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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비둘기의 날개 1
  • 헨리 제임스
  • 15,300원 (10%850)
  • 2026-04-24
  • : 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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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2년 만에 다시 헨리 제임스를 읽었다. 제임스를 읽을 때마다 늘 그렇듯이 그의 장황한 상세묘사에 아예 넋이 나가버렸다. 1권, 2권, 서문과 해설을 합해서 꼴랑 860페이지를 읽느라 무려 일주일을 다 소비했다. 상세묘사도 상세묘사 나름. 이번에는 인물이나 주요 장소인 베네치아의 명소 등 외관에 관한 상세묘사 대신 사람의 심리를 샅샅이 해부했다. 심리적 실핏줄까지 전부 언어로 써 놓았으니 그의 노고가 “정말로” 대단하지만, 그걸 읽는 독자는 콱 질려버린다. 누군가 말했지. 진짜 잘 쓴 소설은 전부 심리소설이라고. 여태 그 말에 동의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이젠 그만. 심리 소설도 심리 소설 나름.

  영국 젠트리 계급의 속물성을 지면에 그대로 옮겨 놓은 작품.

  초간이 1902년이니까 헨리 제임스가 미국인으로 살 때이다. 하지만 무대는 런던. 벨 에포크 시대가 절정을 달하던 때. 영국을 비롯한 거의 모든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귀족, 부르주아 종족들은 사치와 계급 유지와 일 하지 않는 미덕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나는 이런 집단의 일원이기도 했던 헨리 제임스가 애초 영국 젠트리와 미국 부르주아의 속물성을 까발리기 위하여 작품을 썼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런 유치한 사람들이 펼치는 사랑 놀음과 나름대로의 진정한 사랑을 읊느라고 읊은 것을 한 세기를 넘어 지금 시각으로 읽으니 눈꼴 신 속물성이 눈에 훤히 보이는 거라고 생각한다. 말이 길다 작품 이야기를 해보자.


  스물다섯 살 먹은 케이트 크로이 양. 위로 두 오빠와 언니가 있었지만 오빠 둘은 죽었다. 아버지 라이어널 크로이 씨로 말하자면 한 시절에 가히 영국 최고의 미남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훤하게 잘 생겼던 남자. 생긴 꼴을 하느라고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집안 살림을 망쳐 놓는데 전력을 다했음에도 아직 완전히 망자지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독자가 보기엔 망가진 인물이고 망가진 집안이다. 지금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방을 얻어 아버지 혼자 산다. 인간미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지만 완벽한 외모와 몸에 박힌 신사의 품행을 가진 빈틈없는 영국 신사. 속 마음과 달리 악의를 찾을 수 없는 상냥한 눈과 또렷하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갖고 있는 사기꾼.

  언니 메리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찍이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교회 목사한테 시집 가더니 결국 아이 넷 달린 과부 신세가 됐다. 아빠를 닮아 수려한 외모를 가졌으나 그쪽으로는 관심이 없는 여인. 죽은 남편의 누이 두 명과 여태 친분을 쌓고 있다. 일찍 죽은 어머니가 메리언과 케이트, 두 딸한테 각각 2백 파운드의 연금을 남겼으나, 주인공이니까 당연히 착하고 정의로운 케이트가 네 아이를 키우는 언니한테 1백 파운드를 양보했다. 그게 아버지의 불만이다. 젊은 메리언한테 줘 봤자 시누이들 비스킷 값으로 다 넘어갈 테니 차라리 자기한테 쓰라고 하면 오죽 좋았겠느냐는 거겠지.

  하여간 메리언 언니에 대하여 헨리 제임스는 조금도 좋은 방면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읽기에 주인공이자 정의로운 사랑꾼인 동생 케이트보다 훨씬 진정한 인물이다. 적어도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복잡하지도 않게 산다.

  케이트는 이모 모드 러더 부인 집에서 이모와 함께 산다. 다만 조건이 있다. 아버지 라이어널 크로이 씨와 어떤 이유라도 왕래하지 말 것. 나름대로 고민하다가 아버지한테 찾아가 함께 살자고 제안했지만 깨끗하게 거절당했다. 라이어널이 미쳤니? 자기 한 입 먹고 살기도 힘든데 노동하지 않을 것이 뻔한 막내딸을 들이게?

  모드 러더 부인은 전형적인 영국의 부르주아. 랭커스터게이트의 부촌에 저택을 짓고 산다. 사회적으로 대단한 지위가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인물. 조카들을 가끔 찾았지만 극도의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나름대로 돌보느라 애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이런 이모가 케이트와 함께 살고 있으니 조카의 거의 모든 일 역시 이모의 관심 속에, 관리하는 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애정 문제도 마찬가지.


  케이트의 연인이 머튼 덴셔. 아쉽게도 월급 많이 주는 좋은 직장에 다녀야 할 정도로 돈이 없는 청년이다. 모드 러더 부인 눈에 찰 턱이 없다. 아무리 잘 생기고 몸가짐 바르고 성격도 좋지만 돈 없으면 꽝이다. 케이트 역시 이를 알아 덴셔가 자기 애인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던셔도 마찬가지. 이모가 꼽는 케이트의 신랑감 가운데 한 명이 마크 경. 경卿. 영어로 Sir. 마크한테 시집을 보내면 잘 하면 공작부인이 될 지 그걸 누가 알아? 많지는 않지만 돈도 꽤 있는 양반인데. 하지만 틀렸다. 돈은 이모 생각만큼 많지 않다. 대신 나이가 많다. 벌써 머리가 훌렁 벗겨진 늙은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나이 많은 남자가 그리 큰 흉이 아니어서 웬만하면 그냥 밀어붙이고 싶다. 케이트야 질색을 하건 말건.

  머튼 덴셔가 일을 꽤 잘한 모양이다. 이 시절 영국의 목면 사업의 최대 파트너는 미국. 이 가운데서도 뉴욕. 그리로 몇 달간 출장을 가게 됐다. 그래서 잠깐 무대가 미국으로 바뀐다. 뉴욕에서 만나 사랑은 아니고 그냥 아는 사람 정도로 좋은 감정을 나눈 아가씨가 밀리 실. 덴셔를 출장보낸 회사의 파트너 기업 최대 주주. 아버지가 일찌감치 죽으면서 졸지에 젊고 아름답고, 예절 바르기도 하고, 생각하는 것도 건전한 아가씨 손에 무지막지한 돈벼락이 떨어졌다. 자상한 헨리 제임스가 밀리 아가씨를 이런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하여 친척 나부랭이들이 한 명도 없고, 형제 자매도 하나 없는 완벽하게 외로운 젊은 여성으로 설정했다.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

  밀리 실 양이 가진 부는 영국 섬나라의 부르주아 모드 로더 부인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헨리 제임스가 설정한 여러 미국인들은 대개 무지무지하게 부자인 것과 마찬가지. 밀리가 알프스에 쉬러 갔다. 부잣집 아가씨가 여행을 혼자 떠나지는 않았겠지? 샤프롱 자격으로 함께 길을 나선 이가 수전 셰퍼드 스트링엄 부인. 보스턴 사람 스트링엄 부인이 젊은 시절에 어찌저찌 해서 모드 매닝엄을 알게 되어 아직 주소를 가지고 있다. 이래서 밀리와 스트링엄 부인이 다음 행선지로 이탈리아가 아닌 런던을 택하게 된 것.

  여기서 주목할 가장 중요한 반전 상황.

  케이트의 런던 행에는 사실 다른 목적이 하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수술 집도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루크 스트랫 박사를 만나기 위한 여행이기도 했던 점.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차린다. 케이트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겠군. 1권 256페이지에 스트링엄 여사를 향한 밀리의 대사가 나온다.


  “겉보기에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보장해주는 즐거움조차 훌륭한 묘비에 적힐 정도가 못 되는 그날 내가 그럴 테지요. 지금까지의 인생을 죽은 것처럼 살았으니까, 틀림없이 죽을 때는 살아 있는 것처럼 죽을 거예요. 그게 아마 아줌마가 바라는 모습일 테고요.”


  “복선?” 나는 위 문장을 읽고 이렇게 메모해 놓았다.

  런던에서 자연스럽게 밀리 양은 모드 러더 부인과 일당들인 케이트, 마크 경을 만나 알게 되고, 케이트와는 우정까지 돈독하게 또는 겉으로만 돈독하고 속으로는 던셔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자일 수도 있게 되겠지? 뉴욕에서부터 던셔를 만나 속으로 평한 밀리의 생각이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여서, 훗날 알게 되는 사실, “개인적인 재산이라고는 없고, 생길 가능성도 없”는 건 밀리에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애초에 던셔가 가난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정말 가난한 무산 계급 사람이 들으면 완전 허파 뒤집어질 이야기다. 몇 달씩 휴가 내고 베네치아에 갈 수 있는 청년이 개인적 재산이 “없다”고? 욕 나오겠지? 내 입에선 욕 나왔다. 더러운 속물 젠트리들.


  밀리는 무지막지한 부자. 그러나 곧 죽을 수도 있다. 1권에서 보면. 이때 내 머리 속에서 번쩍 떠오른 미쿡 사람 한 명. <한 여인의 초상>에서 주인공 이사벨 아처의 이모부. 이사벨이 문병을 와 이모부한테 얼른 쾌차하셔야지요? 라고 의례적으로 묻자, “싫다. 나중에 죽으려면 또 이만큼 아파야할 거 아니겠니?”라고 대답해 나를 감격시켰던 인물. 이이가 진짜로 죽으면서 현금 7만 달러, 2017년 현재가치로 251억원을 상속해주었다.

  혹시 밀리 역시 죽으면서 이 불행한 연인, 현 상황이라면 절대 결혼에 성공할 수 없는 케이트와 덴셔에게 당연히 전 재산은 아니지만 거액을 물려주는 거 아냐? 만일 그렇다면 앞으로 다시는 헨리 제임스를 읽지 않겠다. 이렇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스스로한테 했다.

  어떻게 되느냐고? 안 알려드린다.

  이건 말할 수 있겠지. 벨 에포크 시절 귀족 부르주아 사회의 속물성, 지저분한 사고방식, 위선이 온갖 말빨과 수사와 눈치에 섞여 있다는 거. 등장인물 가운데 자기 생각을 드러내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불쌍한 네 아이의 엄마이자 과부인 가난한 메리언 밖에 없다. 세상에서 제일 피하고 싶은 사람이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니?” 자기 본심은 꽁꽁 숨긴 채, 뜻대로 되지 않으면 꼭 그걸 꺼내 비틀어버리는 인간들. 이런 사람들 구경 한 번 제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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