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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침대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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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위험한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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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핑거
김윤영 지음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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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을 샀어
조경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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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감한 선배가 정체불명의 시 계간지를 내는 출판사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때 선배가 얼마나 사납고 무례한 인간이었는지를 나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출판사 건물 지하다방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내게 완전한 무관심을 나타냈다. 내게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그는 세상 어떤 일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과거와 연루된 일일 경우 더욱 냉랭했다.
 "돌아보면 잡히는 게 없어, 잡히는 게"
 만나는 내내 선배는 이 말만 맥빠지게 되풀이했고 헤어질 무렵엔 나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완전한 결별의 뉘앙스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때 그도 스물아홉의 가을을 지나고 있었다. 

 선배와 나는 서로 갈라서야 할 횡단보도 앞 포도에 잠시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게 문득 공포스러워."
 "어떨 때 그래요?"
 선배는 멀뚱이 날 바라보았다.
 "어떨 때가 따로 있는 게 아냐. 내 삶의 스타일, 그 기질 자체가 두렵게 느껴지는 거야. 내 인생이 언제 결정났나, 뭐가 기결이고 뭐가 가결인가, 그런 게 알고 싶어져서 며칠 전에 A4 일곱장 정도로 정라를 해봤는데 아주 일찍 결정놨다는 결론이야. 대학 들어와서 결정된 게 아니더라고. 고등학교 때도 아니고 중학교 때도 아니야. 내가 생각이란 걸 하게 되면서부터 이미 결정이 나있었던 거야.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더 올라가면 수태되던 그 순간부터. 태초에 기질이 있었던 거지."
 "운명론자 철수네요."
 선배는 흐응, 코웃음을 치며 담배를 비벼 껐다.
 "그만 찢어지자. 너무 하염없다."

 마지막 시집을 꽂으면서 문득 나는 나 자신이 부도덕하고 느꼈다. 그 느낌은 선배가 자신의 기질 자체가 공포스럽게 느껴진다고 하던 때의 느낌과 비슷할지도 몰랐다. 순간 툭 하고 뭔가 나를 치고 지나갔다. 아니 내가 그것을 툭 쳤는지도 모른다. 곪은 부위처럼 민감한 그것, 오래 전에 단념했다고 믿었던 그것, 그러나 어느 틈에 농익은 진물을 흘리는 그것, 입안에 다소 끈끈하고 신 침을 고이게 하고 미간을 오그라들게 하는 그것, 툭 건드려진 뒤부터 움찔움찔 움직이며 몸을 비트는 그것. 나는 책장의 흰 가로장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울면서, 내가 내 뒤통수를 내려찍는 이런 상쾌함이 없다면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무엇이겠는가, 생각했다.

- 『분홍 리본의 시절』, 황해문화, 2005년 봄호

 베갯잇에 닿은 뺨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처음엔 자신이 울다 깬 줄 알고 말랑한 슬픔의 잔여를 즐기려 했다. 배갯잇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고서야 그녀는 꽉 다문 자신의 입에서 진하고 독한 침이 흘렀음을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눈물 대신 침을 흘리는 여자라니, 입맛이 썼다. 게다가 악물린 그녀의 양 입귀에서 새어나와 베갯잇을 적신 침은 참으로 역한 냄새를 풍겼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베개에 닿았던 오른뺨을 쓸어내렸다. 이제부터 이것이 내가 사랑을 생각하는 하나의 포즈가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니 우울함이 조금 가시는 듯도 했다. 흉터를 만지듯 오른뺨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일, 살이 모조리 썩고도 껍데기만은 굳게 닫혀 껍데기 양 귀로 부글부글 독을 괴어올리는 조개의 액 같은 이 역한 침자국을 천천히 닦아내는 일, 그것이 바로 내가 내용은 사라졌으되 형식은 의연한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포즈가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니 그녀는 갑자기 기운이 부쩍 났다.

- 『위험한 산책』,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좀처럼 음식을 남기지 않은 그녀가 오직 손대지 않은 것은 미끌미끌한 미역국이나 미역초무침뿐이었다. 미역 건더기의 느낌은 흔히 딸의 행위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어머니들이 딸에게 던지곤 하는, 미끈거리고 천덩거리는 바로 그 눈빛의 질감이었다. 딸의 약점을 놓치지 않는 빈틈없는 어머니란 딸에게 얼마나 크나큰 재앙인가.

 그녀에게는 애초부터 우아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가장 불만스러웠던 점도 어쩌면 그것이었는지 모른다. 여성적 우아는 세상에 대한 진정한 초연함에서 오는 법. 남성들이 짐짓 취하는 초연한 자세는 언제나 가장된 것이란다. 남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과 연루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니까. 그러나 여자들은, 특히 우리네 우아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세상을 빼앗긴 대신 세상으로부터의 초연함을 얻었단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진정으로 초연할 수 있는 우아함이야말로 여성의 표정이니, 그런데 이런, 어머니가 봄에 우아하지 않은 그녀는 꿩도 매도 다 놓친, 세상도 초연함도 다 잃은, 열등하고 미달된 여성일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어머니는 그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가. 철이 들고부터 그녀가 수백, 수천 번 곱씹었던 의문이었다. 답은 아니다였다. 그녀는 태어나기 직전에 사고로 아버지를 잃어 유복자라는 슬픈 명명까지 받은 바 있는, 어머니의 친딸이자 외동딸이었다. 어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계속 궁금했고 아직도 궁금한 것이다. 사람들은 어찌 감히 사랑 같은 것을 갈망할 수 있는가. 모녀간에마저도 피할 수 없었던 저 사랑을 망치는 사랑을, 사랑이라는 베일 뒤에 가려진 저 살아 꿈틀거리는 해초의 흡반을, 뜨거운 용액이 목구멍에 들이부어지는 저 우아하기 짝이 없는 고문을.

 앎이나 깨달음은 늘 그렇게, 한발짝 늦게 그녀를 찾아왔다. 똑같은 거리가 등하교 때마다 오분가량 차이나듯, 그녀가 아무리 아등바등 따라잡으려 해도 삶과 그녀의 박자도 그렇게 어긋났다.

  아등바둥 발버둥쳐봐야 어차피 늦었다. 그녀는 또한번 제대로 버려졌고 그리하여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았다. 황금이 녹아 끊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 내부를 불지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지옥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그지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 『가을이 오면』, 문예중앙, 2005년 겨울호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대학 졸업을 앞둔 가을 즈음부터였을 것이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 점점 힘들다는 걸 느꼈다. 그들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고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하거나 최소한의 사교적인 대응을 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후 취업이나 결혼 대신 대학원에 진학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니 그녀가 억지로 낯설고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걸 하던 대로 지속하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러나 대학원을 수료하고 주위를 돌아본 그녀는 예전엔 비교적 가깝다고 생각했던 동년배나 선후배 들이 그녀와 아무 관계도 맺지 않고 완벽한 혼자만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환상적 복수에 죄 없는 가정부 여자를 동원했다는 가책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여우들은 영험하게도 죽을 때를 찾아든다는 말을 김교수네 가정부 여자가 해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밤새 축축한 잔디밭에 누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그 말을 해준 사람이 여전히 가정부 여자인 것으로만 여겼다. 그리고 여우들이 영험한 것은 죽을 데, 죽을 자리를 찾아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 죽을 타임을 찾아드는 데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 자신 속의 영험한 무엇이, 그 말이 발설된 기원의 장소로, 아니 그 말이 발설된 최초의 시간으로 그녀를 이끌어와 보란 듯이 끝장을 내준 것만 같았다.
 
 어느 러시아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서 죽은 자들이 죽은 후에도 얼마간 삶을 지속한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펴고 있었다. 그 작가에 따르면 육체적 생명이 끊어진 후에도 정신적 생명은 마치 자신의 관성을 쉽게 그만두기 아쉽다는 듯 여분의 삶을 산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무덤 속에 거의 완전히 부패된 시체가 있다고 하자. 육체는 썩었어도 죽은 자의 의식은 몇주일이나 몇달에 한번씩 깨어나 갑작스레 무슨 말인가를 내뱉는다는 것이다. 귀를 기울려보면 콩알이란 의미인지 뭐라는 의미인지 보보끄, 보보보끄라고 하는데, 물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었다.
 상욱은 이 대목을 여러번 반복해 읽다 완전히 중독되고 말았다. 삶 너머에 있는, 아니 어쩌면 삶 내부에도 있을지 모를 그런 처절한 무의미의 빈터를 보보끄라고 부를 수 있다면, 상욱은 자신의 보보끄는 과연 무엇일지 궁금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보보끄를 알기 위해 지루한 삶을 끝까지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천택은 날로 변덕스럽고 가혹해지는 촌장의 지배 아래 사는 마을 아낙처럼 전전긍긍했다. 같은 행위가 같은 처벌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불확실성만큼 그녀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약콩을 달여 새벽 공복에 김교수에게 마시게 하는 걸로 위안을 삼았다. 머리꼭지까지 치솟는 심화를 가라앉히는 데는 약콩이 특효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에전에 시골에서 발정난 돼지에게 일명 쥐눈이콩이라 불리는 약콩을 사료에 갈아넣어 먹이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사내들이사 그저 못생긴 짐승이거니 보듬어야 쓰제. 하나하나 대거리할 생각 말고. 말로다가만 아니라 맴으로다가도 대거리할 생각 말고. 그 무던도 못할 시엔 으째 여자 몸땡이로 남의 집 일을 댕기겄나. 까탈맞어도 못쓰고 주책맞어도 못쓰고, 혀도 못쓰고 꺼머도 못쓰고. 쩍하면 천하에 몹쓸 기집 소리, 밥 안 먹어도 배 부른게, 두레반으로 배 부른게."

- 『약콩이 끊은 동안』, 문학동네, 2006년 여름호

 어느날 아침 문득 골똘해져 수십년 전 어떤 친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나 행위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발견하고 불현듯 떨치고 일어나 결투의 편지를 써 보내는 늙은 신사처럼 내 결투신청에도 다소 우스꽝스러운 대목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모욕이 즉각 교환되지 못하고 시간의 회로 속에서 길을 잃는 수도 있으니 아무리 늦어도 절박한 때가 적절한 때이다. 결투란 모욕이 가해진 싯점이 아니라 모욕을 느낀 싯점에서 신청되는 것이니.

 N은 나와 대학 사년, 회사생활 사년을 함께하면서 거의 매일 점심을 같이 먹어온 친구이자 동료였지만 이제 와서는 왠지 선뜻 친하다고 말하기가 꺼려지는 면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 눈에 매우 절친해 보이고 본인들도 그렇다고 믿지만 어느 순간 시간이 그들을 떼어놓아쓸 때 다시는 영영 화합하지 못하게 되는 사이가 있다. 다시는 영영 같은 비극적인 뉘앙스조차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이, 어느 쪽에서도 먼저 만나자는 약속 전화를 하지 않고 죽게 되는 사이 말이다.
 결국 이렇게 흐르고 만다. 관계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나는 언제나 죽음을 전제하게 된다. 관계와 죽음이 언제부터 내 머릿속에 한쌍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버릇임엔 틀림없다. 관계의 끝만을 생각하다보면 누구와도 진심으로 사귀기 어렵다. 그래, 네가 어떻게 되나 지켜보자, 네 끝이 어떨지 두고보자는 식의 시선은 그 독으로 대상을 말라죽게 만든다.

 N은 내게 무심했고 나는 N을 경멸했지만 우리의 관계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어느 순간 갈라졌고 나뉜 가지처럼 N과 나는 서로를 닮지 않으려 애썼다. 가끔 나는 N과의 오랜 관계에 대해 내가 심각하게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문제는 내 쪽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투를 위한 손수건은 던져졌다. 나는 산란기 연어처럼 모욕이 발아하던 그 싯점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자신감과 활기로 펄떡거리는 모든 것들이 혐오스러워지는 때가 있다. 그때는 모름지기 은거하여 나 외에 혐오할 것을 남겨두지 않는 게 좋다. 대상에 대한 혐오 속에는 자신과의 유사성이 깃들어 있다. 닮았기에 싫은 것이다. 모르는 것은 미워할 수조차 없다.

 한덩어리의 반죽으로 두 형상을 빚을 때 하나의 형상을 작게 만들면 다른 형상이 커지듯 N의 거식증이 심해질수록 내 대식증도 심해졌다. 어느날 N이 눈이 휘둥그렇게 뜨고 뾰족하게 기른 핏빛 손톱으로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심하다!"
 그때 손수선을 던졌어야 했다. 뒷자리의 남학생처럼 부주의하게 내 몸을 건드린 데 대해서가 아니라 세자리 숫자의 그 버스를 타고 강변으로 가 수제비처럼 나를 조금씩 떼어내 강으로 던진 열흘에 대해서, 너 아프잖아 너 아프잖아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목 놓아 울던 최후의 애도에 대해서.

 결투용 검처럼 열 손톱이 화려하고 날카롭게 벼려지면 나는 노선 끝이 갈고리 모양으로 휜 세자리 숫자의 그 버스를 타고 강변으로 갈 것이다. 강변에서 힘든 결투를 끝내고 해질녘 피에 젖은 한꾸러미의 기름덩어리를 버스의 갈고리에 걸고 돌아올 것이다. N은 내게 무심했고 나는 N을 경멸했지만 정말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거시과 대식처럼 무심과 경멸은 나와 N, N과 나 사이의 방어박이었다. 나는 칼자국처럼 내 옆구리에 새겨진 세 음절의 모욕을 까많게 잊을 것이다. 그리고 당당히 존재의 뒤편에서 걸어나와 세상이 요구하는 가볍고 깡마른 형상 위에 사뿐히 올라타고 새롭고 어여쁜 강박에 열 손톱을 박아 넣으러 떠날 것이다. 그것을 N강박이라고 부르겠다. 이제 그만 잘 가 N.
 
- 『반죽의 형상』, 현대문학, 2006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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