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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리 바턴
  • 엘리자베스 개스켈
  • 16,200원 (10%900)
  • 2025-03-28
  • :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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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0년생 엘리자베스 개스켈이 1848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1848년. 영국에서 차티스트 운동이 한 번 크게 변곡점을 그은 시기. 차티스트 운동은 배운 지 하도 오래라 뭔 운동인 줄 몰랐는데 책 읽어보니 선거법에 관한 거였다. 재산이 일정액 이상 있는 남자 한테만 참정권을 주었단다. 이 구절 읽으니 어렴풋이 생각났다. 신대륙 발견을 기점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한 부르주아들이 이젠 귀족들을 말아먹을 수준이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부르주아, 귀족 눈에는 상것들한테도 참정권을 주었는데, 아니지, 줄 수밖에 없었는데, 어디까지 부르주아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어서 재산 하한을 설정했던가 보다. 차티스트 운동도 결국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뭘 알아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앞뒤를 재보니 그럴 거 같다는 말이다.

  이때 프로레타리아들은 노동문제도 함께 거론한 것처럼 보인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대표작인 문학과지성사의 <남과 북>, 문학동네 <북과 남>에서도 주인공이자 제조공장의 사장 사모님인 마거릿 헤일이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된 노동조합원에게 동정적인 것과 비슷하게 <메리 바턴>에서도 개스켈의 시각은 무산자 쪽에 더 많이 가 있다.


  첫 장면은 바턴 가족과 윌슨 가족의 소풍.

  존 바턴은 맨체스터 남자다. 없는 사람들이 맨체스터에서 다 그렇듯이 공장 노동자 가정에서 나서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어 자신도 공장 노동자가 된 전형적인 맨체스터 사람. 어릴 적부터 지독하게 가난한 시절을 보내 보통 이하의 다소 왜소한 체구를 가졌지만 무엇이든지 단호하고 결연한 열정을 품은 공산주의자.

  이들이 말하는 가난은 그저 현대의 도시빈민과 비교하지 못한다. 사회적 복지라는 개념이 없어서 공장 노동자들은 최소 임금을 받아야 했고, 더 빈곤한 시골에서 유입되어 오는 새로운 노동자들 때문에 그나마 일자리 하나 얻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없으면 굶어야 한다. 바턴 씨 부부도 첫 아이 톰을 잃었다. 못 먹어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성홍열에 걸려 죽었다. 뒤에서는 굶어죽었다는 표현도 쓴다. 아이가 그렇게 죽어갈 때 돈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은 이후 고용주에 대한 미친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언제나 최소 임금. 경기가 좋으면 그나마 숨은 쉬고 살아가겠지만, 불경기가 닥칠 경우, 고용주들은 오직 손실을 줄이기 위하여 가동을 축소하고 남는 인력을 잘라버린다. 이때부터 해당 가족은 굶주림을 견뎌야 한다. 먹을 수 있기만 하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별스럽지 않은 질병에라도 걸리면, 이젠 면역체계가 부실해진 환자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 바턴 씨는 어린 시절부터 밥 굶는 법을 몸소 체험으로 익혀서 하루 이틀 굶는 건 그저 견딜 수 있다. 사흘 굶으면 남의 담장을 넘어가겠지만, 그러기보다 고용주의 대문을 깨부수고 쳐들어가는 걸 바라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분노를 품고 산다. 노동자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죽기까지 하는데 고용주들은 공장을 닫은 시기가 특별 휴가라도 되는 듯 몇 달씩 해변이나 겨울 스포츠를 즐기러 떠난다. 더 심한 불경기가 닥쳐 많은 무산자 가족이 죽어나가도 고용주 가족은 공연 구경 한 번 안/덜 가는 걸로 그친다. 그것도 남의 눈이 있어서 그런 거다.

  이이의 두번째 아이가 주인공 메리 바턴. 오빠가 어려서 죽어 지금은 맏딸, 열세 살짜리 아주 예쁜 소녀다. 엄마 이름도 메리라서 아빠는 딸을 작은 메리로 부른다. 하지만 지금 만삭인 아내는 소풍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 몇 주 후 출산하다 죽고 만다.

  바턴 씨는 메리의 죽음을 처제 에스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딸처럼 키워서 공장 여공으로 보냈다가 에스더의 아름다움에 홀딱 빠진 장교가 쉬운 얘기로 혼인빙자간음을 하고 아일랜드로 파견된 다음에 인생 망가진 내력을 가질 예정이다. 에스더는 자기가 망가진 후에 몰래 맨체스터로 돌아와 바턴 씨 가족을 살피다가, 이제 성인이 된 메리 바턴이 맨체스터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의 사장 아들 해리 카슨하고 서로 사랑하는 걸 알게 된다. 동시에 해리는 절대로 메리와 혼인할 생각이 없으며 오직 한 번의 엔조이를 바랄 뿐인 것도 알아채 드라마의 진폭을 넓히는 역할을 할 것이다.


  함께 소풍을 간 윌슨 씨네는 아내와 개구진 외동아들 제임스, 젬 윌슨, 이렇게 세 가족. 윌슨의 친동생 앨리스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혼자 산다. 앨리스는 처녀. 그러나 큰언니가 낳은 아들 윌을 자신이 입양해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웠다. 양아들 윌은 초반에 나오지 않지만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외항선원으로 중요한 배역 가운데 한 명인 마거릿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개구쟁이 아들 젬은 머리통이 굵어지자 듬직하고 분별력 있는 청년으로 성장해 젊은 나이에 주물 공장의 주임으로 승진한다. 덕택에 급여가 여유로워 엄마와 고모를 넉넉하게 부양한다.

  윌슨 씨? 아쉽게 급사한다. 아마도 심근경색 아닐까 싶다. 이후 젬이 가장 노릇을 단단히 하는 효자이며 동시에 메리 바턴을 맹렬하게 짝사랑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라서 무엇이든 메리를 위하여 결심하고 행동한다. 작중 가장 영웅적인 인물. 부잣집 아들 해리 카슨이 메리를 농락하고 버릴 생각인 것을 알게 되어 해리한테 경고하다가 그의 채찍에 얼굴을 한 대 얻어 맞는다. 열받은 젬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때려 눕히지만 경찰들이 두 사람을 눈 여겨 보고 있었다는 건 몰랐다. 그리하여 해리가 같은 장소에서 권총에 맞아 피살되었을 때, 하필이면 권총이 젬 윌슨의 것이라 재판에 넘겨지는 곤욕을 치룬다.


  앨리스 윌슨은 간호사와 세탁부, 두 가지 일을 하는 아주 음전한 사람. 보살 비슷하다. 이이가 메리한테 좁 레그 영감의 착한 손녀 마거릿을 연결해주어 둘은 절친 사이로 발전한다. 좁 레그는 직공 계급에 드물게 있는 몇 몇 가운데 한 명으로, 박물학, 곤충이나 파충류, 거미류, 꽃을 비롯한 식물 같은 것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 아울러 사회 전반에 관해 발언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도 가지고 있는 현명한 노인.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늙은이 치고 헛소리를 하는 법 없이 똑부러지기 이를 데 없다.

  마가렛은 재봉사였다가 점점 눈이 먼다. 그러나 하나가 나쁘면 (이 당시엔 운이 좋아서) 하나가 좋은 법. 놀라울 정도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래 솜씨가 있어서 눈이 보이지 않지만 여기 저기서 공연을 해 메리가 어려울 때마다 금전적 지원과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윌 윌슨은 작품 중간에 원거리 항해에서 돌아와 지내다가 훗날 작품이 좋은 쪽으로 크게 변할 모멘트 역할.

  여기까지는 무산자였고, 부르주아로 카슨 씨가 등장한다. 자신도 직공 출신이지만 자기 직원들처럼 극심한 가난으로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었다. 젊은 시절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작은 사업을 벌여 성공한 성실한 사람. 하지만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듯이 공장을 확장하고, 생산에 박차를 가하다가도 불황이 오기만 하면 그저 생각없이 직원들을 정리해고 한다. 그게 설마 굶주림, 굶어 죽을 정도의 빈곤을 가져올 줄은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은 지닌 인물이다. 바람둥이 미남이자 노동조합의 파업 기도에 초강력 대처를 주장하다 총 맞아 죽는 금발의 미남자 해리 카슨 때문에 하루 사이에 백발이 될 정도로 상심한다.


  개스켈은 작품 속에 다분히 계급 갈등을 묘사하고 있으며, 굶주림에 허덕이던 1840년대의 노동자 쪽에 선 듯하다. 나는 메리 바턴과 해리 카슨의 연애가 처음 나올 무렵에, 둘의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져 훗날 <남과 북>에서 공장 사장 부부처럼 좋은 쪽으로 발전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기대는 초장에 깨졌다. 19세기 중반에 약한 빙하기가 있었다고 하던가? 전 세계적인 기근이 들고, 이를 좇아 당연히 불황이 덮쳐 디킨스의 작품에서 보듯 빈곤한 약자들의 삶이 정말 비참했던 모양이다. 맨체스터라는 거대 공업도시가 그럴 정도였으니 북쪽 시골을 말도 못했겠지. <남과 북>을 읽을 때부터 개스켈이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심정적으로는 동조하지 않았나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이 더 깊어졌다.

  하지마 개스켈의 치명적 약점도 있다. 이이가 목사님 사모님이라는 것. 그리하여 작품 속에 성경 말씀이 말도 못하게 많이 나온다. 여기서 그치면 그나마 괜찮겠는데, 결론이 정말 예수님 말씀이다. 완전히 기독교 오리지네이트된 결말. 재미있게 읽다가 끝장에 가서 김 샜다. 철저하게 스팀 아웃.

  하긴 19세기 초 작품이다. 180년 전 작품이라 현대 소설을 읽는 것 같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작품. 읽으며 종교 측면만 빼면 상당히 진보적이라 이색적이다. 여태 읽은 19세기 영국 작가와 완전히 구별되는 개스켈 만의 특정적 관점을 이 독후감을 읽는 분께서도 경험하시면 좋을 듯하다. 이 책이 아니더라도 <남과 북> 또는 <북과 남>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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