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자 1
수잔 최 지음, 유정화 옮김 / 문학세계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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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알드리치 회고전에서 <그리솜 갱단>을 보고 패티 허스트 사건을 떠올렸다. 부잣집 외동딸이 갱단에게 납치당한뒤 그 중 한 명과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는 시간상의 갭에도 불구하고(영화의 원작인 <미스 블랜디시>는 1938년엔가 나왔고, 영화는 1971년에 만들어졌으며, 패티 허스트 사건은 1973년에 발생했지만), 이런 스톡홀름 신드롬 류의 이야기에는 어느 정도 계급적인 관점이 필수적으로 깃드는 것 같다. 인질이 된 부르주아가 과연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몰아넣은 하층 범죄자/게릴라에게 진심으로 공감하고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인가? 만약 사람은 결코 자신의 토대를 떠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생존 본능과 변덕만을 재차 입증할 것이다. 만약 그 교감이 진심이었다면, 그러나 그 교감이 과연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 패티 허스트가 게릴라들과 함께 은행 강도에 가담했을 당시의 수배 전단지.

그래서 신간 소식란에서 수잔 최의 <미국 여자> 기사를 읽고 얼른 사보았다. "..1974년 미국 언론재벌인 허스트가의 19살 상속녀 패티 허스트가 도시 게릴라 단체인 공생해방군(SLA)에 납치된다. 허스트는 납치된 지 두 달만에 라디오 방송국에 테이프를 보내 ‘민중의 권리’를 요구하는 공생해방군과 뜻을 같이 한다고 밝혔다. 허스트는 이에 그치지 않고 ‘혁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공생해방군과 함께 카빈총을 들고 은행을 털기도 했다. 수잔 최의 소설 ‘미국 여자’는 허스트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수잔 최는 자신이 동양계 미국인(한국계)인 만큼 허스트(소설 속엔 폴린으로 등장한다) 사건과 연루된 일본계 미국인인 실존 인물 웬디 요시무라(소설 속의 20대인 제니 시마다)에 주목한다. 웬디는 허스트 사건의 관련자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돌봐줬던 여성. 소설 속의 제니도 베트남전에 항의하기 위해 징집사무소를 폭파한 뒤 쫓겨 숨어있다 뉴욕주의 외딴 농가를 세내 납치범들과 합류한다. 일종의 도피자인 이들은 서로 부대끼면서 정신적인 공황에 빠져든다. 수잔 최는 그들이 겪는 혁명과 투쟁방식에 대한 혼돈을 그려내고 있다." (from 경향신문)

잠깐 딴길로 새자면, 요즘 들어서 더욱 심해진 책버릇인데, 이제 나는 현대 소설들을 거의 읽지를 못하겠다. 특히 한국 젊은 작가들의 소설. 마지막으로 끝까지 읽은 게 아마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었을 텐데 그걸 읽으면서 들었던 느낌이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 대한 나의 총체적인 거부감에 제일 근접했던 것 같다. 일단 재밌다, 술술 읽힌다, 냉소의 감각이 탁월하다, 그리고 그만큼의 강도로 자기애가 강하다, 결론적으로는 '나는 이 책에서 별로 배운 게 없다'. 꼭 어떤 지식이나 교훈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내가 어떤 텍스트를 선택했을 때 그 안에서 내 굳어진 사고 체계를 깨뜨려주거나 건드려주는 거 하나 정도는 있어줬으면 하는 게 책을 대하는 내 바램이다. 그러나 삼미슈퍼스타즈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읽었고, 다 읽은 다음 다시는 그 책을 들춰보지 않았다. 요즘의 나는 아주 고전이거나, 혹은 현대 중에서도 스릴러/추리/SF/판타지 장르문학밖에 읽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 여자>는 달랐다. 대단히 아름답고 정교하고 묵직했다. 이 책은 많은 현대 소설에서 매달리고 있는, 거의 토하고 싶을 정도의 '사소하고 진부한 숙고'도,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인 '내면으로의 침잠-개인주의로의 환원'도 피한다. 90년대 쏟아져나왔던 한국의 후일담 문학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문학적 성취를 이 책은 해내고 있다. 70년대를 다루되, 단지 70년대의 그 특정 몇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제2차세계대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잔 최는 섣불리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채, 폴린과 제니, 폴린과 그의 가족, 제니와 그의 가족과 연인으로 수많은 잔가지를 뻗어나간다. 그리고 그 잔가지 하나하나는 미국인들의 부서진 영혼의 모자이크를 형성한다. 개인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어느새 전체의 유효한 조각으로서의 개인이며, 전체를 이야기하는가 싶으면 개인에게 스며들어 있는 전체를 말한다. 급진주의 혁명가들의 비일상적인 삶은 그저 미국인들의 잊고 싶은 악몽으로 치부되지 않는다. 그들은 차라리 집집마다 커튼 뒤에 숨어 있는 뒷문같은 존재다. 어느 누가 커튼을 걷어서 그 존재를 발견할진 모르지만, 언제나 열려져 있다. 언제나 집과 바깥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패티 허스트 사건은, 폴린과 제니의 이야기는 어느 새 "봐라, 내가 여기 살았다"는 아버지의 선언으로 이어진다.
...나는'총체성'이 여전히 유효하며 굉장히 훌륭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었던 순간은 그거였다. 폴린과 제니가 결국에 체포되는 순간, "손들어! 꼼짝마!"라는 단말마의 비명같은 경고가 터지는 그 순간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그 이후 예정된 냉혹한 현실의 벽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도 제니처럼 폴린을 용서할 수 있을까....그리고 나서 마지막 장을 읽을 때, 슬펐지만 다행스러웠다. 제니가 살아간다. 그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제니는 살아간다.

"동부는 한때 그녀에게 피난처가 되리라는 기대를 갖게 했었다. 그런 기대를 품었던 것은 그녀가 동부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는 밀착된 관계가 숨이 막히게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너무나 오래 저 사람들과 지내왔던 것이다. 그들이 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의 온몸으로 스며들게 방치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싹 말라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심장이 혼란과 두려움으로 요동치는 걸 느꼈다. 그녀는 혀를 한 여자 속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가 움찔하며 주춤거렸다. 그리고는 다시금 밀어 넣었다. 이럴 때, 처음에는 언제나 욕망에 이끌린다기보다는 고분고분했다. 그리고 나서야 불현듯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최면 같은 그 무엇을 향한 욕망을 걷잡을 수 없이 쏟아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이번에도 그런 식이 될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이것은 반절쯤 이해되는 열에 들뜬 꿈이 될 것이다."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은 행운에 기대어 살아가게 되어 있다."

"아직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며 깊은 밤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기도 했다. 그러면 뭐라고 분명하게 형언할 수 없는 그때의 우울했던 기분이, 어떻게 소리내야 좋을지 몰랐던 그녀만의 깊은 고독이 입을 떡 벌리고 하품을 했다."

"자신을 납치한 사람들에게 합류했을 때 폴린이 분명 깨달았듯이, 그녀 또한 모든 결속에는 그 고유의 위대한 구원적 요소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머지 방식이 아무리 터무니없다 하더라도. 그때 그녀는 폴린에게, 폴린의 격렬한 운명에 스스로를 묶었다."


수잔 최의 데뷔작 <외국인 학생>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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