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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에 권여선을 읽고 또 찾게 될 줄은 몰랐다. <레가토>가 그만큼 싫었다. 나를 뒤돌아보게 하지 마. 특히 그 방면으로는. 이렇게 <레가토>를 싫어하며 살다가, 그래서 도서관 서고를 서성거리며 권여선의 책 앞에서는 그냥 핑, 지나쳤다. 안 읽을 거야. 하지만 세월이 지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는 읽어볼 수도 있는 일이겠지 싶어 고른 책이 소설집 《비자나무 숲》. 재미있게 읽었다. 그동안 거대 서사의 뒷 이야기는 사라지고 이제 사는 이야기, 도무지 실제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안 일어난다고도 할 수 없는 진짜 같은 이야기들. 이런 것을 우리는 픽션이라 부르고, 소설이라고도 하는데, 이리도 마음에 드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레가토>는 뭐하러 썼을까? 하긴 시절이 권의 가슴 속에 맺혀 자기 좀 이야기해달라고 할퀴고 뜯으면 안 쓰고 배기지 못했겠지.
이 책 초판이 2013년. 참 나. <레가토>가 불과 1년 전인 2012년에 나왔다. 내가 이 1년 터울을 넘기 위해 무려 12년을 쏟았으니.
1965년생 안동 권씨. 하다못해 초등학교 소사 자리라도 하고 싶으면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인동 장씨 아니면 안 되는 동네가 안동이다. 60년대 안동 출신 안동 권씨 댁 공부 잘하는 따님. 근데 하필이면 그토록 어지럽고 깡패 같던 80년대 이 시절에 서울로 홀로 유학 왔으니 그것도 팔자소관이다.
안동이 고향이면 괜한 선입견이 드는 데, 집안이 엄했겠네, 하는 거. 근데 우리말 위키피디아 보면, 이이의 희망사항이 술을 1주일에 두 번, 나이 들어 좀 골골해지면 1주일에 한 번 마시는 거라고. 그러니까 《비자나무 숲》을 발표할 당시인 2010년부터 11년 까지는 마흔 다섯에서 여섯이었으니 술에 관한 한 인생의 황금시절이라, 1주일에 대여섯 번, 한 번에 최하 소주 두 병은 자셨겠구나. 술은 희망사항대로 1주 한 번이나 두 번으로 줄이더라도, 그것보다 먼저 담배 좀 끊었으면 좋겠다. 이 책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뭐 진짜 그렇겠는가만, 모든 작품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씬이 나오는 거 같다. 이렇게 맛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좀 더 오래 살아 좋은 글 많이, 많이 써달라는 독자의 바람 때문이다. 이건 괜한 오지랖 아니지?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단편이 제일 앞에 배치한 <팔도기획>이다. 팔도? 팔도, 하면 역시 팔도 비빔면 아냐? 근데 책에서는 ‘팔도기획’이라는 기획 출판사. 기획출판이라 하니 뭔가 특집 기획, TV 같은 데서 자주 쓴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이 팔도기획은 주로 자비 출판하려는 아마추어 작가 지망생의 글을 그래도 책 비슷하게 꼴을 잡아주고 문장도 나름대로 매끄럽게 교정해 책 비슷하게 만들어 주는 회사. 또는 큰 회사의 경우엔 어림도 없고, 그저 작은 회사의 10년사, 20년사 같은 거, 그룹사보다 훨씬 작은 중소업체 사장/회장/고문들의 회고록 대필 같은 것을 이름난 기획사에 비해 염가로 서비스해주는 업체를 말한다.
회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대표가 있겠고, 사실상 홍팀장이 사무실 전권을 가지고 있다. 아래로 영업담당 박부장과 선배인 정작가, 화자 ‘나’인 김작가가 근무한다. 뭐 당연히 ‘나’ 김작가는 최저시급 수준의 급여를 받는 거 같다. 그러면서 영업담당 박부장이 물어오는 기획물의 꼭지도 쓰고, 손님 오면 커피나 홍차 또는 계절에 따라 컵빙도 쪼르르 달려가 사 와야 하는 따까리 노릇도 한다. 사무실의 홍일점이라도 네 명 가운데 하나니까 굳이 홍일점 운운도 민망하다.
어느날 오후 4시 15분, 팔도기획에 방문객이 온다. 안경을 쓴 키가 작은 여자가 큼직한 가방을 메고, 옷차림은 교복처럼 단정하게 입은 20대 후반으로 보인다. 원고를 가지고 왔단다.
원고를 가지고 와?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서는 홍팀장.
“저희 출판사에서는 성심성의껏 고객님의 자비출판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문객은 홍팀장 대신 ‘나’ 김작가와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김작가한테 본심, 이 회사에 일할 자리가 있으면 취직하고 싶단다. 국문과를 나왔고, 대학원도 1년 다녔는데 소설을 쓴다고. 실생활에서는 이런 무작정 지원자가 있으면 1695번에 한 번 정도 취직이 가능하다. <팔도기획>도 평범한 회사여서 당연히 집에 보냈지만, 능력있는 영업부장 박부장이 한 번에 무려 두 개의 대형 프로젝트를 물어와 당장 작가님을 한 명 보충해야 할 처지가 되어, 방금 본 윤모 선생한테 득달같이 전화해 책상 하나를 맡긴다. 정말 데뷔를 한 소설가인지, 아니면 그저 소설을 쓰는 사람인지는 확실하게 말하지 않지만, 데뷔 여부가 뭐가 중요한가, 그저 소설을 쓰면 소설가, 소설을 쓰는 사람이지, 그러면 됐지.
박부장이 물어온 것 가운데 하나가 잘 나가는 프랜차이즈 업체 “팔도닭발”의 나이든 회장이 이제 삶을 정리하기에 앞서 자기가 살아온 회고록을 내고 싶다는 거였다.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업체의 이름이 같은 ‘팔도’기획이라서 유난히 관심을 끌어 적지 않은 개런티로 계약을 했단다. 이렇게 해서 팔도닭발에 전력투구 시작. 무엇보다 회장이라던가 하는 노인과 인터뷰를 하고, 녹음한 것을 풀어야 하며 필요하면 사진도 몇 장 박아야 할 터, 선배 정작가가 신입 윤작가한테, 출발하자고 했지만, 소설가 윤작가가 하시는 말씀이: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자신은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 할 일은 글에 향기를 불어넣는 거란다. 글의 향기. 몇 번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글의 향기” 말고 “글의 냄새”라고 썼으면 어땠을까? 하여간 윤작가는 글의 향기를 불어넣는 사람이고, 글을 쓰자면 먼저 큰 그림, 구성을 잡아야 하니 자기는 함께 출장을 가지 않고, 그 시간에 구성을 짜겠단다.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녹취한 것을 가지고 왔다. 이제 녹취를 풀자고 권하는 선배 정작가. 아니나 다를까.
“저는 여기에 글을 쓰러 왔습니다.”
이러니 이게 일이 되겠나?
근데 여기서 파박,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다. 거의 모든 업무 지시에 I would prefer not to, 하지 않으려 합니다,로 일관하는 필경사 바틀비. 사실은 저 앞에서 벌써 바틀비가 전두엽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팔랑팔랑 나부끼기 시작했었다. 나도 35년간 회사생활 했는데, 아무리 일을 잘 해도 이익창출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게젤샤프트 집단에 이런 특출나고 독립적인 조직원이 하나라도 끼어 있으면 여지없이 삑사리 난다. 속으로는 윤작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백퍼 동의하고 응원까지 마다하지 않지만, 아후, 저러다 윤작가가 오래 못 가지, 하는 걱정도 한 소쿠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고비를 몇 번 더 넘기고 드디어 한 번만 더 참으면 무릎 도가니에 사리가 생길 위기감에 사로잡힌 까마득한 선배님 정작가 입에서는 모진 말씀이 튀어나오고야 만다.
“그럼 나가! 나가, 이 쌍년아!”
어찌저찌 회고록은 나왔다. 젊은 시절 오만가지 고생을 한 붉은 손 빈 주먹의 사나이에서 팔도닭발의 총수가 되기까지의 성공담. 이렇게 일이 다 끝나고 그 잘난 윤작가의 원고도 누군가 한 번 들춰봤겠지? 그게 어땠을까? 입에 달고 다니던 말처럼 “글에 향기를 불어넣어”주었을까? 안 알려줌.
다른 작품도 좋다. 과하게 폭력적인 딱 하나 <소녀의 기도>는 빼고.
괜히 권여선에게 미안하다. 하필이면, 글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등장인물의 고뇌 속 시절이 하도 지긋지긋해서 정나미가 떨어진 <레가토>를 먼저 읽은 내 잘못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마음에 드는 작품을 쓴 작가인 걸 몰라봐서. 아무쪼록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좋은 작품 많이 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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