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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단 두 권의 중단편집으로 세계만방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중국계 미국인 과학자이자 소설가. 《숨》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출간하고 17년만인 2019년에 낸 두 번째 소설집으로 모두 아홉 편의 중단편소설을 실었다. 책 두 권의 터울이 무려 17년. 그래서 두 권의 작품 속 분위기는 무척 다르다. 만일 누가 내게 어떤 책이 더 마음에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숨》이 더 흥미롭고 사색적이었다고 단박에 대답할 거 같다.
그러나 아쉽게도 책을 읽으며 단 한 줄의 메모도 하지 않아, 3일이 흐른 지금 독후감을 쓰려 하니 막막하다. 아홉 편 모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개별적으로 특정 작품마다 어떤 식으로 인상 깊었다고 짚어서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읽은 즉시 써야 하거늘 하필이면 그날 오후에 두부부침에 소주와 맥주를, 다음 날엔 생선구이에 소주를, 그 다음 날에는 또 불고기에 소주와 맥주를 퍼 마셔, 오늘 아침에야 겨우 랩탑을 꺼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아무래도 알코올 의존증이 점점 심해지는 거 같아서 걱정이다. 나도 술 끊고 싶다고!
아홉 편의 중단편 가운데 호오好惡… 호오? 좋고 나쁨? 그런 거 없다. 전부 다 좋다. 그래서 호오가 아니고 좋아하는 정도가 제일 컸던 작품을 고르라고 한다면, 내 주제에 결정해서 말하기 힘든 조건이지만, 표제작인 <숨>과 마지막 순서에 실린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을 두고 한 두어 시간 책상 위에 손가락만 톡톡 두드리고 앉아 있을 거 같다.
하지만 책을 열자마자 처음으로 읽을 수 있는 단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부터 쇼크는 시작한다. 이 짧은 단편의 분위기는 여지없이 <아라비안 나이트>. 다음 날 새벽이 밝아오자마자 언월도의 칼날에 목이 댕거덩 날아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생글생글 웃으며 칼리프한테 옛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는 셰헤라자드의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가 아니라, 푸와드 이븐 압바스라는 이름의 바그다드 상인이 연금술사 바샤라트를 만나 경험한 일을 아뢰는 내용인데, 그게 놀랍게도 시간여행, 타임머신, “백 투더 퓨처” 이야기다. 우리는 그동안 H.G. 웰스가 19세기 말에 <타임머신>을 발표한 이후 숱하게 다양한 버전의 시간 여행 이야기를 읽고, 보고, 관람해왔지만, 아마도 주된 이야기는 주인공의 불운한 현재를 바꿀 수 있는 과거의 행적을 수정한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작가 복거일이 쓴 <역사 속의 나그네> 역시 마찬가지. 주인공 이언오는 26세기에서 5백년 전인 21세기로 날아온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하는데, 기계의 오류인지 또다시 5백년 전인 16세기 말 조선에 불시착하니, 임진왜란이 터지기 10년 전. 처음 16세기에 도착한 이언오는 자신의 행동과 소지품 때문에 시간에 흔적을 남겨 시간줄기가 변형, 기존의 역사가 바뀌게 될 수 있음을 충분히 이해해서 그냥 곱게 죽기를 원하는 걸로 시작한다. 즉 시간 여행으로 과거 원인이 바뀌면 미래의 결과 역시 바뀐다는 것이 그동안의 타임머신 작품들의 공통점이었는데, 테드 창은 이런 개념에 반대한다.
테드 창, 강봉남姜峯楠 씨는 보다 나은 현재 또는 행복을 위하여 과거를 수정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충분히 동의를 하지만, 백 번 과거를 바꾸어 보아도 결코 현재는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20년 전으로 돌아가 한 변곡점에 충격을 주어 시간 줄기를 흔들어봤자, 20년이라는 세월이 시간여행자가 원하는 대로 시간줄기가 흐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건, 변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이 그렇게 비극적인 건 아니라는 점이다. 누가 알아? 더 비극적 처지로도 빠져버릴 수 있었는지.
그런데, 이런 면에서 읽으면, 과거가 어땠는지 인생은 미리 정해진 경로를 따라 갈 뿐이라는 운명론과 만날 수밖에 없다.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어서 인간은 그냥 그대로 걷게 디자인되어 있는 걸까? 그것 참. 나는 모르겠다. 이젠 별로 관심도 없다. 슬슬 도가 트기 시작하는 거 같다.
두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인 <숨>이, 이 책에 실린 것들 가운데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SF 아닌가 싶다.
“공기 혹은 아르곤이라고 불리는 기체가 생명의 원천이라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작품은 이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아르곤? 원자번호 18번. 내가 배울 당시에는 원소 주기율표의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불활성 기체”라고 배웠는데 요즘엔 “비활성 기체”라 하는 모양이다. 발음 상 조금 문제가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농담이다). 어쨌든 다른 원소와 거의 반응하지 않는 기체라서 높은 순도를 유지해야 하는 산업 기계에 많이 사용한다. 불활성 기체 가운데 공기 중에 가장 흔하다. 즉 가격이 저렴해 그나마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비활성 기체.
문제는 이런 아르곤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설정. 이쯤 되면, 즉 물이나 산소가 아니라 불활성 기체가 생명의 원천이라는 가정이라면, 이 생명체가 탄소를 기반으로 하는 유기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어야 했다. 그러면 뭘까? 뭐긴 뭐야, 무기 생명체, 즉 인조인간 로보트? 또는 지능을 가진 외계 생명체. 아니면 스타니스와프 렘 식으로 기계가 스스로 진화해 발생한 기계 생명체. 어느 것이라도 무방하다. 이 생명체 역시 허파 호흡을 한다. 그러나 호흡의 방식은 유기 생명체와 다르다.
“우리는 매일 공기를 가득 채운 두 개의 허파를 소비한다. 매일 가슴에서 빈 허파들을 꺼내 공기를 가득 채운 허파들로 교환하는 식으로 말이다.”
마치 잠수부가 등에 짊어지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 산소통을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게 가슴 속에 두 개가 있어서 매일 아르곤 가스가 만땅 채워진 허파로 교체해주어야 한다니 독자는 초장부터 “우리”가 기계 등의 무기 생명체라는 것을 알아챘어야 마땅하거늘. 강봉남 씨도 독자를 헷갈리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를 계속 “사람”이라 칭하는 바람에, 뭐 변명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숨>의 핵심은 기계 인간의 생존 방식이 유기생명체인 진짜 인간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점. 그러니까 태드 창은 아르곤을 생명의 원천으로 하고, 몸체를 이루는 로드rod 사이에 어떤 윤활 물질도 필요하지 않은 기계를 통해 사람들의 생존과 소멸에 관해 사색한 결과물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이자 화자 ‘나’인 무기 생명체, 스스로 진화한 기계 생명체, 또는 로봇일 수도 있는 해부학자 ‘나’는 발견한다.
“내가 매일 새로운 허파 한 쌍으로부터 끌어내는 공기의 양은 내 팔다리 관절과 내 주위의 대기에 내가 더하는 공기의 양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중략)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는 이 우주의 압력 평형화에 기여하고 있다. 생각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치명적인 평형상태의 도래를 촉진하고 있는 것이다.” (p.78)
운동/열 에너지를 말하고 있는 듯한데 자신의 운동과 생각을 포함한 에너지의 소비와 허파를 통한 보충이 서로 평형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간다는 의미. 근데 평형이란 건 뭘까? 정지. 그리하여 평형상태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이걸 발견한 ‘나’는 어떻게 했을까?
“다른 상황에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거리로 뛰쳐나갔겠지만…” (p.78)
생각나는 옛 사람 한 명 생각난다. 퍼뜩 진리를 깨닫자 욕탕에서 벌떡 일어나 알몸으로 거리를 내달리며 이렇게 외쳤던 사람.
“유레카!”
테드 창은 SF 소설 작가로 이름을 높였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테드 창, 강봉남 씨를 SF 작가로 국한시킬 수 있을까, 국한시켜야 할까를 생각해보았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몰라도 이 책 《숨》은 비록 SF의 외피를 입었어도 삶과 인생과 인간에 대한 진지한 에세이를 읽는 듯했기 때문이다.
독후감 초장에 얘기한 마지막 수록 작품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 대표적이다. 프리즘. 백색광을 투과하면서 빛이 분산해 여러가지 색으로 변하게 하는 삼각기둥처럼 생긴 거. 여기서 방점은 빛이 굴절하며 얼마나 굴절하는지에 따라 다양하게 분산한다는 것인데, 테드 창은 이걸 ‘평행공간으로의 이주로 가게 할 수 있는 매개물 또는 장치’로 해석했다.
이 작품이 내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세상의 70억명 모두 개별적으로 다양한 평행우주 또는 평행공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걸 곧이곧대로 그냥 평행우주/평행공간이라 생각하는 것도 재미겠지만, 삶과 인간에 대해 생각할 거리로 여겨도 의미있는 생각할 거리가 될 수 있다.
이런 생각 거리가 이 책 《숨》에 가득하다. 편마다 숙고와 사색의 흔적이 들어 있으니 이 작가가 두 번째 책을 17년 만에 낸 것도 일견 이해할 수 있을 터. 이이는 SF 작가라기 보다 과학 철학자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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