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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미롭스키를 찾아 읽는 중이다. 처음 읽었을 때부터 좋은 인상을 받았다가 그간 잊고 있었던 작가. 그게 좀 미안했는지 굳이 찾아서 읽고 있다. 1903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부유한 유대인 가족의 따님으로 태어난 작가. 책의 앞 날개에는 그러나 네미롭스키가 불행하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소개한다. 금융가였던 아버지? 쉬운 말로 전세계 어떤 민족도 흉내내지 못하는 천재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대인 직종, 고리대금업자로 시작해 입지전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말이고, 부르주아의 아내 자리에 오른 어머니는 네미롭스키를 유모의 손에 맡긴 채 “자신의 삶을” 누렸다고 해도, 외롭기는 했겠지만 정말로 불행했을까? 나름대로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자기 민족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그건 불행한 거니까. 나름대로.
앞날개의 문구를 시비하는 건 이유가 있다.
작품의 초기 무대가 우크라이나의 한 도시. 시대는 190X년. 유대인에게 이 도시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강과 가까운 도시 아래쪽은 불가촉천민과 같은 취급을 당해 마땅한 유대인과 불량배, 가난한 장인, 음침한 가게의 세입자, 유랑민이 모여 살고 동네엔 언제나 더러운 유대인 소년들이 질러대는 고함으로 넘실거렸다.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자들이 지옥의 암흑과 불길에 휩싸여 허우적대는 곳이라 해 마땅한 지역.
언덕 위에 있는 선민들의 거처는 고급 저택의 광휘에 싸여 있는 발할이라 불러 마땅한 곳. 아래쪽 아이들은 열 살 먹도록 한 번이라도 이 동네에 놀러 와본, 아니 그저 지나가본 적이라도 있을까 말까 한 금단의 장소. 20세기 초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니콜라이 2세 황제 시절에는 유대인이 거주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아 이 언덕 위의 저택 지역에는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저 법령이 그랬다는 의미. 어느 민족보다 돈에 집착한 유대인들은 러시아 관리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뇌물을 공여하는 대가로 조금씩 이 지역에 자리 잡기 시작했으며, 유럽의 여러 왕가에끼자 돈을 빌려줄 정도의 부르주아들이 이웃집에 사는 것을 시비하거나 질투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귀족이나 부르주아는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시의 중앙부근에는 평온하고 창백한 빛이 비치는 평민들이 차지했다. 중앙이라 해도 언덕과 가까운 곳에는 의사, 변호사, 귀족의 영지 관리인 같은 이들이, 아래쪽과 가까운 경계에는 주로 위쪽과 아래쪽을 뛰어다니며 중개인 역할을 하거나 기타 장사치, 양복장이, 약사 등이 모여 살았다.
책 앞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면 이렌 네미롭스키는 어린 시절에 적어도 잘 먹고, 잘 먹는 수준을 떠나 게토 지역의 어린 아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맛과 영양을 지닌 음식만 골라 먹었을 것이며, 고급 모피로 만든 모자, 외투, 토시, 신발 등의 의류,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벽난로 같은 시설로 아무리 겨울이라도 아래 동네 아이들과 비교해 힘든 것이라고는 1도 모른 채 지나왔을 터. 그럼에도 불행하다고 활자를 박았으니, 그래, 이렌도 나름대로 불행하긴 했겠지. 그렇겠지.
<개와 늑대>의 주인공 아다 시너. 작가 이렌 네미롭스키와 비슷한 나이로 생각하면 된다. 1903년? 아버지는 이스라엘 시너. 엄마는 먼저 죽었다. 시너는 도시의 중간지역이기는 하지만 아래쪽 게토와 인접한 곳에 사는 중개인으로 먹고 살기 위하여 비트, 설탕, 밀, 농기구 등 유통할 수 있는 모든 품목을 취급한다. 때로는 비단과 차, 터키 과자, 석탄, 아시아 과일, 볼가강에서 잡은 캐비어 같은 비싼 것들도 있기는 하다. 어떤 경우라도 중개인한테 요구되는 자질, 빠른 말투, 요란한 몸짓, 다급함, 비굴함, 고집스러움, 간청이나 애원하는 기술, 그리고 경쟁자를 비방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돈을 벌어 함께 사는 책상물림 장인과 하나밖에 없는 딸 아다를 먹여 살리기 위한 비즈니스 측면에서 그렇고, 아다를 위하여는 세상 둘도 없이 헌신적인 아버지. 뭐 세상의 아버지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오직 자식을 위하여 일하고, 살고, 희망을 품는 시너는 정말로 유대 족속 답게 아다가 만일 음악이나 예술, 배우 쪽으로 재능이 있다면 자기 살과 뼈가 도륙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스위스, 독일,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려는 욕심에 충만해 있다.
이때 삼촌이 죽었다. 유대인이라면 동생이 죽을 경우에 당연히 동생이 남긴 식구들, 제수와 조카들을 형이 거두어야 한다. 그래서 졸지에 군식구가 셋 늘어 탐탁치 않지만, 엄마 없는 딸을 돌볼 여자가 필요한 때라서 별 불만 없이 거두었다.
숙모와 사촌이 도착했다. 여기서 이렌 네미롭스키의 착오가 생긴다. 이때 아다가 일곱 살. 사촌 릴라 언니는 한 다섯 살 정도 나이가 많고, 말썽꾸러기 벤이 여섯 살(p.31). 저 뒤쪽으로 가면, 아다와 숙모 일행의 거주지가 파리로 바뀌고 난 다음에 갑자기 아다가 17세, 벤이 21세로(p.140) 휘까닥 뒤집어진다. 근데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가도 좋으니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렇게 알고 말자. 뭔가 이유가 있겠지.
본격적인 사건은 이 도시에서 포그롬, 유대인 탄압과 린치 사건 때 벌어진다. 포그롬?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집단 폭행과 학살은 유대인의 계급과 상관없이 벌어졌는데, 사실 그건 나치가 본격적으로 권력을 잡은 후에 “수정의 밤” 같은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만행이었고, 190X년 우크라이나의 한 도시에서 있었던 작품 속의 작은 포그롬은 비록 사납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중류 또는 하류 게토 지역의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던 모양이다. 폭도들이 귀족, 부르주아가 사는 동네에는 함부로 발자국을 찍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시너 씨와 외할아버지, 숙모는 릴라 언니를 천주교도 친구집으로 보내고, 벤과 아다는 먼지투성이 건물의 다락방으로 피신시켰다.
어린 아다와 벤은 밤새도록 먼지가 켜켜이 쌓인 곳에서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날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그곳을 나온다. 집으로 가던 중, 아무리 어려도 위험한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려 몸을 피해 달려간 곳이 사나운 남자들이 훨씬 적은 언덕 위였다. 그곳에서 아다는 생전 처음으로 아름답고 아름다운 저택을 구경한다. 세상에 사람 사는 곳에 이런 건물이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그 건물이 사람이 직접 들어가 사는 집이라는 것에 깜짝 놀란다. 문패를 보니 한 번 더 놀라서 집주인이 “시너”씨. 이런, 자기네와 멀기는 하겠지만 친척이다. 배는 고파 죽겠지, 모자도 없이 창들을 넘느라 아다도 벤도 상처나고 피도 좀 흐르고, 옷도 찢기고, 머리카락은 다락방의 먼지와 엉겨 함부로 삐죽삐죽 솟구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음에도, 그냥 담장을 넘어 현관으로 가서 벨을 누른다.
이럴 때 뭐라 한다고?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하여간 멀고 먼 친척 집에 용감하게 쳐들어간 아다와 벤은 걸진 아침을 얻어먹고, 노할아버지가 아다의 아버지 이스라엘 시너의 이름을 들은 바 있어서, 이 유력 가문 전속 거간꾼 중의 한 명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처음으로 특별한 (부와 안락함 같은)쾌감을 발견한 아다의 눈에 고귀하고 독특한 울림을 가진 미지의 이름, 해리 시너라고 하는 옷 잘 입은 아이가 눈에 들어왔고, 보자마자 이 낯선 이름의 소년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였다.
윗동네 시너 가문은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에 큰 공장을 운영했고, 노할아버지의 둘째와 셋째 아들은 파리에서 탄탄한 국제 은행을 설립해 막강한 부를 거머쥐고 있었다. 이런 집안에 전담 중개인 자리에 오른 이스라엘 시너 씨, 아다의 아버지는 돈 좀 만졌겠지? 그렇다. 큰 부자는 아닐지언정 제법 돈을 벌어, 포그롬 때 충격으로 장인이 시름시름 앓다가 곧 세상 하직한 이후 중간 지역의 도시 중앙으로 이사했고, 가만 보니까 딸 아다에게 미술적인 재능이 대단한 걸 알아챈다. 마침 배우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조카 릴라가 있어서 숙모 역시 시너 씨를 살살 긁어 숙모와 아이들 셋이 파리로 유학하기에 이른다. 이 때가 1914년 5월. 그리고 석달 후에 뭐? 맞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진다. 그러니 이들 앞에는 고생길이 훤할 수밖에.
더욱 아쉬운 건, 우리의 시너 씨는 이들을 보내고 나서 작품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한 마디가 없이.
근데 전쟁이 터지고, 이 식구들은 죽어라 고생길로 접어들었을 때, 릴라가 재주도 좋지, 런던 이튼을 졸업한 해리 시너가 파리 중심가의 저택에서 호화롭게 사는 것을 알게 되고, 해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저 동쪽 늑대의 피를 물려받은 아다는(해리는 기껏해야 개라는 의미도 되고 뭐 그런데) 후끈, 어린 시절의 사랑이 달아오른다. 야수는 자기 몸에 그런 피가 흐르는 지도 모르고 살았으나 이제 눈을 뜨게 되었으니,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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