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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림과 울림 - 물리학자 김상욱이 바라본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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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나는 수학과 과학에서 까먹은 점수를 국어와 외국어로 만회하는 전형적인 문과형 인간이었다. 문과형 인간은 보통 어떤 책이 과학 도서로 분류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책을 펼쳐 들기를 주저하게 된다. 그러니 이 책도 만약 계약직 연구원으로 독일에 도착한 첫날, 숙소가 어둡다는 것을 깨달았다라는 말랑말랑한 문장으로 시작하지 않았다면 첫 장을 펴자마자 다시 덮었을 공산이 크다.


첫 문장에서부터 느껴지듯이 저자는 이 책의 독자들이 물리학이라는 분야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서 최대한 부드럽게 써나가고 있다. 질량을 에너지계의 아이돌이라고 말하고, 쌍생성 과정을 마이너스 통장의 원리에 비유하는 등 거의 모든 물리적 개념을 일반인에게 친숙한 표현으로 바꾸어 설명한다. 간혹 어려운 이론에 맞닥뜨려 계속 읽어나갈 자신이 없어질 만하면 양념 반, 프라이드 반같은 이야기로 다독이는 식이다. 이러한 노력은 목차에도 적용된다. 각 장에서는 양자역학’, ‘응집물리등 이름만 들어도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개념을 다루지만, 각각 우리는 믿는 것을 본다’, ‘우선은 만나야 한다는 식으로 간결하면서도 요점을 짚은 소제목을 붙여 문턱을 낮추고 있다.


이렇듯 최대한 쉽게 썼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라면, 또 다른 장점은 너무 쉽게만 쓰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책을 읽으면서 수도 없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상태를 체험할 수 있었다. 분명 모르는 단어가 하나도 없는 짧은 문장인데 도저히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자꾸 나오면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물론 저자는 이러한 상황 또한 충분히 예상하고 대가들의 말을 인용해 독자를 위로한다. 닐스 보어는 이쯤에서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으면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으며, 리처드 파인먼은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단언했단다. 전공자들도 이해 못 한다는 말을 듣고 나면 한결 편한 마음으로 읽어나갈 수 있다. 또 적당한 자괴감은 향상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요즘 유행하는 에세이들이 힘들여 씹지 않아도 술술 넘어가는 푸딩이라면, 이 책은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라고나 할까. 웰던만큼 힘들여 씹을 필요는 없지만, 내 힘으로 조금씩 꼭꼭 씹어 삼키면 그 노력에 상응하는 풍미와 포만감을 맛볼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내용이 어려워 보여서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각 장 사이에 두세 꼭지씩 들어가는 <더하는 글>부터 읽어보길 권한다. 과학적 소재를 다룬 책이나 영화에 관해 가벼운 톤으로 말하고 있는 에세이라서 과학 도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없애고 내 안에 잠들어있는 우주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안성맞춤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글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성의와 정성이다. 그야말로 물리를 1도 모르는독자에게 물리학이 결코 현실과 괴리된 학문이 아니라고,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라고 역설하는 저자의 모습은 마치 수학이 어려워서 포기하려는 중학생에게 사칙연산부터 다시 짚어주는 자상한 선생님 같다. 책 처음부터 끝까지 성심성의껏 물리학의 원리를 새겨주는 저자의 피땀 어린 노력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자신 있게 말하건대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설명하는 물리적 개념과 이론을 10%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이 독서가 의미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 시어머니와 며느리처럼 어쩌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라 할지라도 각자가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저자는 독자를 이해시키고자 노력했고, 독자는 (비록 결과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면 그것은 상호 간에 충분히 의미 있는 접촉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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