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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사랑에 살다
최정미 지음 / 유레카엠앤비(단행본)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무척이나 가슴벅차고 손꼽아 기다려지는 수업 시간이 있었다. 바로 국사를 맡으셨던 이은숙 선생님의 수업시간이었다. 역사과목은 정확히 몇살인지도 기억이 안나는 어린 시절부터 사극 시청에 재미를 붙이면서 늘 애정해왔지만, 이은숙 선생님의 수업을 만나면서 이제까지 배워왔던 것과는 사뭇 다른 해석에 의한 역사 내가 바라는 역사를 배운다는 느낌이 나를 흥분케했다. 그리고 그것은 근/현대사 과목을 통해 만나뵐 수 있었던 홍예경 선생님과의 시간을 통해 더욱 다져졌다.
선생님의 수업은 언제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흥미진진했지만 그 중 5년여가 흐른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기억나는 몇가지 사건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숙종의 여자이자 경종의 어머니 희빈장씨의 이야기이다.
2002년 당시에 방영했던 장희빈은 준비에 한창 열을 올릴 무렵이 드문드문 몇 장면만을 스쳐지나며 본 것이 전부이기에 별다른 기억이 없지만, 아주 어린시절 엄마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봤던 정선경/김원희 주연의 장희빈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임팩트가 강했던 몇 장면을 떠올려 보자면 사약을 먹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온갖 악담을 퍼붓던 독기서린 그녀의 모습과, 인현왕후의 죽음을 재촉하기 위해 그녀의 초상화에 활 시위를 겨누며 굿을 하던 모습 등이다. 그리고 장희빈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이런 모습이 만들어 낸 이미지로써 그녀를 인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극의 가장 흥미로운 소재였던 그녀는 언제나 이런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선생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역사 속 여성들 중 명성황후 다음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실 역사 속 왕들이 수많은 비빈들을 거느릴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시 된 나머지 한 여인을 사랑하다 애정이 식어 다른 여인에게 옮겨가고 하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여졌고, 그 과정 속에서 투기를 일삼는 비빈은 쳐죽여 마땅한 악처로 묘사되어왔다. 사실은 남자나 여자나 1처 1부로서 서로의 반려를 존중하고, 나의 정인을 다른이에게 뺏길 때 치솟는 질투심과 분노는 성별과 인종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같은 감정일진데 말이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숙종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현존했던 당대는 붕당정치의 패도가 극에 달했던 시절로써, 선대왕 태종이나 세조시절과 같은 절대왕권을 이상으로 꿈꾸었던 숙종에게는 현실의 이러한 장벽들이 언제나 큰 고민거리였다. 그러한 조류 속에서 아귀다툼이 가장 치열했던 파벌은 바로 남인과 서인정권이었다. 이들은 훗날 희빈장씨(남인)와 인현왕후(서인)를 내세워 왕의 애정을 독식하고 서로의 이권을 쟁탈하는데 더욱 혈안이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숙종이 택했던 것은 총애하는 여인을 통한 각 파벌의 숙청 및 등용으로써의 권력 배분이었다. 남인 세력이 커진다 싶을땐 인현왕후를 필두로 하는 서인에게, 다시 그 세력에게 너무 많은 것이 주어졌다 싶을 때면 장희빈을 필두로 하는 남인 세력에게 시선을 주며 자신이 바라는 정치 환경을 조성해 나갔던 것이다. 그는 이토록 야심이 강한 사내였다고 한다.
문득 위와 같은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다보니 이제껏 인현왕후는 악첩에게 핍박받으며 자신의 수모를 감내해 온 온화한 여인상. 그리고 희빈 장씨는 언제나 자신의 탐욕과 권세를 위해 왕을 쥐락펴락한 희대의 팜므파탈로 그려지며 매도당한 기존의 평가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아마도 그것은 아직까지도 이 시대에 만연한 가부장제의 사회문화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왜곡된 결과물이었음에 분명하다.
이번 <장희빈 사랑에살다>라는 책은 내가 선생님께 들었던 그런 그녀에 대한 모습을 적나라하고도 감수성넘치게 그려낸 책이라, 다시 5년 전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선생님의 열강을 듣는 기분으로 푹 빠져들어 탐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삼 그녀의 안타까운 사랑을 동정하게 되었다.
단지 뜨겁게 사랑했을 뿐인데..
그리고 그 대상이 한 나라의 왕이었을 뿐인데..
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깊은 한숨이 되어 허공에서 흩어졌다.
후반부의 마지막 장면이 기억난다. 그녀는 투기를 주된 요인으로 하여, 빈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물어 사약을 먹고 자진하라는 왕의 비망기가 수차례 내려져도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하며, 끝끝내 외면해왔지만 결국 자신이 배아파 낳은 아들보다 더 사랑했던 정인(숙종)이 "나를 위해 죽어다오"라는 진심어리고도 아무런 감정의 잔흔이 남아있지 않은 말 한 마디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부분이다.
나는 아마 이 대목에서 통탄어린 비망기를 외면하던
그녀의 모습만큼 끝끝내 참아왔던 눈물을 왈칵 터뜨린 것 같다.
사랑에 살고
사랑에 웃었으며
사랑에 생을 마감했던 그녀를 위해
이제라도 이런 책이 출간되었으니, 부디 그 슬픈 혼을 조금이나마 위로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이 서평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식민주의 사관에 의해 왕을 능멸하고 조국을 우롱했던 악녀로 그려진 명성황후의 넋이 이제껏 쌓여온 우리의 오해를 씻어내고자 하는 일말의 의도로 제작된 공연 <명성황후> 무대에 나타나 배우진을 놀라게 했다는 미스테리 일화가 생각났다.
이 책을 통해
왜곡되어진 우리의 역사관 속에 갇혀 신음하던 수 많은 그녀들이
모두 자유로워졌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