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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폭풍 한가운데 1
  • 패트릭 화이트
  • 17,100원 (10%↓950)
  • 2026-06-30
  • :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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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 전에 <전차를 모는 기수들>을 읽고 쓴 독후감을 보면 패트릭 화이트가 “유머, 화려한 문체, 서술의 전환, 의식의 흐름을 특징으로” 하는 작가라고 전에 어디서 주워들었던 모양이다. 당시 <전차를…>을 아주 인상깊게 읽었는데, 작품에서 그의 특징이라고 하는 유머, 화려한 문체, 서술의 전환은 그리 자주 보이지 않았고, 의식의 흐름은 어느 구석에 있는 지 찾아낼 주제가 되지 못하여 화이트에 관한 세간의 평이 조금 이상하다고 여기고 넘긴 적 있다. 이번에 독후감 쓰기 전에 다시 화이트를 검색해보니, <전차를…>이 1961년, <폭풍 한가운데>는 이이가 노벨문학상을 탄 1973년 발표작인데, 이번에 <폭풍…>을 읽어보니 유머, 화려한 문체, 서술의 전환을 이이의 특징으로 짚는 건 확실하게 이해하겠다. 내가 뭘 알건디? 그저 초창기 작품<전차를…>과 소설집 《불타버린 사람들》만 읽고 한 작가를 단정하려 했던 거겠지.

  위키피디아를 보면, 화이트가 1969년부터 계속 노벨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속으론 은근히, 그리고 열렬히 바랐을 거 아녀? 1969, 70년 두 해를 기다렸다가 1971년 세 번째 해에 접어들어서도 칠레의 국민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상을 받게 되니까 못내 섭섭했던지 다시는 노벨상 이야기를 듣지 않게 되기 바란다는 코멘트를 날렸단다. 그러다 한 해 쉬고 다음다음 해인 1973년에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니까, 이거 상 받으러 가기 좀 쑥스럽지 않았겠어? 그래서 결국 화이트 본인은 건강이 안 좋다는 핑계 또는 이유로 스웨덴 스톡홀름의 콘서트홀에 가지 않았단다.

  그런데, 이렇게 큰 상을 받은 작가 가운데 몇 명은 노벨상이란 것이 자신의 질곡이 되어 이후 시답지 않은 작품만 몇 개 발표하고 그걸로 작가 생명을 마감한 이들이 제법 있다. 이이도 그랬을까? 61세에 상을 받았으니 이미 문학적으로도 전성기는 지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폭풍…> 이후에 그리 명성을 떨친 작품은 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거 그냥 내 짐작이다. 인용하지 마시라. <폭풍…>이 노벨상을 탄 해 여름, 오스트레일리아(이하 “호주”)에서는 겨울에 출간했고, 수상자 발표는 11월에 해서 그랬는지 화이트 관련해서 뒤져보면 대개 이 <폭풍…>을 그의 대표작품으로 꼽는다. 나는 당연히 <전차를…>를 더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니까 그런가보다, 하면서 넘어간다.


  <폭풍…>은 확실히 곳곳에 BW, 즉 Black/White 유머가 매복해 있고, 등장인물 A의 입장에서 서술하다가 갑자기 B의 시각에 입각한 내레이션이 나오는 등 서술의 전환이 자유롭게 등장한다. 작품도 86세 먹은 호주 부르주아 노 부인의 죽음의 침상 몇 달이지만 당연히 주인공 엘리자베스 헌터 부인과 부인의 (출생 순서대로) 아들, 딸과 이미 죽은 남편, 부인이 유혹해 한 번 자빠뜨린 성실한 전담 변호사, 세 명의 간호사와 요리사, 가정부 등의 회상이 빼곡해서 950쪽에 육박하는 장편소설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니까 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는 말이다. 즉 죽어야 끝나는 소설. 살면서 행했던 별의 별 에피소드를 망라하면서 결국 ①인생무상이나, ②그래도 사랑이 제일이야, 영탄하거나 ③누가 뭐라해도 일단 살아볼 일이라는 주제이기 십상인데 <폭풍…>은 어떤 결말로 치고 갈까?

  엘리자베스 헌터의 결혼 전 이름은 엘리자베스 셀켈드. 이이는 몇 달 있으면 죽을 예정인데,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기를, “아무래도 난 속물이었던 모양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탓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 받은 가정교육도 문제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살한 것도.” (p.142)

  그러니까 부모한테 물려받은 건 딱 하나. 지금이야 이 모양이지만, 젊은 시절에는 시드니에 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와 몸을 지녔다는 것. 그려, 여자나 남자나 잘 생기면 일단 유리한 자리를 꿰 차는 거다. 엘리자베스 셀켈드 양은 이런 하드웨어는 물론이고 자신의 하드웨어를 이용하여 몇 단계 계급을 올려 버렸으니,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 알프레드 헌터 씨와의 결혼에 성공해서, 부와 미모로 시드니 사교계를 단숨에 정복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속물이라고? 맞다, 속물. 그것도 대단한 속물.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해야 하며, 이들과의 사이에 누가 있어서 그걸 방해한다면 방해물이 친자식이 되었더라도 일단 없애 버려야 마땅하다. 정말? 그렇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좀 긴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그런 거 다 소개하자면 끝도 한도 없다. 그냥 지나가자.


  근데 죽은 남편 알프레드는 진심으로 엘리자베스를 사랑했다. 부인이 생각해봐도 그렇다. 남편은 아내한테 자유를 주기 위하여 시드니에서 멀리 떨어진 가상 지역 고공 주의 가상 커뮤니티 쿠저리 소재 농장에서 머물고, 아내는 시드니 저택에서 살았다. 아들과 딸도 어린 시절을 쿠저리 농장에서 지내다가 아들은 영국으로 가 작위를 받은 연극배우 바질 경이 되었으나 이젠 연극계의 늙은 퇴물로 지방 순회공연을 전전하고 있으며, 딸은 프랑스의 나이든 라스카반 공작과 결혼해 프랑스 공작비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지만 라스카반 공작은 새로 생긴 애인과 살림을 차렸고, 가톨릭 때문에 이혼을 하지 못해 그저 공작비라 불리는 것만 기쁨으로 알고 사는 중이다.

  바질 경은 결혼을 두 번 했는데 첫째 아내의 딸은, 바질의 딸인 줄 알았다가 더 알고 보니까 다른 남자의 아이였으며, 같이 연극 배우를 하던 둘째 아내는 결혼하자마자 끝냈다고 봐도 별 이상 없다. 라스카반 공작비는 집을 나서면서 라스카반 집안의 보석들만 잔뜩 얻어냈을 뿐 이젠 새로운 사치는 엄두도 내지 못할 처지. 둘 다 이름만 비까번쩍하고 속은 거의 거렁뱅이다. 이때 주의할 점. 살기를 부르주아로 나서 그렇게 크고,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이 생각하기에 거렁뱅이지, 우리가 아는 그런 진짜배기 거렁뱅이는 절대로 아니라는 점.

  이 아들과 딸한테 인생에 딱 한 번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엄마가 죽어가고 있는 것.

  아버지가 장인을 흉내내 스스로 목숨을 끝내면서, 자기 전 재산은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내 소유로 있다가, 아내가 죽으면 아들과 딸한테 정확하게 반반씩 유증하겠다고 유언장에 박아 놓았다. 유언에 따라 그동안 엄마한테 죽기전에 재산 상속 좀 해달라고 입도 벙긋하지 못한 처지. 그나마 엄마하고는 정도 없다. 엄마 성격이 하도 자기만 아는 인간이라 어린 시절부터 엄마보다는 아빠하고 훨씬 가까웠으며 엄마와는 서로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게 일상이었으니 어느 정도인지 이해는 간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동몽선습과 소학을 공부하지 않은 서양 것들이니, 나 어릴 때 그렇게 했지, 늙어서 보자, 앙심만 쌓였을 수도 있고. 그러나 알고 보면 자식들도 전부 엄마 닮았다. 바질과 도로시가 정말 오랜만에 한 5년 만에 편지를 해서, 엄마 요새도 건강하시고 연애도 잘 하시고, 하인들도 잘 갈구시지요? 안부를 물으면 이게 곧 용돈 좀 달라는 뜻이었고, 그걸 칼같이 알아들은 엘리자베스 헌터 여사는 그때마다 일정 금액의 수표를 보냈으니, 그래도 자식들이 엄마를 함부로 하지 못했던 건 당연했겠지.


  이런 상태에서 엄마가 죽어가니 새끼들 입장에서 말로는 못하지만 경사라도 난 거 같은 기분이다. 이걸 패트릭 화이트는 그의 주특기라고 알려진 유머와 화려한 문체로 써 놓았는데, 아뿔싸, 이 책이 나온 것이 1973년, 지금부터 무려 53년 전이다.

  그러니 어떻겠어? 이미 꼰대가 된 내가 읽어도 세상에, 이런 아재 개그가 또 없다. 당시엔 화려한 문장이었어도 지금 읽어보면 그냥 밋밋한 수준의 문장들. 그래서 1권을 읽을 때는 그렇게 지루할 수 없었는데, 2권 들어가 본격적으로 아들과 딸, 바질과 도로시, 이름도 참 후지지 바질과 도로시가 언제 적 이름이야? 지금 젊은이들 가운데 바질이나 도로시라고 이름 지으면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하여간 남매가 본격적으로 유산쟁탈전의 진검승부를 겨루기 시작할 즈음이면, 그리하여 하루라도 엄마를 빨리 보내기 위하여, 그동안 경비를 줄이려는 속셈도 있고, 해서, 생전 존경하지 않았던 미운 엄마를 ‘쏘로굿 빌리지’라고 하는 부르주아 노인네들 요양원으로 보내려는 촌극이 정점에 오르기 시작할 때부터는 아이고, 또 무척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독후감을 짧게 끝내기 위하여, 빼놓을 수 없는 출연진들, 간호사 세 명과 요리사, 가정부, 그리고 변호사부부를 소개하지 않아 유감스럽다. 기회가 닿으면 읽어보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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