼낼 만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 달 만에 보는 자취방이 반가웠다. 반납을 깜빡하고 두고 갔던 책들 역시 그대로였다. 내가 반납하지 않으면, 영원히 반납되지 않겠지. 스스로 반납될 행동력도, 도서관까지 갈 근성도 자동 반납 기계에 몸을 던질 용기도 없는 녀석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것들이다. 내일은 아침 일찍 가서 책을 반납하고 오는 길에 장을 봐와야겠다. 그리고 아침은 토스트가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