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인생 학교 - 아토스 산에서 트로이까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질문
조현 지음 / 휴(休)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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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리니 섬에 있는 이아마을 모습. 사진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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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다.

≪그리스 인생학교≫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지금, 이대로 잠들기에는 아쉬울 따름. 밤의 적막함이 에게 해가 바라다 보이는 산토리니의 숙소에 짐을 푸는 나를 상상하게 한다.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뜻하지 않은 여행을 가게 된 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사회초년생이었던, 철없는, 이름만 어른인 내가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새벽, 그 분은 나에게 덜컥 10만 원을 쥐어주셨다.

“2박 3일이야. 어디든 좀 쉬었다 와.”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평소에 어디든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리던 기회가 왔는데도 기회가 아니라 떠밀림으로 느껴졌던 건 공허한 바람만 하고 살았던 나의 습관 때문이었겠지. 어쨌든 어리둥절하며 달랑 속옷이랑 수건만 챙겨 넣은 가방 하나를 메고 무작정 기차역으로 갔다. 머리 속이 복잡해질 것 같아 바로 탈 수 있는,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생긴 노선의 기차표를 끊었다. 호남선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서서히 역을 떠나던 기차. 그 순간 심장의 쿵쾅거림이란…. 어디로 갈 지, 어떻게 할지, 어떤 계획도 다짐도 없었던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것은 두려움이었을 거다. 그렇지만 감각이든 논리든 무엇이든 내 스스로 판단해 나가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에만 빠져있을 수도 없었다.

 

≪그리스 인생학교≫를 읽으면서 왜 그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을까? 이 책을 쓴 조현 기자는 그때의 나처럼 아무 준비 없는 여행자도 아니었고 가고자 하는 곳과 이유가 분명하였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해박한 고대 그리스 신화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그리스 철학자에 대한 이해, 현재의 국교인 그리스 정교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종교전문기자로서의 신뢰를 가지게 했다. 그의 발길을 따라 처음 올라가 본 아토스 산, 그리고 수도원들. 그리스 로마신화를 읽을 때면 언제든 등장했던 올림포스 산. 익숙한 도시들의 이름, 스파르타, 아테네, 크레타 섬. 사실 뒤따라가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익숙한 이름들로 인해 익숙할 것이라 생각했던 상황들이 전혀 낯설게 다가올 때 더 어렵게 느껴지는 법이다. 익숙하다고만 생각했던 그 배경들이 깨져야 낯설지만 사실인 상황이 흡수가 되기 때문이다. 모르면 모른 대로, 낯설면 낯선 대로 그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

 

아테네 중심가에 있는 지구 최초의 대학 아카데미 앞에 있는 소크라테스의 조각상. 사진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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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견해가 아닌 당신의 견해를,

다른 사람들이 괴롭다는 것 말고 당신만의 고민을,

남들이 원하는 것 말고,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길 말고 당신이 행복해질 길을 찾게 했을 것이다.

_ 15쪽, 들어가는 문

 

'들어가는 문' 에서 저자는 잡스의 식탁에 소크라테스가 초대됐다면 그가 던졌을만한 질문들을 예상해보았다. 입구에서부터 관심을 끄는 문장을 만났다.

 

책을 읽으며 나는 적잖이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배경 지식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그리스․로마 신화를 즐겨 읽었던 사람으로서 뭔가 그리스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한 것은 실수였다. 세계에서 유일한 수도원공화국 아토스 산은 물론이고 내 머리 속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서로 뒤엉켜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더 이상의 군소리 없이 조용히 필자의 뒤를 따라가며 집중해야했다.

필자도 소개했던 그리스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로 꼽고 싶다는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만났던 것은 나에게도 기쁨이었다. 진정한 자유와 자존감에 대해서 사색하게 하는 기회를 준 인물. 언젠가는 아테네로 날아가 디오게네스의 등불 앞에서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그를 상상해보고 싶다.

 

 

산을 넘고, 수도원을 찾아 걷고, 그리스 신화 속 신들과 그리스 사람들을 만났다. 책장을 넘길수록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는 흔적들을 나에게도 공유해주었다. 아마도 이러한 부분이 이 책이 가치 있게 여겨지는 부분이 아닐까.

그리스 여행 서적은 많고 많겠지. 오히려 정보 면에서나 감성적인 면에서는 더 나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 나에게 남는 것은 책과 함께 공감할 때 얻어지는 가치일 것이다.

 

내가 그리스에 온 것은 이런 생각을 더 굳건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신기루 같은 생각의 실체를 자각해 이런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다.

습관성 망상에 끌려 다니지 않고 의도대로 이 마음을 길들여 잘 쓰며 조화롭게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우리 삶에 더 중요한 도道가 있을까.

 

과연 ‘내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다른 사람이 내 삶의 의미를 가르쳐 줄 수 있을까.

내가 무엇에 의미를 두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

누군가에겐 조국과 봉사가 존재의 이유일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겐 사랑하는 가족과 하루하루 누리는 소소한 즐거움이 삶의 의미일 수도 있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한 이들은 목표가 있기에 난관을 쉽게 헤쳐 나간다.

갈 곳이 없는 항해사는 순풍이 불어도 방황하지만,

갈 곳이 분명한 항해사는 역풍이 불어도 이를 헤쳐 나가는 것처럼.

 

우리는 한 그루 묘목이다. .... 얕은 문턱에만 걸려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나지 못한 채, 일으켜주기를 바라는 세 살배기의 자기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은 한 번도 쓰러지지 않는 게 아니라, 쓰러질 때마다 박차고 일어서서 훌훌 털고 가는 사람이다. 그렇게 마음이 가벼워지면 어떤 버거운 운명도 더 이상 우리를 회롱할 수 없다.

 

 

세계 순례자의 길 ‘산티아고’나 체 게바라가 그의 친구와 여행했다는 아르헨티나의 40번 국도 ‘루타 40’처럼 아토스 산에서부터 트로이까지의 여정은 다른 사람의 인생이 아닌 바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명상의 시간이었다. 조현 기자는 이 길을 통하여 그의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스스럼없이 그의 경험을 내게 나누어 주었다.

 

나의 그 여행.

망망한 그 속에서 나는 나의 여행 경로를 정하고 숙소를 잡고 어느 때 보다 부지런히 움직였다. 몸과 마음이 지쳤다는 명제를 붙들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일단 목적지를 정하면 버스 시간을 맞춰야 했고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모르면 묻고 애매하면 걸었다. 걸으면서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에 경계심을 가지기도 했고 바람도 느끼고 하늘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엔 다시 다음 순서로 옮겨 갈 준비를 해야 했다. 정작 목적지에서 즐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여유나 사색의 시간은 좀 공허하고 민숭민숭했다.

 

그렇게 2박 3일 짧으나 길었던 내 인생, 기회의 시간을 보내고 지금, 여기까지 왔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때를 되돌아보니 그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쳤던 순간들이 의미롭게 다가온다. 한 생각 속에 빠져 있던 내가 낯선 공간에 찾아들어 눈 앞의 현실을 선택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으로 전환했다는 것, 그런 와중에도 그 기회를 누릴 만큼 누렸다는 충만함.

아마 지금 다시 새로운 곳으로 떠날 지라도 나는 적당한 긴장감과 바쁜 느낌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다만 그때와 다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내 인생의 기회고 축복임을 알아서 조금은 더 여유롭겠지.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면 지금처럼은 살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남보란 듯이, 내 뜻대로 살아보리라고.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까. 내일이 오면 그때도 타인의 삶이나 바라보면서 내일이나 기약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카잔차키스가 붓다만큼 따랐던 니체는 말했다.

다시 태어나 살고 싶을 그런 삶을 살아라. 내일 말고, 지금 당장 여기서!

 

 

그래. 다음 기회로 산토리니의 산뜻한 풍광을 나에게 선물로 주자.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기회는 만드는 거니까. 그때는 필자에게 물어봐야겠다. 말조차 통하지 않는 곳인데 조금 덜 허둥대도록. 그는 아마도 그리스 길잡이로는 최고일거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한 번 뿐인 생을 후회없이 이처럼 당당하게 헤쳐나갈 자는 누구인가. 내가 존경의 시를 바치고 싶은 이는 신들이 아니라 바로 자기 삶의 주인이다. 

_ 379쪽, 본문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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