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
무경 지음 / 나비클럽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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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목부터가 불쑥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1928년 부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까? 아마도 현대의 부산이라든가, 1928년의 경성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궁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1928년'과 '부산'의 생경한 조합이라니!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라는 제목만큼이나 신선한 부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읽어보니 과연 당시의 시대 배경과 부산이라는 지리적 배경이 생생하고도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그것만으로도 읽는 책을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예를 들어 해운대, 동래, 영도, 부산역 등은 그나마 외지인들도 알 법한 지명이지만, 구포, 모라, 백양산, 낙동강, 대저 등의 지명은 아마도 생소하지 않을까. 하지만 부산사람에게는 매우 친숙한 지명들이다. 그런 지명들이 소설 속에 등장하고, 거기다 과거에는 그런 모습이고 위상이었구나, 라는 점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또한 작가는 경성시대라는 시대상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경성시대라고 하면 흔히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대립 등, 자주 등장하는 단골 설정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단골 설정을 그저 시대적 배경으로만 남겨둘 생각은 없는 듯하다. 주인공 마담 흑조라는 캐릭터의 뼈대를 이루는 요소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흑조'란 주인공 천연주가 경성에서 운영하는 다방의 이름이다. 천연주의 부친은 '수염 남작' 천민근으로, 조선 최고의 부자이자 대표적인 친일파 조선인 자본가다. 부녀가 각각 센다 민타로와 센타 아카네라는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기도 한데, 하물며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의 딸이니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마담 백조가 아니라 마담 흑조인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그녀 같지만 2년 전의 화재로 큰 화상을 입은 후, 건강하고 밝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붉은 화상 흉터와 절뚝이는 다리, 창백한 얼굴과 공허한 두 눈의 소유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그녀의 모습은 대략 다음과 같다.


- 검은 긴 머리 아래 창백한 얼굴, 나를 바라보는 깊고 공허한 두 눈. 그 눈은 마치 시야에 담은 모든 걸 하나도 남김없이 집어삼킬 것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영안실에서 본 시체가 떠올랐다. 마치 죽은 사람이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 그제야 경석은 여태 연주 양에게 느낀 위화감을, 자신이 느낀 본능적인 거부감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연주 양은 정탐소설 속 피해자의 무기력함을 두른 게 아니었다. 그녀는 정탐소설을 지배하는 죽음과 한 몸 같은 존재였다.


마치 사신을 연상케 하는 어둡고 우울한 이미지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는 '흑조'라는 단어의 우아하면서도 비탄에 젖은 울림과 겹쳐져 더욱 강화된다. 동시에 독자는 그녀가 과거에 겪었을 사연과 앞으로 나아가려는 행보에 대해 강렬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소설은 총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문법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탄탄한 전개를 보여준다. 다만 트릭의 완성도라든가 오락성의 강도에 대해서는 저마다의 취향과 안목에 따라 평가가 조금씩 엇갈릴 수도 있겠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나도 사실 평소 본격추리를 그다지 즐겨보지는 않는 편이라 어찌 보면 문외한에 가깝다. 본격추리 매니아분들께서 잘 평가해 주실 것 같다. 하지만 나같은 문외한도 즐겁고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추천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소설이라 감히 말해 본다. 


덧붙여, 이 책은 천연주가 요양을 위해 부산으로 여행을 떠난 며칠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소개하고 있다. 다방 흑조는 경성에 위치하고 있으니, 다음 권은 아마도 부산이 아닌 경성이 배경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하며 감상을 마친다.




*출판사를 통해 책을 제공받아 읽은후에 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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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카틀리포카
사토 기와무 지음, 최현영 옮김 / 직선과곡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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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사전지식 없이 덜컥 구입한 책이었던지라, 예상과는 너무 다른 내용에 처음에는 읽으면서 많이 당황했다.

관심1도 없는 멕시코 이야기에 아즈테카 문명인지 머시기인지 계속 나오질 않나....-_-

게다가 폭력물을 원하긴 했지만, 결코 이렇게 잔인한 학살 장면을 보고 싶진 않았다 ㅠ_ㅠ

하지만 워낙 잘 쓰여진 완성도 높은 소설이라는 점만은 분명했고,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상세하고 구체적인 관련지식이 돋보이는 스토리 전개 등등이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했다.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이 책에는 히어로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악당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도 나쁜 놈보다 더 나쁜 놈의 자웅을 겨루는 정도랄까. 사건 해결을 하거나 나쁜 놈들을 처단하기 위해 활약하는 정의의 사도가 단 한 명도 없다. 경찰이 나오긴 하는데 부패경찰이다 ㅋㅋ

사실 그렇다. 현실에서 누가 슈퍼맨 배트맨처럼 오로지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려고 할까? 설령 있다고 해도 사회 시스템이 순순히 그 영웅의 의지대로 기능하는가? 차라리 이 소설 속의 스에나가 같은 악당이 훨씬 더 설득력 있다. 끔찍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끔찍한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숨쉬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세계다. 그렇기 때문에 나 같은 독자들이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폭력물에 끌리는 것 아닐까? 지나친 자기합리화일까? (혹은 뭔가 다른 심층적인 심리가 작동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내게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소설 중반부까지는 악당 발미로가 주인공인 줄 알았다. 실제로 소설의 분량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소설 초반부와 결말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진짜 주인공은 코시모였다. 그런데 정작 코시모가 등장하는 비중은 전체 분량 중에서 그다지 크지는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체감상으로는 말이다. 이것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발미로가 아닌 코시모여서 진심으로 안도했다. 같은 살인자라도 진짜 악마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가 있으니까. 코시모는 마치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처럼, 선악의 구분이나 문명조차 초월한 태초의 원시적인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그런 코시모가 사랑이나 우정과 같은 특정 범주의 감정을 초월해, 그저 준타라는 어린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인 발미로와 대결할 때는 일말의 감동마저 느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글의 초반부에 농구공 때문에 자신의 친부를 죽였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역시나 현대문명이 규정하는 선악의 구분을 초월한 캐릭터가 맞는 것 같다.

선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일까?

진부한 질문이지만, 발미로와 코시모를 떠올리며, 책을 덮으며 소소하게 자문해본다.

그 답은 명쾌하게 나오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진부할 정도로 계속 제기되는 주제가 아닐까 한다.

답을 내기보다는, 그 답을 내기 위해 고민하고 생각해보는 행위 자체에도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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