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기다림과 씨름한다
페터 빅셀 지음, 백인옥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 페테 빅셀 풍(風)으로 그려본 이야기 하나.

그는 상수리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는 공원 의자 위에 앉아 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고 있는 그의 옆으로 요크셔 테리어를 데리고 한 여자가 걸어간다. 그는 그 여자를 알고 있다. 그녀는 매일 오후 3시면 어김없이 털이 반쯤은 빠진 요크셔 테리어를 데리고 산책을 나선다. 그녀의 산책은, 그녀가 공원 입구에 도착한 지 30분이 지나면 끝이 난다. 그는 담배를 하나 더 빼 물었고 그녀의 산책은 끝났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고 그녀는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을 할뿐이다.

#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페테 빅셀이 바라보는 시각에서 본다면 삶은 그런 것이다. 해질녘의 공원. 의자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사내. 그리고 그 옆을 지나는 한 여인.

우리의 삶은 누군가를 항상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타인과 소통하기, 또는 타인과 관계맺기는 우리의 삶 속에서 흔히 자신에게 거는 최면에 불과한 것.

페테 빅셀의 소설 여자들은 기다림과 씨름한다는 일상 속에서 파편화 되어 가고 있는 현대인의 삶의 단면을 건조하게 그려내고 있다. 간결한 문체. 짧은 문장으로 현대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인간성 상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페테 빅셀의 특징은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여자들은 …」에는 그의 대표적 작품집 ‘블룸 부인은 우유배달부를 알고 싶어한다’와 ‘스위스인의 스위스’등 그의 대표적 칼럼이 함께 묶여 있다. 21개의 장편(掌篇)들로 이어지는 ‘블룸 부인은…’은 현대인의 일상의 한 모습을 건조한 문체로 그리고 있다.

그의 문장은 짧고 간결해 언뜻 쉽게 읽힐 것만 같다. 그러나 맹수조련사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은 평범한 일생을 보낸 끝에 생을 마감한 한 노인‘사자들’과 우유배달부에게는 늘 2리터 버터 100그램만 주문하는 여인으로 기억되는 블룸 부인‘우유배달부’등은 빠르게 읽히면서도 그 뒷맛이 오래 남는다.

# 우유배달부

아침, 우유배달부는 현관 앞에 놓인 쪽지를 통해 4층의 여인과 소통한다. 그녀는 항상 쪽지에 ‘우유 2리터 버터 100그램’이라고 쓰고 우유배달부는 친절하게 그녀의 주문을 만족시킨다. 우유배달부는 그녀를 ‘알고’ 있다. 우유 2리터와 100그램을 주문하고 찌그러진 냄비를 갖고 있는 것을.

페테 빅셀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 특히 타인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위악적인 믿음인가를 지적한다. ‘알고 있다’는 것이 단지 ‘보았다’는 차원에 그치고 마는 것. 우유배달부를 알지는 못하지만 우유배달부가 놓고 간 우유는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현대인들의 삶의 단면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은 간결하면서도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 ‘블룸 부인은…’의 실린 21편의 짧은 글들은 책장 어느 구석을 먼저 펼쳐 읽어도 큰 무리가 없다. 하지만 그의 글은 110m 허들 경기를 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 한 차례 의식의 도약을 요구한다. 한 번 넘어가면 또 다시 나타나는 장애물. 그냥 무너뜨리고 가자니 작가가 쳐 놓은 글읽기의 함정에 빠져 들 수 있다.

간결한 문체와 건조한 문장 뒤에 숨은 현대의 숱한, 사소한 일상을 포착해 놓은 그의 글 솜씨는 결코 속독으로는 간파할 수 없다.

그는 현대인의 삶 속에 결여되 있는 것, 좌절되거나 포기해버린 의사 소통의 가능성, 기회를 놓친 인생, 고독과 소외 등을 결코 과장 없이 그려낸다. 사회비판적 목소리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너무나 건조하고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하지만 긴장감 있는 문체를 내세우며 성찰의 계기를 제기한다. 따라서 느리게, 그것도 아주 느리게 읽을 것. 페터 빅셀의 맛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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