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열린책들 세계문학 120
기욤 아폴리네르 지음, 황현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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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선생님의 번역으로 읽는 아폴리네르, 그 자체로도 즐겁고, 고마운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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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아를 위한 비평 - 황종연 평론집
황종연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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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왔군요. ˝탕아를 위한 비평˝, 비루한 탕아들의 문학적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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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의 초상 - 복도훈 평론집
복도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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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한국문학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복도훈 평론가의 책이 나왔군요. 일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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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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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저자가 배낭여행자들을 만나기 위해 돌아다니는 '카오산 로드'에서 나 역시 아무런 지향없이 헤매이던 적이 있다. 3년 전의 일이고, 32살의 일이다. 일 년이 넘게 동남아와 러시아, 유럽, 중동, 아프리카를 다녔다. 이렇게 말하면 오래 지나지 않은 일 같지만, 내겐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넘기는 것보다 더한 먼지를 풍긴다. 그만큼 한국에서의 삶은 기억을 갉아먹는다.  

  여행에 대한 모든 것이 그립던 시절, 한 선배가 읽고 있던 [On the Road]를 보게 되었다. 이젠 여행에 관한 책이라면 별로 매력이 없지, 라고 느끼면서도 캄보디아의 붉은 흙길이 펼쳐진 사진에 마음을 빼앗겼다. 고백하자면, 나도 동일한 사진을 가지고 있다. 먼 길을 걷다 같은 곳을 바라본 사람들이 느끼는 호감이라고 할까? 책을 읽게 되었고, 흥미로운 사실 하나와 사이비 여행서들이 선전하는 여행과는 다른, 뭐라할까, 여행의 본질에 가까운 술렁거림이 담겨있다는 점을 알게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에 대해 먼저 말하자. 그건, 여행을 통해 알게된 친구의 사진이 이 책 속에 게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건 개인적 즐거움이니 누구와 공유할 수도 없고, 이를 통해 이 책의 은밀한 재미를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럼 내가 여행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술렁거림으로 들어가보자. 대형서점을 가본 사람들은 안다. 얼마나 많은 가이드북과 개인적 경험을 서술한 여행서적들이 범람, 말그대로 넘쳐 흐르는지. 정보와 사진, 흥겨운 경험, 가판대 위에 올려진 여행서들은 말한다. 앨리스(Alice)를 이상한나라로 이끄는 토끼(White Rabbit)처럼. 바쁘다, 바뻐, 인생엔 시간이 없어, 빨리 떠나라고.

  하지만 여행이 그런 것일까? 즐겁고, 아름다운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먹는 재미와 사람들에 취하는 것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여행은 즐겁기 보다는 외롭고, 풍경은 아름답기 보다는 기이하고, 사람들은 친절하지 않고 현실적이다. 혼자 먹는 아침이 끝나고 냅킨을 들어 입을 닦는 일은, 혼자 쓰는 호스텔의 화장실 방문을 열어놓고 두루마리 휴지로 밑을 닦는 일과 다르지 않다. 아름답게 보이던 것은 일상이 되고, 쓸쓸함은 실존이 된다.

  가이드북은, 색동옷처럼 편집된 여행책은 고통에 대해 기술하지 않는다. 방콕의 싸구려 여관 침대에서 질러댄 내 비명은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한데, 어디에도 없다.

  [On the Road]의 미덕은 포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엔 정보도, 아름다운 사진도, 미식가들의 웃음도 없다. 각자의 여행을 자랑하는 다채로운 책들이 편집의 기술을 보여준다면, [On the Road]는 정보와 풍경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여행객에게 집중한다. 


  이 집중이 [On the Road]가 가진 힘이다. 여기엔 쓸쓸한 자유와 처절한 홀가분함, 떠난자의 두려움이 담겨 있다. 물론 장에 따라, 자유는 포장육처럼 싱싱하게 포장되어 있기도 하다. 그게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포장육에 담긴 자유를 한 근 구매했다면, 살점이 떨어져 나간 육(肉)의 고통을 읽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다.

  아이는 성장해서 어른이 된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성장이 가능할까? 아이는 도시에서 단지 장성할 뿐이다. 길은 유일한 성장의 공간이다. 그게 길 위에 올려진 하나뿐인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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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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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의 연못에 돌을 던져라!


1. ꡔ오리엔탈리즘ꡕ을 이해하기 위한 서설


  1978년에 출간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의 저작 ꡔ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ꡕ은 동양에 관한 서구의 모든 문화체계와 지식체계가 동양을 타자화하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거대한 담론 체계, 즉 ‘오리엔탈리즘’의 형성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동양’과 (대체로) ‘서양’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구별(ontological and epistemological distinction)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라고 정의하였다. 그에 따르자면 서구의 저술가들이 동양에 관해 언급하거나 연구한 방대한 텍스트에는 기본적으로 동양과 서양을 나누는 구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지리학적인 구분만이 아니라, 지배와 종속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이고, 존재론적인, 때에 따라서는 성적인 구분을 포함하고 있다. 사이드는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권력적 담론의 형성이 결코 정치와 관련된 일부 영역에서만 진행된 사항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방대한 분량의 서구 텍스트들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분석 대상에 “학술적 업적만이 아니라, 문학작품, 정치에 관한 팸플릿, 신문잡지의 기사, 여행기, 종교학 및 문헌학의 연구논문도 고찰대상에 포함”(51쪽)한다는 사이드의 말은 서구에서 형성된 오리엔탈리즘이 개별적인 분야나 일련의 작가들에 의해 형성된 지식체계가 아니라 서구 문명 전반에 걸쳐져 있는 거대 담론이라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러한 방대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사이드가 참고하고 있는 방법론은 푸코(Michel Foucault)와 그람시(Antonio Gramsci)에게서 기원한다. 그가 ꡔ오리엔탈리즘ꡕ의 서문에서 “그의 저작에 엄청나게 빚을 지고 있는 미셸 푸코”(51쪽)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가 사용하고 있는 담론(discourse)과 권력(power) 개념은 푸코의 그것에 근거하고 있다. 푸코는 지식의 대상이 ‘담론’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이 지식의 대상을 ‘구성’하며, 이를 매개로 하여 권력이 구성되기도 하고 행사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은 하나의 대상을 재구성하거나 개조하고, 이를 통제함으로써 그 대상이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체제에 적합한 복속적 대상이 되도록 작용한다. 이러한 푸코의 논지를 사이드적인 관점으로 변형한다면 동양을 설명하고 묘사하는 서양의 거대한 담론체계, 즉 오리엔탈리즘은 ‘실재’의 동양을 있는 그대로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적 형태의 ‘동양’으로 왜곡시키거나 대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의 권력이 거대한 익명의 담론 체계 안에서 형성된다면, 사이드의 권력은 분명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비서구를 지배하려는 서구의 의식적이고 고의적인 행동이다. “나는 내가 그의 저작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미셸 푸코와는 달리,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담론(언설)적 편성을 구성하는, 본래는 저자명을 갖추고 있지 않은 텍스트의 집합체 위에도 개별 저작가를 특징지우는 흔적이 분명히 있다고 믿고 있다”(51쪽)는 사이드의 지적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서구의 권력적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비서구에 대한 서구의 지배를 분명하게 의도하고 있는 ‘개별 저작가’들이라는 사이드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이드가 푸코의 ‘담론’, ‘권력’ 개념과 결합시키고 있는 또 하나의 개념은 그람시의 ‘헤게모니’이다. 그람시는 교육과 문화적 실천을 중시하는 ‘시민 사회’와 직접적인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폭력적 국가제도(경찰, 군대, 중앙관료제 등)로 구성된 ‘정치 사회’로 사회를 분석한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단순한 물질적인 힘을 통한 폭력적 지배 방식이 아니라 어떤 문화형태가 다른 문화형태보다 우월하다는 문화적 주도권과의 결합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그람시가 말하는 ‘헤게모니(hegemony)’란 앞서 말한 ‘문화적 주도권’이다. 사이드에 따르자면 “오리엔탈리즘에 대하여 지금까지 설명해온 지속성과 힘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헤게모니이며,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화적 헤게모니가 작용한 결과인 것이다.”(23쪽)

 

  사이드가 푸코와 그람시의 방법론을 결합하여 분석하고 있는 것은 동양에 대한 서구의 담론 체계가 18세기 이후 진행되어온 동양에 대한 서구의 정치적, 문화적 지배의 역사적 전개와 모종의 음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열등한 ‘타자’로 표상함으로써 동양에 대한 서양의 헤게모니를 확립하는 작용을 한다. 사이드의 분석에 따르자면, 동양은 서양의 담론 체계 속에서 야만, 여성, 게으름, 미개, 관능, 독재, 비이성, 침묵 등의 이미지로 표상된다. 이에 비해 서양은 동양의 대립항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즉 서양이라는 주체는 동양이라는 타자에 의해, 야만을 인식하는 이성적인 주체, 게으름을 타파하는 역동적인 주체, 연약한 여성을 보호(지배)하는 강한 남성으로 재인식되는 것이다.

 

  사이드의 ꡔ오리엔탈리즘ꡕ이 현재의 지식 체계 속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그의 이론이 단순한 ‘서구 대 동양’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를 넘어 지배와 종속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를 광범위하게 설명하는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테판 타나카(Stefan Tanaka)는 그의 저서 ꡔ일본의 동양 Japan's Orientꡕ에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행했던 제국주의적 침략과 지배의 바탕에 내재한 일본의 담론 체계를 분석하며, 그것이 서구의 오리엔탈리즘과 지극히 유사한 체계임을 보여주었다. 결국 사이드의 ꡔ오리엔탈리즘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주체와 타자, 보편과 특수, 지배와 종속이라는 이분법을 구성하는 것이 지식적 담론체계이며, 이를 통해 권력 구조가 재편된다는 사실이다.


2.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기 위한 가설


  분명히 사이드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하나의 문제가 ꡔ오리엔탈리즘ꡕ을 통해서 대두되고 있다. 그것은 ‘순수하고’ ‘실재적인’ 동양이 명확히 존재한다고 하는 인식이다. 앞에서도 반복적으로 언급한 것처럼 사이드는 서구의 담론체계에 의해 ‘동양’이 왜곡되었고, 오인되었다고 주장한다. 그것도 명백한 서구의 ‘저작가들’에 의해서 ‘동양’은 야만, 여성, 게으름, 미개, 관능, 독재, 비이성, 침묵 등의 이미지로 표상 되었다. ꡔ오리엔탈리즘ꡕ을 구성하고 있는 방대한 저술 체계는 이러한 담론에 대한 사이드의 상세한 분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상세하고, 어떻게 보자면 대단히 지루한 사이드의 분석이 도달하고 있는 곳은 서구에 의해 왜곡되고 변형되지 않은 ‘순수한’ 동양이라는 대상과 이에 대한 지식적 담론의 실재적 가능성이다. 더구나 그것이 익명의 담론 체계를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표지에 저자의 이름이 서명된 실재의 텍스트들에 의해서 시도된 것이라면 ‘순수하고’ ‘실재적인’ 동양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사이드가 계승하고 있는 지적 계보의 상단에 당당히 위치하고 있는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선혈이 낭자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절규하지 않았던가?


  유럽은 열정과 냉소, 그리고 폭력을 휘둘러 세계를 쥐었다. …… 사람에 대해서 유럽은 지나치게 인색했다. 유럽이 잡아먹으려 했던 것은 오직 사람뿐이었다. 형제들이여, 왜 이해를 못하는 것인가? 이 유럽을 따르지 않아도 우린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유럽은 뻔뻔스럽게도 얘기하고 있다. ‘사람’을, 그리고 인간의 안녕을 위해 자기들이 얼마나 노심초사하는지를, 그러나 이 정신이 승리할 때마다 우리 인류는 어떤 고통을 받아왔는지 오늘날 우리는 알고 있다. …… 자기 자신과의 영원한 대화, 점점 음란해 가는 나르시시즘―이들은 거의 착란에 가까운 상태에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러한 상태 하에서는 지적 활동이 고통이었고, 현실은 살아서 일하고, 창조하는 인간의 현실이 아니었고, 오히려 말뿐이었고, 말의 조합에 의한 장난이었으며, 말속에 포함된 의미로부터 흘러나오는 긴장이었다. …… 우리 민중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유럽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 동지들이여! 유럽을 위해, 우리와 인류를 위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인간을 출범시켜야 한다. (강조는 인용자)


  다소 길게 인용되었지만, 프란츠 파농은 수사학적인 메타포를 사용하며 지배와 종속의 관계를 공고하게 하고 있는 담론의 권력적 역할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특히 “자기 자신과의 영원한 대화, 점점 음란해 가는 나르시시즘”이라는 파농의 언급은 오리엔탈리즘의 담론 체계를 관통하고 있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서구가 동양과 나누고 있는 대화란 사실은 서구라는 주체를 공고히 하기 위해 형성한 가상의 타자(동양)와 나누고 있는 독백에 불과하다. 그것은 진정한 타자를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한 대화가 아니라, 인형을 한 손에 들고 대화하며 자기가 진정 인형과 대화하고 있다고 여기는 어린아이의 장난과 같은 것이다. 그러한 자기 망상적이고 자기 분열적인 대화를 통해 형성되는 것은 주체를 하나의 신화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정신분열적인 자아이다. 그것은 어두운 방안에서 촛불을 들고 거울 앞에 서서 흐릿한 자신과 대화하며 끊임없이 타자를 상상하는 “음란한 나르시시즘”일 뿐이다. 이러한 자아가 어떠한 비극적 상황을 연출할지는 지나간 역사를 참조하지 않아도 지극히 자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파농은 서구의 담론체계가 만들어낸 현실이 “살아서 일하고, 창조하는 인간의 현실”이 아니라, “말뿐이고”, “말의 조합에 의한 장난이었으며, 말속에 포함된 의미로부터 흘러나오는 긴장이었다”고 말한다. ‘유럽’에서 해방되기 위해, ‘유럽’이 형성한 지식 담론의 체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유럽’과 변별되는 “다른 곳”, “새로운 개념”을 찾아야 한다고 결론을 짓는다.

 

  그러나 사이드가 은연중에 말하고 있는 ‘순수하고’ ‘실재하는’ ‘동양’, 파농이 주장하고 있는 ‘다른 곳’, ‘새로운 개념’이 동양과 서구라는 이분법처럼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는 실재일까? 이에 대해서는 니시카와 나가오(西川長夫)의 다음과 같은 말이 하나의 해답이 될 것이다.


  비서구 세계에 있는 우리들이 자기 나라와 자기 문화의 독립성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려 해도 서구 세계에서 유래한 말과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자기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일본 우익이 일본문화의 우월성을 설명하는 말의 대부분은 서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 그러면 유럽의 우월성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럴 리는 없을 것입니다. 가령 유럽 세계에서 이슬람권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경유한 요소를 제거한다면 유럽 세계는 소멸해버리겠지요. 유럽의 문명 개념도 근원을 거슬러 가면 실은 중국에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만, 이 설은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세계는 항상 끊임없는 교류와 변용의 상호관계 속에 있고, 순수하고 고유한 문화와 민족이라는 개념은 국민국가가 혹은 국민국가의 시대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니시카와 나가오는 고정되고 순수한 문화, 민족, 언어, 주체가 실재한다는 개념 자체를 부정한다. 이것은 서구의 담론 체계가 만들어낸 거대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서구에 대한 비서구, 즉 ‘순수한’ 동양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파농이 말한 “다른 곳”은 ‘바로 여기’이며, “새로운 개념”은 복합적이고 복수(複數)적인 ‘개념’의 재인식인 것이다.

 

  파농이 지적한 “자기 자신과의 영원한 대화”를 다시 한 번 상기한다면 ‘지배와 종속’, ‘서구와 동양’이라는 이분법적인 권력 구도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바흐찐(Mikhail Mikhailovich Bakhtin)을 사유하는 것이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파농은 서구가 비서구와 나누고 있는 대화란 것이 사실은 자기 자신과 나누고 있는 독백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서구의 기존 담론체계가 ‘독백’에 불과하다면, 그것에 대한 해결책은 서구와 동양의 진정한 ‘대화’에 있지 않을까? 바흐찐은 그의 장르론에서 서사시를 민족의 ‘절대적 과거’로 충만한 세계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민족의 역사에 있어 ‘시초’와 ‘절정기’의 세계이며, 선조들과 가문의 설립자들의 세계이며, ‘제일인자들’과 ‘최상의 것들’의 세계이다.” 서사시에 대한 바흐찐의 정의에 있어 중요한 것은 역사적 실재로서의 과거가 서사시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세계를 과거로 이동시키는 서사시의 ‘형식적․구성적 특징’이다. 즉, 서사시로 표상될 수 있는 기존의 담론체계는 실재적 사회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담론의 체계 속에 사회를 재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는 접근 불가능한 시간적, 가치적 차원으로 환원된다. 마치 동양과 서구라는 이분법적인 대립이 오랜 시간적, 공간적 간격을 기반으로 진행이 되어 접근 불가능한 하나의 고정된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서사시의 세계는 ‘단일 언어’에 의해서만 형성이 가능한 공간이다. ‘단일 언어’ 즉 ‘단일 담론’(오리엔탈리즘)을 형성하는 세력들은 바흐찐에 의하자면 역사 속에 실재하는 세력이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대상을 예시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역사’를 구상하는 집단이며, ‘언어’를 단일한 것으로 통일하는 세력이다. 근대에 있어서 그것은 ‘서구’이며, ‘민족’이며, ‘국민국가’이며, ‘주체’이다. 이러한 ‘서사시=단일 언어=단일한 담론체계’에 대한 대항 담론은 바흐찐에게 있어 ‘소설’이란 장르로 설명된다. 바흐찐에 의하자면 ‘근대’란 ‘새로운 세계사’의 시대이다. 그것은 이질적인 인식론과 담론, 지리적 장소가 혼합된 거대하고, 민중적이고, 잡종적인 공간이다. 실로 이종언어혼효(異種言語混淆, heteroglossia)로 범벅이 된 다성적이고, 대화적인 공간이다.

 

  이러한 근대는 비종결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코젤렉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시대 개념으로 ‘중세’나 ‘고대’에 대조되는 ‘근대’가 아니라, ‘새로운(neue)’과 ‘시대(Zeit)’의 합성어인 시간 개념으로서의 ‘근대(Neuzeit)’이다. 유동적이고 역동적인 근대는 인간의 인식을 무한히 확장하고, 이질적이고, 대조적인 것을 하나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함께 혼합하고, 공존하게 한다. 바흐찐에게 소설은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에 들어와서 태어나고 양육되었던 유일한 장르”이다. 그는 서사시를 독백적이고, 단성적(單聲的)이고, 단종적(單種的)인 단일 언어와 이에 따른 언어․이념적 사고(담론)의 중심화로 설명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소설을 대화적이고, 다성적(多聲的)이고, 이종적(異種的)인 언어와 이에 따른 언어․이념적 사고의 탈중심화로 설명한다.


  새로운 문화적․창조적 의식은 활발한 언어적 다양성을 지닌 세계 속에 존재한다. 세계는 결정적으로,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언어적 다양성을 띠게 된다. 상호공존하되 서로에게 폐쇄적이고 무관심한 민족언어들의 시대는 끝이 났다. 언어들은 상호조명함으로 요컨대 한 언어는 오로지 다른 언어에 비추어져서만 그 자신을 볼 수 있게 된다. 한 민족언어 속의 ‘언어들’이 순진하고 고집스럽게 공존하는 일도 또한 끝이 났다.


  바흐찐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 개념이 언어를 둘러싼 이념적 사고를 포함하고 있는 담론 개념임을 인지한다면 위의 인용문을 이해하기가 한결 쉬울 것이다. 서구에 의한 비서구의 지배와 종속을 가능하게 했던 담론인 오리엔탈리즘은 “자기 자신과의 영원한 대화”이며, “점점 음란해 가는 나르시시즘”의 상태로 서구를 몰아갈 것이다. 이에 대한 대항 담론으로 역사적이고 순수한 동양을 사유하는 담론 역시 결국은 서구의 그것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근대란 이질적이고, 잡종적이며, 비종결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시간이다. 근대에 있어 진정으로 새로운 문화적․창조적 작업은 혼합된 담론의 세계 속에서 존재했다. 결국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는 사유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대조적인 대항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리엔탈리즘과 대화할 수 있는 담론의 생산과 혼합되고 이질적인 담론의 뒤섞임을 긍정적이고 본래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인식의 전환을 전제할 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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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6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