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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현대일본희곡집 11
  • 한일연극교류협의회 엮음
  • 28,800원 (1,440)
  • 2026-03-27
  • :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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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에 한일연극교류협의회가 발족을 하고 2024년에 열한 번째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을 했다. 그래서 2024년에 《현대 일본 희곡집 11》을 출간했어야 하는데, 이 책의 두번째 작품인 <오토라고 불리는 일본인>의 저작권자를 수소문하지 못해 차일피일하다가 올해 2026년에 뒤늦게 열한 번째 희곡집을 선보이게 됐다고 한다. 나는 《현대 일본 희곡집 10》을 희망도서 신청해서 읽고, 현대 일본 희곡의 모든 작품 가운데 다섯 편을 골랐으니 당연히 수준이 높겠지, 싶었던 기대가 딱 맞아떨어졌을 정도로 즐겁게 읽은 기억이 나서, 이번에도 출간 사실을 알자마자 득달같이 희망도서 신청해 읽었다.

  《현대 일본 희곡집 10》은 출판사 연극과인간에서 찍은 반면에 《현대 일본 희곡집 11》은 지만지드라마에서 POD 책으로 판매한다. POD Printed on Demand. 원래 뜻은 독자가 주문을 하면 그때부터 프린트 작업에 들어가 공급해준다는 건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애초에 아주 적은 양의 책만 초판을 찍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이 초판을 구입하지 못할 경우가 생길 수 있어서 도서관은 POD 책을 희망도서로 사주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내가 《현대 일본 희곡집 10》을 신청해 다니는 도서관에 구비해 놓아, 시리즈 10번에 이어 11번, 연속성을 무시하지 않고 고맙게 사주어 읽었다.

  《현대 일본 희곡집》 시리즈는 한 권에 다섯 편의 희곡을 담는다. 이번에도 다섯 편. 이제 “현대 일본희곡 낭독 공연>의 희곡집을 싸그리 읽는다면 모두 11권에 55편의 희곡을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한국극예술학회에서 《한국현대대표희곡선집》 시리즈를 낸 적 있지만 아쉽게도 시리즈 2번에서 그치고 말아 아쉬운 바가 크다. 이 시리즈야말로 매년 출간하는 게 곤란하다면 격년이나 올림픽 또는 월드컵 열리는 해마다 열 편 정도의 대표 희곡을 선정해 독자에게 꾸준히 소개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고, 딱 그만큼 아쉽다. 나도 이 시리즈를 통해 이젠 우리나라 거장 또는 중견 희곡작가들을 알게 되었다. 처음 희곡 읽기 시작할 때 딱 맞는 입문 코스일 터인데.


  그러나, 이번 《현대 일본 희곡집 11》는 지난 번에 읽은 열 번째 희곡집과 비교해서 나하고 맞지 않는다. 조금 덜 맞는다고 말해야 하나? 하여간 그렇다. 모두 다섯 편의 희곡 가운데 제일 앞에 실린 <아버지 돌아오다>를 빼고 나머지 네 편이 전부 일본이 저질렀거나 관계한 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근현대사에서 일본이 참여한 전쟁이라면 1894년 중일전쟁, 1905년 러일전쟁,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한 태평양전쟁. 1차 세계대전에서도? 그렇다. 이때 일본은 독일편이 아니라 영국편, 즉 협상국의 일원으로 1914년 8월, 독일에 최후통첩에 이은 선전포고까지 하고, 독일과 전선을 이루어 총과 대포를 쏘면서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지만 주로 해군을 이용해 협상국의 함정을 보호하고, 오스트레일리아 병력을 호송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물론 그런 척하면서 중국의 칭다오와 남태평양 군도 일부를 꿀꺽 삼켜버렸지만. 아마 이때 일본의 진짜 속셈은 영토, 즉 식민지 확장이었을 거다. 스스로 작은 섬나라라고 하면서 중국과 러시아와 싸워 승리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면서 대만에 이어 조선까지 식민지로 삼아 눈에 뵈는 게 없었을 당시니까 무슨 짓을 못 했을꼬.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두번째 작품 <오토라고 불리는 일본인>은 주무대가 상하이와 도쿄. 2차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상하이에서 시작해 1940년대 초엽의 도쿄까지가 본문이고 이후 1944년이 배경인 에필로그가 붙는다. “오토라고 불리는 일본인”은 작품에서 그냥 “남자”라고 나오고, 존슨이라고 불리는 독일인과 송宋부인이라 불리는 미국인이 이 남자를 “오토”라고 호칭한다. 이 세 명을 포함한 여러 등장인물의 정체는 공산주의자. 이 가운데 미국 이름 존슨이라 불리는 독일 남자는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하여 조국 독일을 버리고 지금은 소비에트 혁명가로의 삶을 산다. 히틀러의 파시즘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머니와 누이가 사는 독일로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는 신념에 불타는 사나이. 이이는 그러나 상하이와 도쿄에서 좋은 술 때려 마시고, 예쁜 여자들과 연애하며 척 보기에 혁명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호화스러운 삶을 산다.

  존슨이 상하이에 일본 아사히 신문 특파원으로 온 오토라는 남자를 스파이로 스카우트해 만주와 몽골 지역을 포함한 중국 내 일본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다. 진짜 목적은 중국이라기보다 러시아 진출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었겠지. 오토라는 일본인도 공산주의자이기는 하지만 일본인 특유의 민족주의적 개념을 간직한 인물. 이 자가 정말 실재했던 인물이라고 해설에 나온다. 본명이 오자키 호쓰미. 1901년에 태어나 1944년에 스파이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고. 오토든 오자키든 간에 이 사람은 일본 사람 대부분을 위하여 일본을 배신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파시스트가 권력을 잡고 있는 한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고, 전쟁의 결과 일본과 일본인의 크고 또 큰 피해를 막을 수 없을 터이니, 일본 군부와 파시스트 권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신념.

  희곡을 쓴 사람이 기노시타 준지(1914~2006)라는 인물인데, 1962년에 쓴 희곡으로는, 그 당시 일본인의 세계관이 어땠을 지 몰라도, 딱 그 당시(1930년대 초엽 ~ 1944년)에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를 받은 조국의 역사를 가진 독자가 읽기엔 어딘지 좀 가렵다. 이 오토라고 불리는 일본인이 생각하는 “대부분의 일본 사람”과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포함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여 더 그런가 보다.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하면 단시간 안에 크게 패배할 게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결코 조선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조금 더 확장하면 기껏 쳐들어가 수백만 명을 학살한 중국 내 일본 점령지역에 관해서도 침묵한다.


  마지막에 실린 <조지 오웰 – 침묵의 소리>도 불만이다.

  무대는 영국. 소설을 쓰기는 했지만 악평에 시달리고 인기도 없어서 늘 배가 고픈 에릭 아서 블레어, 필명 조지 오웰.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BBC의 아시아 방송 담당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 취직한다. 아다시피 오웰이 인도 태생이다. 한 살 때 영국으로 돌아와 학교를 마치고 버마에서 1년 여 군사경찰 일을 해 이때의 경험으로 <버마 시절>과 <코끼리를 쏘다>를 썼다. BBC는 출생 내력과 책을 보고 인도 담당으로 발탁한 것. 이때 인도 송출 방송 담당자로 인도 출신 여성 베뉴와 남성 찬드라가 있었다. 베뉴와 찬드라는 인도에서 교육을 받고 영국과 영어에 관심이 높아 런던에 와서 일을 하고 있으나 특히 찬드라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하여 이 한 몸 다 바치기를 소원하는 인물이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일본군은 차근차근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더니 지들이 알렉산더라도 되는 줄 알고 인도를 향해 전진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인도의 식민 모국인 영국에서는, 조지 오웰조차, 영국 정부는 그저 인도인들한테 미끼만 던지고 있었을 뿐인데 대 파시스트 전쟁에서 독일과 일본의 파시스트들만 물리치면 인도를 독립시켜줄 것이라고 굳세게 믿었다고, 극작가 스즈키 아쓰도는 주장한다. 그러니 당연히 인도인 등장인물 베뉴와 찬드라도 그렇게 믿겠지? 아니다. 스즈키가 이 작품을 초연한 때가 2002년. 이미 영국이 인도를 어떻게 했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설마 그렇게야 믿었겠어?

  글의 목적상, 찬드라는 인도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영국을 등지고 일본이 인도를 점령해야 한다, 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런 건 영국 입장에서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다. 양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꾀하기 위하여 독일과 은밀히 손을 잡으려 애쓴 아일랜드 사람들 이야기를 우리는 안다. 인도인 찬드라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뿐.

  여기에 다른 이슈가 하나 더 붙는다. 자기가 당시의 화제작품 <하켄크로이츠의 밤>을 쓴 머레이 콘스탄틴의 아내 캐서린 콘스탄틴이라고 주장하는 여성 캐서린 버데킨. 사실 캐서린은 19세기의 조지 엘리엇처럼 남자 필명 머레이 콘스탄틴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여성이 글을 쓰면 하잘것없다는 평을 듣기 십상이라 생각해 그랬다는데, 조지 엘리엇 시절은 모르겠지만 20세기 들어 <자기만의 방>을 주장한 버지니아 울프 이후 시절에도 남성의 이름을 사용해야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럴 만하니 이렇게 상정했겠으나, 아마도 이 작품에 식민지 인도, 유색인, 그리고 여성, 이렇게 지배-피지배, 코즈모폴리탄-플래닛 비슷한 구도를 만들기 위한 구성 아니었을까 싶다.

  여기서도 일본인 극작가 스즈키 아쓰도는 영국 식민지 인도만 열라 떠들면서, 일본의 식민지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본이 인도를 점령해 인도에서 영국인을 몰아내면 인도를 독립시킬 것이라는 환상을 인도 출신 지식인인 찬드라가 믿고 있다고 설정했으니 좀 웃기지 않나? 이런 의미에서 이번 《현대 일본 희곡집 11》은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는 말씀.


  이 책에 실린 작품 가운데 세 번째 희곡 <호기우타>가 흥미로웠다. 핵전쟁 이후 폭망한 일본 간사이 지방의 생존자를 무대에 올려 부조리극처럼 만든 작품. 프랑스 희곡에서 읽은 것 같은 기시감이 들지만 정확하게 어떤 작품인지 지금 떠오르지 않아 탁 꼽지 못해 안타깝다. 기억이 도무지 전 같지 않아서 이거 영 스타일 구긴다. 앗, 생각났다. 프랑스가 아니고 루마니아의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가 쓴 <왕은 죽어가다>와 비슷한 느낌이 나는 작품.

  제일 앞에 자리를 준 기쿠치 간의 <아버지 돌아오다>는 스타일이 조금 오래 되어 이젠 덜 재미있고, 네번째 실린 <가타부이>는 엿새 전에 읽은 다카야마 하네코의 아쿠타가와 상 수상 소설 <슈리의 말>처럼 하마터면 전쟁 바람에 종족의 씨가 마를 뻔했던 류큐인, 오키나와 사람들 이야기다. 30년에 걸친 미국 지배에서 다시 일본령으로 귀속한 1972년의 한 가족.

  초장에 말했듯이 일본의 대표 희곡 가운데 다섯 편을 골랐으니 작품의 수준이야, 내 취향에 맞건 맞지 않건 간에, 꽤 높은 편이겠다. 그래도 제일 중요한 건 내 입맛이라서, 이번 현대 일본 희곡집 시리즈에는 실망했다고 말해야겠다. 그래서 조금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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