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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
  • 베로니크 오발데
  • 10,800원 (10%↓600)
  • 2011-03-08
  • :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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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쿠르-단편소설 상에 빛나는 《한낮의 불운》, 그 청명하고 경쾌한 비극에 반해 오발데의 다른 작품을 찾다가 초기 장편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을 골랐다.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한 오발데의 책이 세 권 있는데 2011년에 나온 이 책이 첫번째, 이제 2015년에 출간한 <불한당들에게도 은총이>만 읽으면 우리말로 된 오발데는 다 읽는 셈이니 그건 좀 아꼈다가 나중에 읽어야겠다.

  책을 읽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이렇다. 《한낮의 불운》이 마음에 들어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을 찾아 읽었고, 이게 또 재미있어서 <불한당들에게도 은총이>까지 다 읽으면 더 읽을 것이 없어, 그것이 아쉬워 조금 나중에 읽을 거라고 남겨 두는 것. 그러다 어느 날, 도무지 어떤 책을 읽을까, 생각이 나지 않을 때 불쑥 찾아 있는 책.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바로 그렇다. 앨리스 먼로의 《런어웨이》.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의 주인공은 랜슬롯. 정식 이름이 랜슬론 루빈스타인. 척 보면 유대인인 거 아시겠지? 근데 유대 정체성에 관한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첫 문장을 읽어보면 다른 유명한 작가의 첫 문장의 패러디가 아닌까,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오늘 밤 랜슬롯의 아내가 죽었다.”


  랜슬롯은 출판할 책의 원고를 교정하는 편집자이다. 근데 출판사에 상근 근무하는 정규직이 아니라 회사의 사환이 교정쇄를 가져오면 초벌, 재벌 정도까지 교정을 하는 프리랜서, 그러니까 교정 외주업자인 것처럼 보인다. 일을 전적으로 집에서만 하니 랜슬롯의 하루는 거의 완벽한 루틴에 기대 이루어진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 잔 내려 샌드위치를 만들어 같이 마시고,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 엘리자베스가 출근하면 원고를 교정하다가, 점심 샌드위치를 먹은 후 따듯한 카메론 시를 산책하고 들어와 오후 일을 한다. 그러면 아내가 돌아온다. 하나 있는 불만은 아내가 랜슬롯을 마치 다섯 살 먹은 초등학교 아이들인 것처럼 하나하나 가르치려 든다는 거. 어투는 물론이고 고개를 기울이거나 흔드는 것을 비롯한 제스처까지 다 그렇다. 아이 없는 부부. 결혼 19년차. 이 가운데 15년 정도는 섹스리스로 살았다. 드라이하지만 간편해 좋다.

하루는 교정을 마치고 출판사에 전화해 사환을 보내지 말고, 날도 좋으니 자기가 직접 원고를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꽃피는 봄. 랜슬롯의 세계는 가변적으로 불안정해서 사물들이 갑자기 나타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오늘 랜슬롯은 집을 나오면서 문득 신발장이 없어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기 신발은 다른 신발장에 있으니 크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괜히 말했다가 엘리자베스한테 또다시 다섯 살 아이 취급받기는 싫다. 길가 보도를 흥얼거리며 걸을 때는 벌써 신발장이 사라진 건 머리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꽃가게에 화사한 꽃들이 다양하게 피어 있다. 손짓으로 꽃을 살 생각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는 한동안 꽃 구경에 몰두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몇 발자국을 걸었을 때, 하늘에서 무엇인가 손바닥보다는 확실히 큰 물체가 떨어진다는 걸 어쨌거나 알았는데, 그걸 피할 순식간적 반응까지는 하지 못해 철퍼덕, 제대로 머리에 맞았고, 엄청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여간 꽤 큰 충격을 받았다. 부드러운 생가죽으로 만든 여성용 하이힐. 뾰족한 힐에 맞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지 이마와 관자놀이 사이가 벌겋게 자국이 났다. 올려다보니 3층 창문이 열려 있었다.

  원래 성격 같았으면 이 정도야 그냥 지나가버리고 말았을 텐데, 이날 따라 랜슬롯은 건물의 현관으로 들어가 위험해 보이는 유별난 계단을 올라 신발을 버린 창문이 있는 방처럼 보이는 “이리나 아무개”라고 쓴 문을 두드렸더니 역시 스무살 정도, 딱 랜슬롯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성이 문을 열어 주었다. 열린 창문으로 던진 하이힐에 맞았다고 항의하니까, 이리나로 보이는 여자는 아파트 안쪽으로 몸을 반쯤 돌려 소리를 질렀다.

  멍청이 1호, 여기 멍청이 2호가 있어. 자기 머리 위에 떨어진 네 애인 구두를 주워 왔단다. 혹시라도 내 눈에 띌까봐 창밖으로 그걸 집어던진 거니?

  이리나의 남자가 그의 애인 구두를 던진 거다. 랜슬롯은 조만간 남녀 사이에 큰 싸움이 날 것으로 예상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하지만 랜슬롯을 쫓아 건물 밖으로 뛰어나온 이리나가 랜슬롯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리나를 처음 바라본 순간, “그는 소리 없는 신음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지는 베로니크 오발데의 외모 묘사는 생략하자.


  이렇게 해서 양심적이고,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는 고립적인 랜슬롯은, 학생들과 며칠 동안 야외학습을 다녀와 피곤했을 엘리자베스에게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해 남자를 쫓아낸 이리나의 아파트로 들어간다. 작은 여행가방에 속옷과 양말, 칫솔과 면도기만 넣은 채로.

  이리나의 방문을 열자마자, 15년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랜슬롯의 성기와 심장을 뛰게 만드는 네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인조가죽 코르셋, 검은 새틴 장갑, 반짝이는 핫팬츠, 12cm짜리 하이힐. 네 가지 다 랜슬롯을 위하여 입고 기다린 것들. 그러나 랜슬롯의 귀에 속삭이는 또다른 랜슬롯.

  누가 저 모든 의상을 저 여자에게 주었을까? 널 만나기 전에 누구를 기쁘게 해주려고 저런 정신나간 의상을 산 걸까?

  일단 상관없다. 다 과거의 일이니까. 15년 만에 생애 두번째 만난 여자하고 하는 섹스. 이런 습한 만남과 접촉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것이 의아하다.


  그래서 오늘 밤 죽은 랜슬롯의 아내는 어떻게 됐느냐고? 엘리자베스? 아니다. 이리나는 자기가 이리나 루빈스타인이 되고 싶다고 랜슬롯의 귀에 속삭였고, 따듯한 날씨의 대도시 카메론에서 이누이트들이 살 법한 저 북쪽 밀레나 시의 교외 외진마을 카타노로 이사해서, 조촐하게 결혼했다. 그러니 오늘 밤에 죽은 아내는 첫번째 아내 엘리자베스 루빈스타인이 아니라, 두번째 젊은 아내 이리나 루빈스타인. 그녀, 자기는 랜슬롯이라는 웃긴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가볍고 짧게 ‘폴’이라 부르겠다고 해서 랜슬롯을 폴이라고 부른 이리나는 얼어붙을 듯 춥고 우박이 몰아치는 날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오모코 다리에서 시냇물 쪽으로 떨어져 죽었다.

  이리나의 직업은 동물 사진 촬영. 이번에는 곰을 찍으러 몇 주 일정으로 슬로베니아에 간다고 해서, 랜슬롯이 15분 전에 차로 이리나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그래서 아직 공항 로비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거나 금방 비행기를 탔지만 아직 하늘을 날지는 않을 터인데, 자기가 운전하는 차가 다리에서 추락해 얼음을 깨고 들어가 익사했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랜슬롯이 이리나에 대하여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분명히 아빠는 일찍 세상을 떴고, 엄마는 저 시골에서 모녀의 정을 끊은 채 혼자 살고 있다고 했건만, 이 추운 날, 아직 이리나의 검시 보고서도 나오지 않은 날, 신문을 보고 알았다는 이리나의 아버지가 집에 찾아왔다. 예순이 넘어 보이는 남자. 키가 크고 마른 사람. 아내에게는 낚시하러 간다고 하고 3일 일정으로 밀레나에 왔다고. 그는 이틀 동안 랜슬롯과 이야기하고, 이리나가 빠져 죽은 오모코 다리 아래에서 낚시도 했다. 그가 정말 이리나의 아버지가 맞을까? 랜슬롯이 그에게 다가가 이름을 묻는다. 당신 이름이 뭔가요?

  파코. 파코 피카소.

  피카소? 이리나의 이름이 이리나 피카소였을까?

  2백여 미터 떨어진 유일한 이웃. 그집 딸하고 친하게 지내 아이 트랄랄라가 크는 것을 보는 재미로 살았고, 이리나는 트랄랄라를 보면서 또 아이를 뭐하러 낳느냐고, 랜슬롯이 바라는 걸 무질러왔다. 트랄랄라의 아버지는 사냥개를 키워 파는 것이 직업이다. 엄마는 2년 전에 죽어서 둘이 살고 있다. 어느 날 트랄랄라가 사라졌다. 황당한 랜슬롯과 이리나. 트랄랄라는 학교 갈 나이가 되어 고모가 데려갔단다. 황당한 이리나가 트랄랄라의 아버지, 바이엘을 찾아가 이야기 좀 하겠노라고 가더니 무려 일곱 시간을 함께 있다가 왔다. 의심스러운 랜슬롯. 그에게 이리나가 말한다. “우리는 야수처럼 사랑을 나누었어.”  “잔인하네.”  “이런, 우리 자기가 유머 감각을 잃어버렸네.” 트랄랄라의 아버지이자 나중에 바이엘이라는 이름을 쓸 남자는 랜슬롯과 이리나가 떠나온 도시 카메론으로 간다고 한다.

  그가 누굴까? 3층 창문에서 황급히 다른 여자의 하이힐을 던진 그 사람일까?

  이리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의 별, 나의 보물, 나의 빛, 이리나. 랜슬롯은 이미 죽어 화장해 재만 남은 이리나를 알기 위하여 큰 모험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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