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피오나 매덕스, 장호연 역. 위즈덤하우스. 2025)의 챕터 6을 읽으면서 눈물을 쏟았다. 단지 그가 죽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그의 죽음을 알고 있지
않나. 게다가 난 대략적인 상황도 이미 읽어서 알고 있었다. 앞서
『라흐마니노프』(리베카 미첼, 이석호 역. 포노. 2023.)를 읽었기 때문이다. 아마 임종의 순간까지 그를 돌본 간호사 올가 게오르기예브나의 글이 너무도 따뜻했기에, 그녀의 글 중 “나도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스스로에게는 불만족스러운 느낌이 남아 있었다. 이
위인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64쪽)는
문장에 너무도 공감했기에 울음이 터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건
그냥 핑계일 뿐이다. 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물은 자기 설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장례식과 이후의 챕터를 읽은 후 그의 삶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 두기로 했다. 이 글은 상당히 길고 두서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사실, 그가 아닌 나를 위한 글이다.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의 노브고르드 지역의
세메노바의 가족 저택에서 육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라흐마니노프』 30쪽) 그의 집안은 쇠락해 가는 귀족 계층이었다. 아버지 바실리 아르카디예비치는 군인이었고 어머니 류보프 페트로브나도 장군의 딸이었으므로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도
군인이 될 수도 있었으나 당시 군사학교의 등록금은 매우 비쌌고, 마침 어린 세르게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의 별거로 그는 외할머니에게 맡겨지고, 할머니에게서 자라는 그 또래의 아이들이 흔히 그러듯 수업을 빼먹고 스케이트를 타러 가는 등 부모의 감독이 없는
상황을 십분 이용했다(『라흐마니노프』 37쪽). 마침내 음악원에서 낙제점을 받고 장학금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어머니 류보프는 세르게이의 아버지 쪽 친척이자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인 알렉산드르 실로티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실로티는 모스크바의 피아노 교사
니콜라이 즈베레프에게 그를 맡긴다. 즈베레프는 몇몇 새끼들’ – 즈베레프의
이름에 ‘야수’라는 뜻이 있어 붙은 별명(『라흐마니노프』 42쪽) – 을
그의 저택에서 머물게 하며 가르쳤고 자주 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한 자리에 제자들을 선보였다. 무엇보다
즈베레프는 세르게이에게 음악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철두철미한 연습 습관, 테크닉뿐 아니라 해석의 중요성, 문화 전반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가르쳤다 – 고정적으로 오페라, 연극, 연주회 무대를 관람했을 뿐 아니라 그의 저택에는 책이 무척
많았고, 그는 제자들이 프랑스어와 독일어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는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세르게이는 표트르 차이콥스키와 세르게이 타네예프의 궤도 내에 편입되었다(『라흐마니노프』 43쪽). 차이콥스키는 1886년 라흐마니노프가 편곡한 <만프레드 교향곡>의 악보를 보고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았고 1889년 그의 시험관이
되어 ‘무언가’를 평가하였는데 5점 만점에 +를 세 개나 덧붙였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50쪽). 또한
라흐마니노프는 이 시기에 타네예프로부터 대위법을 배웠다.

열여섯 살에 즈베레프와의 불화로 저택에서 쫓겨난 뒤 세르게이는 고모 바르바라 사티나에게 맡겨지고, 사촌 나탈리아와 소피아와 함께 살게 된다. 이건 그의 인생에서 두
번째 전환점이 된다. 사틴 집안은 모스크바 남동쪽 광활한 초원지대인 이바놉카에도 저택을 갖고 있었다. 1890년 여름, 이곳에서 네 명의 사틴 남매들 및 실로티를 비롯하여
세르게이의 고모부 알렉산드르 사틴의 누이 쪽 친척인 스칼론 자매들(나탈리야, 류드밀라, 베라)과 함께
지내며 세르게이는 첫사랑을 경험하고 자신의 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열일곱 살에 지은 가곡 ‘비밀스러운 밤의 고요 속에서, 작품
4의 3’은 베라에게 바쳐진 것이다((『라흐마니노프』 65쪽).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도
1891년 여름 이곳에서 완성되었다(이 곡은 1892년 3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세르게이 본인의 독주와 사보노프의 지휘로 초연된다).
1892년 사틴 일가를 떠나 독립한 세르게이는 교습, 연주, 반주자 노릇을 하며 다양한 수입원을 모색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그럼에도
작곡가로서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첫 연주회 장소는 평생 현대 기술에 매혹되어 산 사람답게(『라흐마니노프』 74쪽) 모스크바
전기박람회 현장이었다. 여기서 그는 안톤 루빈시테인 및 쇼팽, 리스트를
연주했고, 자신의 <전주곡 C# 단조>도 처음 선보였다.
이후 1895년에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첫 교향곡에 착수한다. 이미 그는 촉망 받는 신진 작곡가였으므로 사람들의 기대가 컸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81쪽). 하지만 알려졌다시피 1897년 3월에 초연된 이
<교향곡 1번>은 혹평을 받았다. 사실 이에 대해선 여러 가지 말이 많다. 류드밀라 스칼론, 나타사 사티나를 비롯한 측근들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의 형편없는 지휘를 탓한다. 라흐마니노프 자신은 여러 혹평들처럼 ‘퇴폐적’인 면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움’이
문제라고 생각한 듯 하다. 어쨌든 작곡가는 이후 한동안 우울증에 걸려 ‘창작 마비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상반된 주장들도 있다. 단지 조금 의기소침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초연 직후 작곡가는 이
곡을 수정하는 방안을 고심했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89쪽). 그러나 여름을 지나며 세르게이는 점차 침체되었고 아마도 첫사랑 베라의 약혼이 트리거가 됐을 수도 있다고 『라흐마니노프』
의 저자는 짐작한다.
라흐마니노프는 후에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레프 톨스토이와의 만남을 통해 심리적 타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석에서는 톨스토이가 사실은 그에게 독설을 날렸고, 그건
썩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고 했다(『라흐마니노프』 99쪽). 그가 침체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의사 니콜라이 달 박사였고 그는 최면치료사였다. 알려졌다시피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달 박사에게 헌정한다.
첫 교향곡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라흐마니노프는 음악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897년부터 지휘자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1899년에는 런던 앤 여왕 홀에서 <전주곡 C# 단조>를
비롯하여 자신의 곡들을 지휘함으로써 국제 무대에 데뷔한다. 또한 이 시기에 여러 소품들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1896년부터 1900년까지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라흐마니노프』 110쪽)고 얘기하는데, 아마도
대규모 악곡을 쓰지 못함을 말한 것으로 짐작된다. 친구들과 지인들은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마침내 1899년 여름 사틴 집안의 지인이 머물던 크라스넨스코예에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한다. 이 곡은 1900년 2악장과 3악장이 먼저 모스크바에서 초연됐고 1901년 10월에서야 완전한 형태로 작곡가 자신이 독주를 맡고 실로티가 지휘를 맡아 초연된다. 이 곡으로 라흐마니노프는 모스크바의 우상으로 급부상한다.
1902년 그는 사촌인 나탈리아 사틴과 결혼한다. 당시 러시아정교회에서는 사촌과의 결혼을 금했기에 나탈리아와 결혼하기 위해 그는 황제에게 특별 허가 청원을 올리고, 결혼식을 주례해 줄 사제 – 군종 사제 – 를 겨우 구해 군부대 안에서 결혼한다. 결혼을 통해 안정을 얻은
세르게이는 1906년까지 그야말로 훨훨 날아다닌다. 1903년에는
딸 이리나가 태어났고 <전주곡집, 작품 23>이 나왔으며 1904년에는 볼쇼이 극장 지휘자직을 수락해
많은 곡들을 편곡하고 지휘했다. 1904년에는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글린카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후에 1917년까지 이 상을 네 번이나 더 수상한다. 하지만 당시의 러시아 상황은 점점 불안해 지고 있었다. 1905년 1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피의 학살’을 계기로 시작된 혁명은 1906년 라흐마니노프와 그의 가족들이 해외로
향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 여름에 라흐마니노프는 <열다섯
편의 가곡집, 작품 26>을 쓰는데 여기에는 그가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에서 노랫말을
따온 ‘쉬게 하소서’가 포함되어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체호프를 1898년 얄타 연주회에서의 처음 만난
이후로 계속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1907년에는 둘째 타탸나가 태어난다.
라흐마니노프는 1909년에는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동명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죽음의 섬>을 작곡하여 친우였던
화가 니콜라이 스트루베에게 헌정했고, <교향곡 2번>과 <피아노 소나타 1번>에 착수했으며 오페라에도 손을 댔으나 오페라 <몬나 반나>는 결국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악보는 나중에 빌라
세나르에까지 가지고 왔다고 한다.
3번의 겨울을 드레스덴에서 보낸 라흐마니노프는 1909년 러시아로 돌아온다. 이 시기는 러시아 지식인 사회에서 모더니즘이
급부상하던 시기였다. 소위 말해 은 시대(silver age). 라흐마니노프는
모더니즘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에 적대적이었고(『라흐마니노프』 160쪽) 1909년
공개적으로 슈트라우스와 막스 레거를 필두로 한 모더니스트 그룹과 등을 돌려 ‘보수파’ 꼬리표를 달게 된다(『라흐마니노프』 162쪽). 이로 인해 라흐마니노프는 평생 동안 조성 음악에만 집착하는
꼰대 이미지로 비판을 받는데, 사실 『라흐마니노프』 의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이런 시각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난 그 의견에 동의하지만 – 그의 <피아노 협주곡 4번>만
들어도 알 수 있지 않나 - , 이 글에서는 그의 생애에 집중하기로 한다.
1909년 11월 라흐마니노프는
미국 무대에 데뷔한다. 1910년 초까지 이어진 첫 미국 투어는 상업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대성공이었다고
한다. 한편 그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모더니스트들에 의해 고루한 졸작으로 혹평 받는다. 즈베레프 문하 출신이자 모스크바 음악원 동문이었던 스크랴빈은 쿠세비츠키과 함께 모더니즘의 선두 주자로 나섰고
라흐마니노프는 니콜라이 메트너와 함게 그의 대척점에 서게 된다. 당대 음악계에서는 과잉으로 흐르는 모더니즘에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라고 여겼다. 라흐마니노프는 이미 음악계에 자신만의 위치를
확보한 후라,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안정을 찾았다. 특히 1910년부터는 그가 늘 애정을 갖고 있던 이바놉카의 공동 소유주가 되어 수입의 상당 부분을 이바놉카를 유지하고
개선하는 데 쓰게 된다. 1912년에는 첫 번째 자동차를 구입하게 되는데 – 독일산 스포츠카 ‘로렐라이’라고
한다 – 이는 그가 현대성을 무조건 외면하거나 비판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그는 평생 차를 좋아했다. 자동차뿐 아니라 현대 기술에도 늘 흥미를
갖고 있었다.
<열세 편의 전주곡집, 작품 32>(1910)와 <회화적 연습곡집, 작품 33>(1911)을 출간을 비롯하여 지휘자, 피아니스트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한 세르게이는 불확실한 시대의 스타로 확실히 자리매김한다. 그의 연주는 “모든 이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고 다른 그 어떤 음악가도
건드릴 수 없는 심금을 건드려 소리나게 했다”(『라흐마니노프』 197쪽). 하지만 그는 늘 자기의심에 시달렸다(이는 그의 첫 교향곡 실패
이후 그의 고질병 같은 거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그의 뮤즈 역할을 한 마리예타 샤기냔과 편지를 시작으로
교류하게 된다. 참고로, 이는 플라토닉한 관계였다. 샤기냔은 모더니즘에 경악했고, 라흐마니노프에게 목적의식과 사명감을
심어주려고 노력했으며(『라흐마니노프』 199쪽) 1912년에 작곡된 <열네 편의 가곡집, 작품 34>에 영향을 준다(『라흐마니노프』 204쪽). 1912년 12월에
라흐마니노프는 가족들과 로마로 가 작품 35에 해당하는 <종>을 쓰고, <종>과 <피아노 소나타 2번>은 191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된다.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고 라흐마니노프도 징병 검사를 받지만 다행히 징집되지는 않는다. 그는 1915년 부상병들을 위해 쿠세비츠키와 함께 자선연주회를 다섯 차례나 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음악 신념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늘 동료와의 철학적 대화를 기피했지만 1915년 메트너와 “과연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게 가능한지”에 대해 토론을 벌였고 객관적 진리가 있음을 확신하는 메트너에게 감명 받았지만 본인은 美란 절대적으로 주관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라흐마니노프』 216쪽). 1915년에 라흐마니노프는 <철야기도, 작품 37>을 완성했고 4월에는
‘보칼리제, 작품 34에 14’를 완성했는데 이 두 곡은 전쟁의 여파를 음악적으로 숙고한 작품이다.
1915년 4월에는 스크랴빈이 패혈증으로 급서한다. 또 6월에는 타네예프가 숨을 거둔다. 이를 계기로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작품으로만 공연해왔던 그간의 습관을 버리고 스크랴빈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연주회 무대에 서면서 그의 커리어에 중요한 분기점을 맞이한다(『라흐마니노프』 224쪽). 일련의
죽음들과 전쟁의 여파로 그는 작업 의지를 잃고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러나 샤기냔의 도움으로
표도르 솔로구프를 비롯한 상징주의 작가들의 시를 통해 생산성을 회복하고 <여섯 편의 가곡집, 작품 38>을 완성한다.
1916년 10월에 초연된 이 가곡집을 헌정 받은 사람은 그러나 샤기냔이 아닌 니나 코시치라는
젊은 여성 가수였다. 이 관계는 여러 음악사학자들과 대중들에게 이야깃거리를 던져 주지만 – 특히 프로코피예프와 엮여서 – 난 세르게이가 아내를 두고 헛짓거리를
하지는 않았을 거라 믿는다.
1916년 작곡가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라흐마니노프는 대체로 어둡고
사색적인 분위기의 <회화적 연습곡집, 작품 39>를 쓴다. 1917년 2월에는
드디어 볼셰비키 혁명의 불길이 오르고 라흐마니노프는 여름에 이바놉카에 갔다가 당황스러운 경험을 한다. 100여
명의 농노들이 몰려왔고 그 중 나이든 농노들은 라흐마니노프에게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이후
작곡가와 가족들은 이바놉카를 떠나야 했고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 9월 5일 얄타에서
조국에서의 마지막 연주회를 했다.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 E플랫장조>였다. 12월 23일, 작곡가는
가족들과 친구 니콜라이 스트루베와 함께 기차를 타고 스톡홀름으로 출발한다. 그곳에서의 연주회가 명목이었고
짐 속에는 겨우 2천 루블과 최소한의 생필품, 오페라 <몬나 반나>의 악보, 림스키코르샤코프의
오페라 <황금 수탉>의 스코어뿐이었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240쪽).
이후 코펜하겐을 거쳐 1918년 11월
작곡가와 가족들은 미국으로 향한다. 이때 이미 그는 가족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연주자 겸 지휘자로 활동하기로
맘 먹은 상태였다. 1918년 12월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에서
성공적인 데뷔 리사이틀을 가진 그는 언어적 장벽을 넘기 위해 비서를 고용하고 – 차례로 다그마르 리브너, 예브게니 소모프, 니콜라이 만드롭스키 – 에이전트를 두며 스타인웨이의 협찬을 받아 미국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한다.
사실 『라흐마니노프』 의 저자는 이후의 작곡가의 삶을 이전 시기만큼 자세히 서술하지는 않는 느낌이다. 이 시기의 생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에 더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난 두 권 다 흥미롭게 읽었으나 작곡가의 미국 망명 이후의 삶은 사실상 창작자로서의
삶보다는 비르투오소의 삶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작곡가 자신도 이를 매우 괴로워했고 창작에
몰두하고 싶어했지만 – 시즌이 끝날 때마다 “채찍으로 맞는
기분”이라 했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161쪽)
- 가족들의 생활 안정 또한 그 자신에게 매우 중요했기에 그는 경제적인 측면을 늘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 1919년 토머스 에디슨과의 녹음을 시작으로 몇 차례 음반을 녹음했고, 이는
망명 러시아인들에게 향수를 달래고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재료가 되어 주었다. 음반뿐 아니라
그의 연주회는 늘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렇게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자 라흐마니노프는 망명 동포들과
소련에 남은 친지들에게 송금을 하기도 했다. 가족 생활에서는 1924년
이리나가 표트르 볼콘스키 공작과 결혼했으나 1925년 이리나의 임신 중에 볼콘스키 공이 사망하고, 얼마후 첫 손녀 소피아가 태어난다. 이에 딸들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그는 두 딸의 이름을 딴 출판사 타이르(Tair)를 설립한다. 둘째
타탸나는 1932년 보리스 코누스와 결혼했는데, 작곡가의
조카 소피아 사틴 – 처제 소피아와는 다른 인물이다 – 에
따르면 세르게이는 이 결혼이 못마땅했는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13쪽).
작곡가로서 그는 <피아노 협주곡 4번>을 1914년
여름에 착수했으나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가 1925~1926년 겨울 에이전트의 도움으로 연주회를 잠시
쉬고 파리와 드레스덴, 칸 등을 여행하며 완성했다. 또한
합창과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동원되는 마지막 작품 <세 개의 러시아 민요, 작품 41>을 작곡했다. 이
작품들은 1927년 3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초연했으나
<피아노 협주곡 4번>은
혹평을 받았고 이는 작곡가의 불안을 자극해 세르게이가 1941년까지 계속 수정하도록 했다. 1931년에는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 42>를, 1934년에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작품 43>을 작곡했고 1936년에는 빌라 세나르에서 <교향곡 3번, 작품 44>를 완성해 1939년에 개정했다. 또 1940년에는 <교향적
춤곡, 작품 45>가 롱아일랜드에서 작곡됐고 이 여섯
곡이 그가 망명 생활 동안 만든 곡 전부이다.
위에서 얘기했듯 망명지에서의 비르투오소로서의 삶은 고단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연주하는 모든 곡을 분해해 속속들이 이해한 다음 무대에서 재조합하는 헌신적인 스타일이었기에(『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186쪽)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이 와중에 1930년 그는 스위스
루체른에 땅을 사고 그와 아내의 이름을 딴 빌라 세나르를 건축한다. 이 집은 2차 대전 발발 전까지 그에게 휴식이 되어준다. 1938년 8월 25일, 바그너가
살았던 루체른의 호숫가 빌라의 경사진 잔디밭에서 루체른 페스티벌의 서막을 알리는 행사가 진행된다. 여기에는
라흐마니노프를 비롯하여 토스카니니, 호로비츠, 브루노 발터
등 쟁쟁한 인사들이 참여한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50쪽).
그의 쉴 새 없는 연주 일정은 당연하게도 건강 악화로 이어졌다. 만성적인 요통과 손의 신경통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건 1935년의
일이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36쪽). 1938년에는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편지를 써서 처방을 받기도 한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45쪽). 하지만 가정 경제에 대한 걱정은 그를 지속적인 연주회로
내몰았고 –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총 1,457회 무대에 섰고
그중 1,189회는 망명자로서였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40쪽) –
결국 1943년 2월 22일 연주회를 취소하고 기차로 당시 그가 살고 있던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와 병원에 잠시 입원했다가 편안하고 익숙한
집으로 돌아와 3월 28일 영면한다.
이렇게 길게 그의 생을 얘기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뭐 그리
중요할까. 아니, 내 말은 그가 스트라빈스키가 말했듯 “6피트 반(약 198센티미터)짜리 우거지상”이든, 평론가
에릭 블롬이 평가했듯 “자신의 시대에 전혀 속하지 못”한
사람(『라흐마니노프』 16쪽)이든 그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휘자 쿠세비츠키와 ‘러시아 음악 출판사’를 차려 러시아
작곡가들이 수입을 확보하고 특히 유럽 대륙 내에서 저작권 지위를 확립하도록 했다(『라흐마니노프』 155쪽). 그는 곤궁에 처한 고국을 위해 자신의 연주회 수익금을
기꺼이 내놓았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가 탱글우드의 버크셔 페스티벌에서 ‘축하곡’으로 연주된 것에 마음 상해하는 사람이었으며(『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13쪽), 니콜라이 메트너, 글라주노프, 콘스탄틴 발몬트를 비롯하여 친분이 있든 없든 러시아 출신 음악가 및 예술가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들에게 돈을 보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워싱턴 국회도서관의 라흐마니노프 아카이브에는
그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보낸 수많은 감사 편지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115쪽).
그는 심지어 자신보다 늦게 미국에 온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책을 출판사 타이르에서 출간하려고도 했다.
그가 출판사를 세운 목적은 비단 딸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려는 것만이 아닌 출판에 어려움을 겪는 러시아 작가들의 신간을 망명자 사회에
소개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14쪽)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는 음악을 사랑했고 음악에 헌신했다. 그는 <<롱비치 인디펜던트>>지와의 1943년 인터뷰에서 “나는 음악에서만 나 자신이 됩니다. 음악은 평생을 바치기에 충분하죠. 하지만 평생을 바쳐도 음악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38쪽)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또한 그는 조국을 늘 사랑했다. “나는
러시아 작곡가이며, 내가 태어난 나라가 내 기질과 관점에 영향을 미쳤소. 음악은 내 기질이 만든 것이오. 그러니 러시아 음악이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11쪽)라고 얘기했으며, 그가
머무는 집은 늘 러시아풍으로 꾸며졌고 동포들을 늘 도왔으며 심지어는 러시아 의사와 간호사에게만 진료를 받았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 누워서도 러시아 전선의 소식을 늘 궁금해하며 러시아군이 몇몇 도시를 재탈환했다는 소식에 “신이여, 감사합니다. 부디 그들에게 힘을 주소서!”라 말하기도 했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59쪽)
<<유타 이브닝 헤럴드>>
1938년 12월 6일자에 실린 리뷰에서 얘기했듯
“라흐마니노프는 라흐마니노프이며 거의 불멸의 존재”(『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53쪽)이다. 내가 그의 죽음을 읽고 눈물을 쏟은 까닭이기도 하다.
난 이 글을 미하일 플레트네프가 연주한 <전주곡 C# 단조>를 비롯한 전주곡들을 들으며 썼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피아노 협주곡 3번>과 <교향곡 2번> 이지만 오늘은 라흐마니노프가 미국에서만도 1,400번 이상 연주했다는, 그래서 지겨워했다는 이 곡이 계속 듣고
싶었다. 라흐마니노프에게, 그리고 그를 연주한 수많은 음악가들에게
감사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