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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은 제인 오스틴. 이제 <이성과 감성>만 읽으면 대충 알려진 오스틴은 다 읽는 셈이구나. 그건 까치밥처럼 좀 내버려 둬야겠다. 한 작가의 작품을 싹 읽어버리면 섭섭하다. 비록 오스틴이 잉글랜드 국가대표 소설가 4인방으로, 조지 엘리엇, 조지프 콘래드, 헨리 제임스와 함께 제일 맏언니/누나로 꼽히는 인물이지만 나와는 좀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그냥 착하고 예쁜, 절대로 빼어나게 아름답지는 않지만 수수한 수준은 확실하게 넘는 예쁘고 젊은 아가씨의 연애 성공담이, 그것도 19세기 초를 무대로 하는 구식 연애 이야기가 21세기 독자한테 그리 화끈하게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근데 확실한 건, 19세기 독자들이 읽었다면 정말 재미있고 흥미진진했을 거라는 점. 모르긴 하지만 당시 수준으로 치자면 막장 드라마였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의 재미있음. 이건 인정하지 못하겠다. 달리 잉글랜드 국가대표 소설가라고 하겠느냐고. 특히 선역이건 악역이건 간에 등장인물의 심리묘사 같은 건 확실히 돋보인다. 이 책도 마찬가지.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 양이 바람둥이인줄 뻔히 아는 헨리 크로퍼드 씨가 청혼할 때, 처음엔 당연히 거세게 거절했지만 점차 혹시 저이가 정말로 마음을 착하게 먹기로 결심을 한 건 아닐까, 마음이 왔다 갔다 망설이는 수준까지 진전되는 과정이 거 참, 그럴 듯하다는 말이지.
변죽 울리지 말고 드라마 이야기로 곧장 넘어가자.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저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의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아직 바스티유 감옥이 멀쩡하던 1780년대 초반에, 바다 건너 그리 크지 않은 잉글랜드라고 하는 섬나라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헌팅던이라는 마을 워드 첨지댁엔 저절로 아우라가 펼쳐지는 것처럼 아름다운 세 자매가 살았으니 첫째는 맏이라 그냥 워드 양이라 부르고, 둘째가 물론 눈썹 하나 정도의 차이지만 제일 예쁜 마리아 양이었으며, 막내가 둘째와 비교해도 아쉬울 것 없는 미모의 프랜시스 양이었다. 근데 이 나라에서 혼인이라는 경사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상대 집안이 동산, 부동산이 얼마나 많은 가문이며, 혼인 상대자가 남자라면 얼마나 많은 재산과 만일 작위 같은 것이 있다면 그걸 물려 받을 수 있는지 여부가 제일 중요했고, 여자일 경우에도 외모의 아름다움보다 친정에서 가져올 수 있는 소위 지참금이라고 일컫는 현금이 얼마나 많은지 여부였다. 워드 첨지 댁이 제일 아름다운 둘째 딸 마리아에게 줄 수 있는 재산이 7천 파운드 정도였는데, 그만하면 아주 상급 부르주아라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시골 향사, 소위 젠트리 계급에서는 웬만큼 방귀 좀 뀐다, 하는 수준이었겠다?
지나던 길에 우연히 마리아 양을 한 번 보고 넋이 나가버린 노샘프턴 카운티에 있는 맨스필드 파크의 젊은 주인장인 토머스 버트럼 경이 그만 오금이 저려와 단박에 청혼을 해버리고 말았다. 토마스 경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근사한 저택과 대단한 수입으로, 비록 정식 귀족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준남작에 하원의원이었지만, 워드 가문 입장에서는 쉽게 넘겨다볼 수 없는 높으신 양반이었던 것. 혼인만 했다하면 마리아 양은 단박에 남작부인 반열에 올라 평생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건 당연하고, 물 한 방울이 뭐야,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아도 집안일까지 착착 알아서 돌아갈 정도라, 감히 청혼을 거절할 계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마리아 양이 빼어난 미모를 가지기는 했지만 천성이 태평하고 게으르기 짝이 없으며 세상에 오직 자기 하나만 아는 인간이었는데, 혼인을 통해 팔자가 펴자마자 천성이 저절로 발전, 진화해, 하는 일 없이 그냥 자식만 넷을 쑥쑥 뽑아냈다. 맏이가 아빠 이름을 물려 받은 톰. 엄마처럼 무사태평에 낭비벽이 심해 일찌감치 속을 썩였지만 그래도 책에서는 남녀상열지사에 관한 한 어지럽지는 않았다. 둘째가 에드먼드인데 이 아들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 이튼을 거쳐 옥스포드를 졸업하고 둘째아들 답게 군인이나 성직, 적과 흑 가운데 성직을 택해 성공회 목사가 될 예정. 셋째와 막내가 딸 마리아와 줄리아. 둘 다 굉장히 이기적이고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하지 못하면 잔뜩 골을 부리는 철딱서니들. 짐작하시겠지?
워드 집안의 다른 딸로 말할 것 같으면, 맏이 워드 양은 둘째 마리아가 버트럼 부인이 되고 6년이 지나 돈 한 푼 없는 노리스 목사와 오직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혼인을 감행했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마리아의 남편 토머스 경은 맨스필드 교구의 성직록(이거 설명하자면 복잡하니 그런 게 있구나 하는 수준에서 넘어가자)으로 노리스 부부에게 연 1천파운드의 수입을 보장해주어 아주 넉넉하지는 못해도 그냥저냥 당시 잉글랜드 향사 수준에서 남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아쉽게도 무자식상팔자의 즐거움까지 누리게 됐다. 혹시 모르지. 슬하가 비어서 그나마 괜찮은 복지를 누리며 살 수 있었는지도. 그러나 이런 자잘한 행복도 잠시. 노리스 목사가 덜컥 병이 들어 몇 년 지나지 않아 과부가 됐으며, 여태 살던 목사 사택에서도 계속 살 수 없어 동생 집 가까운 곳 자그마한 집을 얻어 그곳에 머물며 1년 365일, 하루에 적어도 열 두어 시간 동안 맨스필드 파크에서 노닥거리며 밥도 먹고, 동생 옷도 얻어 입고, 석탄도 조금씩 꿍치면서 무진장 빈대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원래 강퍅한 성질도 있었지만 생활의 손톱에 할퀴어 점점 성격이 모질어진 늙은이로 변해갔으니 이이도 불쌍한 인간…이라고? 웃기는 이야기. 세상에 생활의 손톱이 노리스 여사한테만 할퀴고 지나가는 거야? 원래 성질 머리가 못된 사람이지.
막내 프랜시스 양은 맏언니 노리스 부인보다 훨씬 못한 남자를 만나 혼인해 해군 정박지가 있는 포츠머스 부근으로 이사했다. 이때 토머스 경은 노리스 목사한테 베풀었듯이 해병대 소속 프라이스 대위한테도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생활에 도움이 될 정도의 지원을 하려고 했으나, 준남작 경과 해병대 대위 사이의 격차가 너무 커서 관련자에게 경의 신분으로 한낱 대위의 복지를 부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느냐 하면, 준남작 경 입장에서 자신의 지위, 도리, 자존심상 체면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런데 프랜시스 양, 이젠 프라이스 부인이 열을 받겠어, 안 받겠어? 포츠머스로 이사한 프라이스 부인은 이후 두 언니하고는 딱 연을 끊어버리고 어영부영 11년을 살았다. 프라이스 부부가 금슬이 좋아서 그랬는지, 썩어도 준치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을 당해 현역 복무 불가능 판정을 받아 제대해 거의 알코올 중독자 수준이 되었건만 그래도 해병대 출신이라 체질이 더할 나위 없이 건강체질이라서 그랬는지 프라이스 부인의 배에 아홉 번째 아이가 자리를 잡고 얼마 안 있어 막 밀고 나올 거 같았을 때,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던 프라이스 부인 프랜시스는 두 언니한테 절절한 편지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두 언니가 편지를 읽어보니 그동안 자기들 한테 한 행실은 괘씸하지만 글자 한 자, 한 자가 어쩌면 그렇게 눈물이 앞을 가리게 썼는지 화해를 해줄 수밖에 없었고, 이제 나올 아이의 후원자가 돼 달라는 프랜시스의 간청 대신 둘째 아이이자 맏딸인 작품의 주인공 패니를 데려와 보살피겠노라 일렀다.
이런 제안은 노리스 부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사실 패니를 데려와 레이디 버트럼의 말벗 또는 몸종 비슷한 용도로 데리고 있으려는 것이었다. 이제 누가 패니를 돌볼 것인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이때는 아직 노리스 부인이 과부가 되기 전이었는데, 원래부터 떠들고 일을 꾸미는 한에서는 자애롭고 후하게 베풀며 지시하는 데 능하지만, 누구보다 돈을 좋아하고 친지들의 돈을 쓰는 법과 자기 돈을 아끼는 법을 잘 아는 부인인지라, 자신은 남편의 통풍 치료 때문에 아이를 맡을 능력이 없다고 한 마디로 패니를 맨스필드 파크에 떠넘겨버리고 만다. 아니, 마는 건 아니고 시시때때로, 주야장천 맨스필드에 머물면서 눈에 패니가 들어올 때마다 타박하고, 구박하고, 잔소리하고, 하여간 때리는 것만 빼놓고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을 다 해대는 못된 중년이었다가 못된 늙은이로 변해간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 양이 갓 열 살이 되어 저 거친 해군들의 천국이자 해군 함정의 집합소였던 병영도시 포츠머스에서 꼬박 1박 2일 동안 마차를 타고 맨스필드 파크에 도착하게 되니 모두 3부 48장 가운데 이제 1부 1장과, 2장 초입까지 끝났을 뿐이다.
패니 프라이스 양을 소개하자면, “사람을 사로잡을 수는 없어도 크게 거스르는 점도 없는 소녀.” 그냥 평범하게 착한 아이라는 뜻이겠지. 나이에 비해 작은 편이고 빼어나게 예쁜 구석도 없다지만, 아직 덜 자라 앞으로 어떻게 변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점을 눈치 빠른 독자는 벌써 알아챈다. 무엇보다 해병대 대위 출신 퇴역자 집안의 아홉 아이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행동거지가 어색하기는 해도 상스럽지 않고, 목소리도 곱고 말하는 표정이 귀여웠단다. 간단하게 말해 꿔다 놓은 작은 보릿자루. 그러나 아이를 맞는 버틀럼 가족들은, 속셈이야 어떻건 간에 겉으로 보면 잘 생기고, 용모 빼어나고, 잘 먹고 운동 많이 하고 잘 자니 심신 발달 상태 훌륭하고 사람 응대하는 솜씨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 이때 셋째이자 맏딸 마리아가 12세, 막내 줄리아가 11세. 맏이 톰과 둘째 에드먼드는 각각 17세와 16세. 근데 에드먼드가 성격이 참하다는 거지? 패니하고 여섯 살 차이네? 흠. 오스틴 좀 읽은 독자는 첫눈에 알아본다. 결국 에드먼드와 패니의 연애가 이야기의 줄기가 되겠군 그래. 설마. 그렇게 뻔한 스토리일 리가 없지. 그래도 제인 오스틴인데. 그랴? 정말? 뭐 첫 느낌이 그랬다는 거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지긋지긋한 건, 첫째가 돈 타령. 누가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서 결혼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남자 또는 상속받은 남자가 내 남편이 될 수 있는지, 내 아내가 될 여자는 얼마나 많은 지참금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제일 커다란 방점을 찍는 거. 그걸 읽는 일이었으며, 둘째가 3부 앞 장면의 가장 큰 스토리로, 징글징글하게 싫어도 청혼을 단칼에 거절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상대가 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지도 말하지 못하는 고구마 백 개였다. 이 두가지 빼면 나머지는 19세기 초엽에 쓴 작품이라 넘길 수 있을 정도. 하긴 내가 고른 두 가지도 당시 작품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수 있지만, 고구마 정도가 하도 심해 굳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게 된 건지 모르겠다.
제인 오스틴, 하여튼 재미있다. 이번 달엔 어떻게 마음에 드는 작품을 별로 읽지 못해 괜히 시간만 버린 거 같은 생각이 들던 차에 제인 오스틴의 옛 노래 한 곡조 들으니 속이 다 뻥 뚫리는 느낌. 그래. 언제나는 아니지만 클래식이 좋기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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