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일곱채의 빈집
  • 사만타 슈웨블린
  • 13,500원 (10%↓750)
  • 2024-09-06
  • : 140

.

  창비가 출간하는 외국 작품 번역 소설책을 잘 보면, 창비가 의외로 앤절라 카터 같은 고딕소설에도 흥미가 있는 것 같다. 일찍이 앤절라 카터 그룹에 가입원서를 내기는 했는데 회원으로 받아주었다는 증명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어떻게 됐는지 오리무중인 나는, 창비가 발굴한 다른 한 명의 고딕 작가, 1978년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생한 사만타 슈웨블린의 책을 관심있게 읽고 있다. 《일곱채의 빈집》도 슈웨블린에 대한 관심의 일환으로 골라 읽었다. 장편 <리틀 아이즈>와 소설집 《입속의 새》도 흥미유발요인 인자가 가득했으나, 《일곱채의 빈집》이 단연 재미있다. 이 정도면 21세기형 고딕으로 쳐도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시대가 지나면서 고딕이 점차 엽기, 잔혹으로 넘어가 이젠 엽기나 잔혹 장면이 등장해야 고딕소설인 듯한 기분이 드는 시절이 되었지만, 슈웨블린의 이번 소설집은 딱 내가 바라는 수준의 고딕소설이라 흡족했다.


  이 소설집 《일곱채의 빈집》에 단편 <일곱채의 빈집>은 실려 있지 않다. 대신 책 속의 일곱 단편이 전부 집과 관련해서 소름이 오소소소 끼치는 것들이다. 그래서 일곱 작품 → 일곱채의 빈집으로 제목을 짓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모든 작품이 집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제일 앞에 배치한 작품 <그런 게 아니라니까>는 뇌활동에 틀림없이 조금 문제가 있는 여성이 십대 중반의 아들을 차에 태우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부유한 동네로 집구경을 가서 생긴 일을 썼다. 근데 하필이면 어제 밤에 비가 왕창 와서 아스팔트가 아닌 모든 길이 푹 젖은 날. 운전하고 가다가 비포장도로에 접어들어 그만 진흙탕에 푹 빠지고 만다. 이게 첫 장면. 그래서 첫 문장이 “아, 이제 망했네.”

  진짜 망하지는 않았다. 상당히 깊이 빠지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서 탈출에 성공한다. 그래 길을 따라 갈 수 있는 곳까지 갔더니 나오는 건 막다른 골목. 이제 뒤로 다시 돌아가야 할 터, 엄마는 부잣집의 넓은 잔디밭 위로 차를 몰고 올라가 크게 원을 그려 왔던 길로 가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정말로 잔디밭, 아주 잘 가꾸어 놓은 론 그라운드 위로 이미 진흙투성이가 된 타이어 자국을 깊숙하게 내 놓았으니, 한 마디로 잔디밭을 거덜내 버린 거다. 처음부터 이 모자를 쳐다보던 꼬마가 득달같이 집으로 들어가더니 자기 엄마한테 일러바쳤겠지.

  이래서 일이 커진다. 저 잔디밭을 어떻게 하나. 집주인 여자는 잔디밭 보상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하고, 엄마는 뇌 운동이 정상이 아니라 횡설수설하는데, 그걸 본 여자가 앰뷸런스를 부르려 한다. 아들은 잔디 아래 진흙에 빠진 자기네 차를 빼기 위하여 타이어가 밟고 올라갈 수 있도록 집 너머 작은 숲 속으로 나무조각을 구하러 간다. 여자가 보기에 엄마의 증상이 심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에 들였다. 이게 집주인 여자한테는 크고 큰 패착. 약간의 시간이 지나 몸의 상태가 조금 좋아진 엄마는 진흙이 무지 많이 묻은 신발을 신은 채 서슴없이 고급 양탄자가 깔린 실내 여기저기를 왔다갔다 하면서 눈에 딱 띄는 설탕 그릇에 유독 관심을 둔다. 그것뿐만 아니다. 심지어 부부 침실까지, 부부 침실에 딸린 욕실까지 진출한 엄마.

  도무지 어떻게 엄마를 저지해야 하는 지 모르고, 이해도 할 수 없는 집주인 여자의 속은 어떻겠어? 그냥 속만 터지려고? 천만에. 갑자기 눈앞에 이런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상상할 수 없는 짓만 하고 있으니 속이 터지는 건 다음으로 하고, 이제 저 여자가 나한테, 그리고 내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할까? 이런 두려움, 두려움을 넘어 공포 같은 것이 집주인 여자를 완전히 채우지 않았을까? 그래도 알고 보면 여자가 정말 부처님 가운데토막이다. 물론 끝까지 읽어야 왜 그런 줄 알 수 있겠지만. 힌트 하나 드리지. 이 집을 구경하러 다니는 모자도 자기 집이 있다. 일이 생기고 며칠 후, 모자의 집에 초인종이 울리고 문을 열어주니, 잔디밭이 거덜난 부잣집 여자가 찾아왔다. 그리고 사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 여자가, 며칠 전에 남의 집에 무단으로 들어와 카펫에 함부로 진흙을 묻힌 모자의 집 안을 뒤져보기 원한다. 물건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집 안을 잔뜩 어질러 놓기를 원하고, 상자에 있는 물건을 죄다 꺼내 발로 지근지근 밟고 아무 상자에나 다시 집어넣은 다음 바닥에 쓰러져 울기를 원한다. 이것들을 다 한 뒤에, 그러고나서, 그동안 밖에 나가 있던 엄마가 집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란다.


  조금 약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당신은 엽기, 잔혹 애호가이지 고딕 애호가라고 주장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거다. 사만타 슈웨블린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산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좋은 환경Good Air이란 뜻을 가진 남미 최고의 도시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지만 세계적으로 범죄율이 높은 도시이기도 하다. 밤이 내리면 특히 여성 혼자 거리를 걷는 건 극도의 우울증에 걸려 자살을 각오하지 않으면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라서, 자기 집 주변에서 살인사건이 나는 것도 그저 그러려니 하는 정도, 라고 들었다. 누구한테? 여간해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곳, 유튜브에서.

  책 속에서도 죽은 사람, 범죄에 의하여 피살된 사람들도 등장한다. ‘들’이라고 복수형을 썼으니 한 명 이상이다. 그러나 죽이는 장면, 당장 죽지는 않더라도 죽을 정도의 상해를 입히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이 독자로 하여금 공포 또는 공포의 낮은 단계인 두려움을 준비하는 느낌이다.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것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기도 하는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숨소리>였다. 84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니 조금 긴 단편, 중편이라고 해도 좋겠다.

  주인공은 롤라. 결혼하고 57년동안 같은 남자와 살고 있다. 스무 살에 결혼했다고 쳐도 대략 일흔일곱 살. 그러니까 적어도 77세의 할머니. 지금 가장 바라는 건 죽는 일이다. 5분 이상 서 있기도 힘들만큼 척추에 문제가 있고, 호흡도 가빠져 평소보다 더 많은 공기를 들이마셔야 숨이 쉬어질 때가 잦다. 이럴 때는 숨을 뱉으면 자주 휘파람 같이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 롤라의 기운도 빠지게 만든다. 한밤중에 침대에서 화장실로, 화장실에서 다시 침대로 돌아갈 때, 걷는 일만 해도 힘들어 미치겠는데, 이 숨소리까지 보태면 정말 사는 일 자체가 싫어진다. 이런 것 말고도 요실금 같은 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거라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위안삼아 그렇게 믿는다. 소망대로 죽는 것만 남았는데, 그것이 이루어지면 감정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한 번 이상의 커다란 타격을 받아야 하는 것도 이해하고 있고,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기꺼이 그 타격을 받을 준비는 하고 있다.

  하지만 롤라에게 더 치명적인 것은 기억의 소멸이다. 당연히 롤라 자신은 자기가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상당한 부분을 알지 못하고, 만일 안다고 하더라도 그걸 언제 말했고 행동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만일 새로 이사와 얼마 되지 않은 옆집 싱글맘 집의 십대 사춘기 아들이 자기집 세면대 파이프를 고친다고 롤라의 남편한테 렌치를 빌려가, 그걸 가져왔는지, 아닌지 모른다. 아이가 불량한 친구하고 롤라네 시건장치가 되지 않은 차고에 무단으로 들어와 중요한 장비를 가져갔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밤에 창문으로 보이는 롤라네 집 생울타리 아래 옆집 아이가 혼자 앉아 있었는지, 둘이 앉아 있었는지, 아니면 혼자 누워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게 거기서 잔 것인지, 누구한테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고 있었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미 죽어 있는 상태였는지 롤라는 기억할 수 없다. 페데르손 박사가 처방해준 약이 도무지 어떤 증상을 완화하기 위한 약인지 모른다. 더구나 롤라의 소원대로 이제 삶의 마지막 날이 다가올 때까지 병상의 자신을 돌보아줄 것으로 굳게 믿어왔던 남편이 갑자기 급성 심근경색인지, 급성 뇌졸중인지로 사망하자, 롤라의 모든 병증은 급전직하, 나락으로 떨어지고, 롤라의 생활과 행동의 기록과 결과는 완전히 미궁에 빠져 버린다.

  당사자인 롤라는 그렇다치고, 그걸 건건이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새롭게 이사를 오자마자 크고 큰 불행을 당한 옆집 여자는 어땠을까? 롤라는 옆집에 닥친 불행하고 전혀 관계가 없을까? 그거야 읽어보면 알지.

  이제 슈웨블린 클럽에 가입을 할 때가 됐나 보다.


.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