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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킵
  • 제니퍼 이건
  • 11,250원 (10%↓620)
  • 2011-11-21
  • :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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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집중해서 읽고 있는 작가 가운데 한 명. 제니퍼 이건. 퓰리처상을 받은 발랄한 <깡패단의 방문>에서 시작해 거의 데뷔작이라고 봐도 좋을 소설집 《에메랄드 시티》에 이어 2006년에 출간한 <킵>까지 왔다. 앞에 읽은 두 작품과 많이 다르다.

  나는 작품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오직 작가의 이름 하나만 가지고 선택해 읽었는데, 그래서 읽는 도중에 적어도 두 번 “이게 뭐야?” 크게 판을 뒤집는 광경을 제대로 감각할 수 있었다. 아예 노골적으로 대놓고 작품이 픽션이라 선언한다. 이런 건 읽을 때마다 메타 픽션인 걸 알면서도 꼭 깜짝 놀란다.


  대니 킹.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다. 킹의 아버지는 여러 형제 가운데 한 명이었고, 형제들끼리 우의가 돈독하여 자주 가족 모임을 가졌는데, 대니는 사촌들 가운데 하위, 레이프에 관한 기억이 제일 많이 남아 있다. 그렇다고 세 명이 “함께” 즐거웠다는 말이 아니다. 개별적으로 두 명의 사촌하고 친했다는 말이지. 둘 중에 특히 하위하고. 하위는 자기가 만든 아이들 게임 “터미널 제우스”에 대니를 끼워주어 어린이 시절에만 공감할 수 있는 독특한 놀이를 즐기게 해 주었는다. 하위는 많고 많은 사촌들 가운데 딱 한 명, 킹 가문에서 입양한 사촌이라 삼촌들이나 고모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척했고, 사촌들은 은근히 왕따를 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집단 놀이를 해도 하위만 끼워주지 않거나 소위 ‘깍두기’ 역할만 하게 만드는 식으로. 그러니 성격이 좀 비뚤이지겠지? 그래도 놀이를 만들 만큼 머리가 좋았는데, 그게 사촌들 눈에는 괴짜에다가 루저로 보여 날이 갈수록 따돌림이 심해져, 끝내 대니 역시 하위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십대의 하위에게는 일종의 외상성 경험으로 작용을 해 하위가 가지고 있던 양순함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를 성마르고 노심초사하는 성격으로, 환상적으로 망가졌다는 소문이 킹 가문에 흘러 들어왔다. 마약 복용으로 체포되었다고? 그런 애를 입양하다니 다 노엄 잘못이야. 유전자 잘못이라고. 우리 집안에 없는 유전자를 갖고 끼어 들어와서 말이지.

  하지만 하위는 일찌감치 집을 나가 좋은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주식 채권 딜러 일에 혁혁한 전공을 쌓아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등에 비견하는 업계의 월계관이란 월계관은 다 수집해버렸고, 재산 역시 무지막지하게 많은 백만장자의 반열에 올라 서른다섯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돈벌이에서 은퇴해버리고 보다 그럴듯한 삶을 위하여 폴란드인지, 오스트리아인지, 체코인지, 독일인지 모를 곳에 있는 9백년 된 고성을 사서, 그걸 호텔로 리빌딩해 편안한 나머지 삶을 도모하고 있다. 앤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 벤지와 젖먹이 딸이 있다. 이제는 누구도 그를 ‘하위’라고 부르지 못한다. 대신 본명인 하워드를 갖다 바친다. 대니 조차도.


  대니는 어린 시절에 레이프와 한패가 되어 범죄를 저지르는 것만큼 짜릿한 일은 세상에 없다고 믿으면서, 그러니까 대강 껄렁껄렁한 십대를 보낸 후에 집을 떠나 뉴욕에 정착해 사는 척을 했다. 그래도 고등학교 다닐 때 미식축구로 이름을 날려 대학은 졸업한 거 같다. 도무지 먹고 사는 일에 능숙하지 못해 친구의 소개로 별로 건전하지 않은 식당의 바지 사장으로 들어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나마 괜찮게 먹고 살았는데, 이런 업소의 바지 사장들이 항용 그러하듯 그럴 때가 되니까 업주 또는 물주, 그것도 아니면 보스의 눈 밖에 나, 아마도 한 바탕 제대로 두드려 맞고 쫓겨난 거 같다. 이 와중에 20대 초반까지 몸 바쳐서 투신했던 미식축구 선수 시절부터 좋지 않았던 무릎에 추가 상해를 입어 장애 수준에는 살짝 미치지 못할 만큼의 통증이 유발, 다리를 약간 절고 있다.

  딱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처지에 떨어진 순간, 저 동유럽 모처에서 연락이 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오스트리아인지, 독일인지, 체코인지, 폴란드인지 모를 곳의 오래된 성을 구입한 사촌 하위가 대니한테, 성의 개조를 도와준다는 조건으로 돈과 편도 비행기 티켓을 보내왔다. 도시에서 완전하게 탈출해 조용하고 여유롭게 유럽의 흑림에서 살고 싶어하는 하위와 달리 전형적인 도시인인 대니는, 그러나 당장 먹고 살 방법이 없어 ‘폰 아우스블링커’ 성에 가서 하위, 앞으로 하워드라고 불러야 하는 사촌의 따까리 또는 당번이나 보좌관, 아니면 다행스럽게 넘버 투 일을 하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을 들기를, 워낙 심심산골이라 와이파이라는 건 아직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시절이어서, 인터넷도 터지지 않고, 당연히 폴더폰이었을 휴대폰도 그냥 플라스틱 뭉치 또는 휴대용 무기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아, 내복 몇 개, 스웨터 몇 장을 넣은 샘소나이트 트렁크와 함께 세상 어느 곳에서도 전파를 발송하고 접수할 수 있는 위성용 안테나까지 장만해 깊고 깊은 동유럽의 산악지역으로 떠나 폰 아우스블링커 성벽 앞에 섰다. 성문이 아니라 성벽 앞에. 무너져가는 성 앞. 이게 첫 장면이다.


  그리고 레이프. 레이프의 멋진 점은 그가 무엇을 하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죽었다 깨도 알 수 없다는 거였다. 대니가 살면서 제일 짜릿했던 경험이 레이프와 함께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었다니 10대, 하이틴 시절 이후에 별로 바람직하게 살지 않았을 거 같은데, 제니퍼 이건은 이 건에 대하여 끝내 모른 척한다. 그리하여 독자의 권한으로 넘겨 짚어 보건대, 레이프는 일찌감치 뉴욕의 어두운 뒷골목으로 진출해 이러저러한 범죄를 저지르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쏜 권총 총알이 상대의 머리통을 관통해버린 것을 알았다. 정신이 번쩍 든 레이프는 그길로 스스로 경철서에 출두해 자기 죄를 고백하고 선처를 호소한 것이 아니라, 이리 도망가고 저리 숨어 다니다가 끝내 체포되어 거의 무기수 비슷한 처지로 떨어져 교도소 2인실에서 살고 있다. 하필이면 같은 방에 사는 흑인 재소자가 푸시 업을 하루에 750회씩 하는 어마어마한 덩치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이 데이비스 덕분에 다른 방에 사는 더러운 호모 새끼들이 레이프의 엉덩이를 바라만 볼 수 있을 뿐, 감히 더듬어 대지 못하는 덕도 본다. 그렇게 산다.

  다시 말하건대 이건 전적으로 독자인 내가 다시 그려보는 사촌 세 명의 훗날 모습니다. 레이프가 작품에 나오는 수감자, 더 뒤로 가면 감히 21세기 또는 20세기 말에 저격병이 망루를 지키고 있는 미국 교도소의 이중 철조망을 뚫고 무사히 탈옥에 성공하는 ‘레이’와 동일인이라는 아무 증거도 없기는 하지만 뭐 독자가 그렇게 생각하겠다는데. 그래서 앞으로는 레이프 말고 레이라고 쓴다.

  레이는 처음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어마무시한 압박을 느끼는 데이비스를 잠깐이나마 피하기 위하여 교도소가 마련한 재소자 성격 개조 프로그램의 일환인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다. 강사는 딸 둘을 키우는 돌싱녀이자 현재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있는 홀리. 그러니까 아직 정식으로 강의를 맡을 자격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무도 교도소에서 험한 재소자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홀리한테까지 강사 자리가 밀려올 수 있었는데, 심지어 지원자가 없으니 재소자와의 대면이라는 위험수당까지 붙어 홀리 수준의 가방끈으로는 어떤 강사도 받지 못하는 급료를 받았다.

  범죄자 레이가 원래부터 글쓰기에 소질이 있었다는 건 그럴 수 있는 일. 다만 독서량이 모자라 처음부터 기막힌 글을 뽑아내지는 못했다. 하여튼 처음 적어낸 이야기는, 선생 또는 강사와 침대에서 한 탕 벌이는 남자의 이야기. 일종의 패관문학이었겠지. 그러나 재질이 있는 레이의 두번째 이야기가 무엇이었는고 하면, 바로 저 동유럽, 오스트리아인지, 독일인지, 체코인지 모를 흑림 속 산악지역의 9백년 된 성과 성 안에 솟은 공략할 수 없는 탑, 이른바 아성牙城the Keep, 그리고 성이 팔렸음에도 결코 아성에서 퇴거하기를 거부하는 97세의 남작부인. 아성 지하에 미로처럼 뻗어 있는 지하 동굴과 심지어 9백년 묵은 포도주, 고문 도구, 현대인은 생각도 못할 옛 시절의 갖은 무기 종류.

  여기가 하위와 대니가 얼굴을 맞대고 있을 폰 아우스블링커 성일까?

  책을 읽는 도중에 여러 번, 적어도 몇 번은 머리 속이 헝클어지는 즐거움을 맛보실 수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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