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의 기내소식지 '스카이뉴스' 8월호에 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특집기사를 옮겨놓는다. 원고에서는 '페테르부르크'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병용했는데, 기사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통일되었다. 현재의 공식 명칭이 그러해서다(제정 러시아 때는 '페테르부르크'). 여기서는 그냥 '페테르부르크'라고 적겠다. 나머지는 지면 기사에 맞추었다(마감이 지나서 급하게 PC방에서 쓴 기억이 난다). 지면에서는 '푸슈킨'이 '푸시킨'으로 표기됐다.
스카이뉴스(17년 8월호) 상트페테르부르크
“돼지 같은 페테르부르크가 나에게 역겹지 않다고, 거리에서 욕설과 밀고 사이에서 사는 것이 나에게 즐거우리라고 그대는 정말 생각하는가?”라고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던 알렉산드르 푸슈킨은 한편으로 “너, 표트르의 창조물을 나는 사랑하네, 너의 엄격하고 균형 잡힌 모습을 나는 사랑하네.”라고 페테르부르크를 예찬했다. 그렇다고 이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가 이중인격자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중성이야말로 표트르의 도시이자 성 베드로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본질이다.
제정 러시아 시대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가 1703년에 건설한 도시다. 12세기 중엽에 세워진 모스크바와 달리 18세기 초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 도시는 표트르 대제가 강력하게 추진한 러시아의 근대화와 서구화의 상징이다. 표트르 대제는 농업 중심의 후진적인 러시아를 서구를 모델로 한 무역 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부동항, 곧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도시를 모스크바를 대체한 새 수도로 건설한 이유다. 하지만 무모하게도 그는 머리로 잉태한 거대한 계획도시를 핀란드 만과 네바 강 어귀의 늪지에 세우고자 했다. 10년에 걸친 험난한 공사는 15만 명이 넘는 인명이 희생됐고, 페테르부르크는 ‘무덤 위에 세운 도시’라는 악명을 얻었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대공사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의 황제께선 도시 전체를 건설하신 다음 그것을 땅위에 내려놓으셨소.”라는 답변이 이 도시의 건설에 대한 전설이다. 요컨대 페테르부르크는 기적의 도시다. 하지만 러시아 민중에게 페테르부르크는 적그리스도의 도시, 악마의 도시다. 태생적으로 페테르부르크는 이러한 이중성을 본질로 지닐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문학여행'도 페테르부르크의 이중적 정체성에서 출발하는 게 좋을 듯싶다. 바로 네바 강변에 세워진 표트르 대제의 동상, 청동기마상이 출발점이다. 18세기 후반의 걸출한 황제였던 예카테리나 2세가 프랑스 조각가 팔코네로 하여금 만들도록 한 이 조각상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뒷발로 거대한 뱀을 짓누르면서 앞발을 치켜든 청동 말이 바로 러시아의 상징이다. 그리고 이 말이 앞발을 치켜들게끔 한 장본인이 말의 기사 표트르 대제다. 푸시킨의 서사시 <청동기마상>(1833)은 이 기마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가난한 하급관리인 주인공 예브게니는 약혼녀 파라샤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소박한 소시민적 행복을 꿈꾸던 그에게 커다란 재앙이 들이닥치게 되는데, 1824년에 일어난 홍수가 그것이다. 늪지에 건설된 도시인지라 페테르부르크는 홍수에 취약했고 주기적으도 큰 홍수에 시달렸다. 그 가운데서도 도시의 상당 부분을 물에 잠기게 한 1824년의 홍수가 기록적이었다. 밤새 내리던 비에 뜬눈으로 밤을 샌 예브게니는 아침이 되자 마자 약혼녀가 사는 섬을 찾아가지만 모든 게 물에 휩쓸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약혼녀를 잃은 예브게니는 미치광이가 되어 도시를 헤매다가 이듬해 찬바람이 불 무렵에야 정신을 차리는데, 마침 청동기마상이 눈앞에 보였다. 그는 자신의 불행의 원인이 이런 늪지에 도시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두고보자!"란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이내 도망치기 시작하는데, 청동기마상이 고개를 돌려 그를 뒤쫓아왔기 때문이다. 이튿날 그는 끝내 숨진 채 발견된다. 이렇듯 '작은 인간'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지만 푸시킨은 이 서사시의 서사에서는 표트르의 도시를 예찬한다. 이러한 예찬과 주인공의 비극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청동기마상>은 근대 러시아의 진실을 그렇게 이중적으로 포착한다.
청동기마상을 둘러보았다면 문학여행의 여정을 푸시킨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이자 1837년 2월 불의의 결투로 숨을 거둔 그의 집으로 향해도 좋다. 모이카 강변 12번지에 위치한 푸시킨 작가박물관이다. 푸시킨의 서재가 복원되어 있고 결투 및 죽음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더불어 여유가 있다면 푸시킨이 학창시절을 보낸 황립학교 리체이도 방문해볼 만하다. 상트페테르크부르크 근교 푸시킨시에 있는데, 바로 예카테리나 여제의 여름궁전의 부속건물이다. 열두 살에 30명의 동기생들과 입학한 이 기숙학교에서 푸시킨은 뒤늦은 요람기를 보내고 시인으로 성장한다. 푸시킨이 거닐던 정원도 그대로이고 그가 시를 읽어 주던 물오리떼도 그 후손들이 남아 있다.
한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고골의 도시이기도 하다. 푸시킨과 함께 근대 러시아문학의 토대를 마련한 고골은 우크라이나 시골 출신이지만 입신출세를 꿈꾸며 스무 살에 페테르부르크로 상경한다. 관리나 배우로서 이력을 만드는 데 실패한 이후 그는 작가에 도전하고 비로소 꿈을 성취한다. 푸시킨의 뒤를 이은 최고의 작가가 되기 때문이다. 고골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건 <외투>와 <코> 등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일련의 단편들이다. <넵스키 거리>(1835)도 그중 하나인데, 넵스키 거리는 당시 가장 번화한 대로였다. 오늘날에도 넵스키 거리를 거니노라면 자연스레 고골이 묘사한 대목들을 떠올릴 정도다.
이 단편에는 피스카료프와 피로고프라는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저녁 무렵 넵스키 거리를 걷던 두 친구는 각각 미지의 여인을 뒤따라 가는데, 화가인 피스카료프가 뒤쫓은 아름다운 여인은 유곽의 창녀로 밝혀진다. 피스카료프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여인이 창녀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만다. 반면 피로고프 중위는 뒤쫓아간 유부녀와 밀회를 가지려다 독일인 남편으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는다. 복수를 계획하지만 금세 다른 일들에 정신이 팔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속물적인 일상으로 돌아간다.
<넵스키 거리>를 통해 고골은 근대 러시아를 살아가는 두 가지 인물 유형을 제시한다. 페테르부르크라는 환영적 공간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들은 파멸하고, 반면에 현실과 타협하는 비속한 인물들은 살아남는다. 이러한 세계상에서 벗어나 고골은 종교에서 구원을 찾고자 했으나 불행하게도 안식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고골은 19세기 러시아 사회에 대한 독특한 묘사로 도스토옙스키 문학을 예고하게 된다. 문학여행자라면 넵스키 거리 초입에 서 있는 고골의 동상을 잊지 말자!
페테르부르크 문학의 정점은 도스토옙스키다. '페테르부르크 사전'으로 불릴 만큼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그의 많은 작품은 다양한 인물군상과 함께 페테르부르크의 곳곳에 대한 묘사를 제공한다. 특히 장편 <죄와 벌>(1866)은 이 도시의 빈민 지역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대학생과 하층민들의 일상과 병적인 심리상태를 치밀하게 묘사하고 해부한다. 실제로 19세기의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모든 도시 가운데 사망률이 가장 높았고, 여성에 비해 남성 인구가 지나치게 많아 매춘과 비합법적인 성문화가 성행했던 도시였다. 통계에 따르면 출생아의 1/4이 비합법으로 태어난 아이들이었을 정도다. 성병, 정신병, 폐병, 알코올중독, 자살자 수가 단연 러시아 1위였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공리주의라는 서구 사상에 '감염'돼 '벌레만도 못한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한다. 하지만 그의 살인에 적극적인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은 찌는 듯한 더위와 숨막힐 듯한 악취가 넘실대는 한여름의 페테르부르크다. 그를 뒤쫓는 예심판사 포르피리는 라스콜니코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신선한 공기’라고 말하는데,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결국 라스콜니코프의 새로운 삶은 그가 자수한 뒤 이르게 되는 유형지 시베리아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을 집필한 장소는 카즈나체이스카야 거리 7번지다. 그곳에는 현재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집필 장소임을 알리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실제 작품속 모델이 된 라스콜니코프의 하숙집, 전당포와 소냐의 집 등이 모두 근거리에 있다. 작품속에서 하숙집과 전당포 사이의 거리는 730보인데, <죄와 벌> 투어에 나서는 여행자라면 라스콜니코프가 걸었던 길의 실제 거리를 걸음 수로 세면서 다시 걸어보아도 좋겠다.
<죄와 벌>의 무대에서 좀 더 걸어가면(겨울에 걷기에는 좀 먼 거리다) 쿠즈네치니 골목 5/2번지에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이 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만 20여 차례 이사를 다녔던 도스토옙스키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자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을 집필한 장소다. 1881년 2월에 숨을 거둔 도스토옙스키는 알렉산드로 넵스키 수도원 묘지에 묻혔는데, 예술가들의 묘지인 이곳에는 작곡가 차이콥스키도 안장되어 있다.
17. 09.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