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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희망이 외롭다
  • 김승희
  • 10,800원 (10%600)
  • 2012-12-12
  • : 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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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에 광주에서 나서 서강대 영문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마친 문학박사. 이 책이 나온 2012년에는 국문과 교수였고 지금은 명예교수.

  근데 우리나라 위키피디아에 재미있는 게 나오네. 이이의 별호가 “불의 여인” “언어의 테러리스트” 그리고 “초현실주의 무당”이란다. 오. 김승희의 한자 이름이 勝熙, 여자 아이에게 잘 붙이지 않는 이름이다. 이길 승, 밝을 희. 두 자 다 마찬가지. 그래서 그런가? 언어의 테러리스트? 초현실주의 무당? 어째 좀 으시시하네.

  두 달 있으면 만 스물한 살이 될 스무 살 시절 1973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장원을 해 등단했으니 벌써 57년차 시인이다. 게다가 시작부터 시 영재 수준을 넘었다. 스무 살 등단이 말이 그렇지 어디 쉽게 되는 게 아니다. 하여간 진짜로 김승희를 만났다 하면, 드센 사람일 거 같아서, 아나키스트라니까, 무당이라니까, 나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토끼겠다. 이유가 있지. 오늘 독후감이 그리 친절하지 않을 예정이거든. 2012년 당시 이순耳順에 현직 명문 서강대학 국문과 교수님이 쓴 시를 하잘것없는 아마추어 풀때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면, 그건 백에 아흔 여덟의 경우, 독자가 찐따라서 그런 거다. 그러니 아니겠지만 혹시 시인께서 이 어줍짢은 독후감을 보시더라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좋겠나이다.


  시집의 제목이 “희망이 외롭다”니까 제일 앞에도 희망에 관한 시가 있다. 희망 속에 무엇이 들었나? 그러니까 희망이란 것의 구조식은 어땠을까, 하는 질문일 터. 시인은 제목에서 다 알려준다.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



  꽃들이 반짝반짝했는데

  그 자리에 가을이 앉아 있다


  꽃이 피어 있을 땐 보지 못했던

  검붉은 씨가 눈망울처럼 맺혀 있다


  희망이라고……

  희망은 직진하진 않지만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   (전문. p.14)



  ‘신의 물방울’이 희망의 한 부분집합이라는 말인데, 이 신 님이 하도 변덕이 심한 분이라서 ‘신의 물방울’이 뭔지 모르겠다. 신의 눈물? 이게 제일 무난하지? 좋아도 눈물나게 좋고, 슬프면 당연히 눈물 나는 거고. 나머지 물은 별로 재미없다. ‘용수’라는 이름의 선배가 있었는데, 더 윗 선배가 이 용수 씨를 꼭 “야, 용오줌!” 하고 불렀다. 용한테 나올 물이 오줌밖에 더 있느냐면서. 그렇다고 희망이 신의 오줌이라고 하긴 좀 뭐하잖아? 아무래도 눈물이 좋은데, “수만 광년 먼먼 별에서 이제 막 너의 눈에 닿은 눈물”이 희망일까? 김승희와 같은 나이의 시인 이성복이 쓴 시 <눈물>에 나오듯이. 아니면 진로 소주?

  하지만 눈물에 집착하지 말 것. 정작 희망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1연과 2연에 쓰여 있다. 반짝반짝 했던 꽃들이 가을이라 다 지었는데, 반짝반짝 빛날 때는 못 보았던 검붉은 씨, 내년에도 어김없이 꽃을 피우겠다는 집념이 바로 희망이라는 거다. 그걸 신의 물방울이라 했을 뿐. 에이, 쐬주방울이 아니었네.

  좋아. 첫번째 시는 마음에 들었다. 기대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번째 시.



  반투명한 불투명



  그런 건가? 보이지 않는 건가?

  그런 건가? 들이지 않는 건가?

  그런 건가? 알지 못하는 건가?

  그런 건가? 다 소용없는 건가?

  그런 건가? 해가 또 지는 건가?

  그런 건가? 이렇게 살다 가라는 건가?

  그런 건가? 하루하루 오늘은 괴로움의 나열인데

  그런 건가? 띄어쓰기도 없이 범람하며 밀려오는 나날

  그런 건가? 내일도 오늘과 같다는 건가?   (전문. p.15)



  나 이런 시 안 좋아한다. 앞 대가리에 “그런 건가?” 열라 썼다가 뒷대가리는 결국 오늘도 내일도 뭐 하나 변하지 않는 일상 또는 권태 아니면 기타 등등. 그래서 뭐 어쨌다고. 내용보다 앞에 같은 멜로디가 연속되는 것이 싫다. 이게 음악이라고 가정하면 이런 음악을 누가 들어? 하지만 이 시 이후에도 비슷한 반복으로 구성한 시가 무지 많다.


  말은 울고 있다

  제 무능을 울고 있다

  말은 모든 것이지만

  말은 아무것도 아니다

  말은 울고 있다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소리 소리 소리 소리뿐이다

  소리 소리 소리분일까?  (<말은 울고 있다> 부분. p.22)


  물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물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물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물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한 줄 띄고)

  바람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바람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바람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바람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시시포스의 말뚝> p.25)



  <시시포스의 말뚝>은 한 문장이 전부 한 연이다. 그럼 분량이 너무 많아져 그냥 연과 연을 붙여 썼다. 남의 시를 이리 왜곡해 인용하는 건 나쁜 일이다. 시인한테 미안하다.

  하여간 어떤 게 나하고 맞지 않는 줄은 아시겠지? 김승희 명예교수는 절대로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이런 거 읽을 때마다, 시는 안 되고, 쓰긴 써야겠고, 하는 경우에 시도하기 딱 좋은 시창작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시인의 고향 광주말로, 영 거시기하다. 사실 이런 건 이상의 <오감도>에서 이미 끝난 거 아니었나 싶기도.


  이 시집의 특색 가운데 하나. ‘하물며’ ‘부디’ ‘아직’ ‘이미’ ‘어쨌든’ ‘비로소’ ‘아랑곳없이’ ‘저기요’ ‘아~’ 라는 말들에 관한 시들. 이 가운데 하나만 읽어 보실려우?



  ‘하물며’라는 말



  하물며라는 말이여, 참으로 아름답도다,

  그 말에는 

  슬픔으로 가득한 서광의 눈동자가 들어 있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다시 한번 돌아보는 사랑이 들어 있다,

  비천한 것들에 대한 굉장한 비탄이 들어 있다


  사랑하지 않는 마음에는

  하물며가 없다,

  마음이 마음이 아닐 때 들려오는 말이여,

  하물며라는 증오를 거부하는 말이여,

  아무것도 아닌 네가 아무것도 아닌 나를

  한 번 더 은은히 돌아보는 눈길 같은 말이여

  한없는 바닥에서 굉장히 쟁쟁한 말이여  (전문. p.29)



  시인이니까 당연히 단어에 상당한 관심이 있을 터. 나 같은 범부하고는 차원이 달라 기껏 ‘하물며’ 하나 속에도 온갖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그래 처음엔 그런 가보다 했는데, 이게 연달아 ‘부디’ ‘아직’ ‘이미’ ‘어쨌든’ ‘비로소’ ‘아랑곳없이’ ‘저기요’ ‘아~’까지 나오니 ‘어쨌든’에서 벌써 콱 질려버렸다. 차라리 “서울의 우울” 시리즈처럼 서울 곳곳에서, 서울의 과거와 현재 속에서 우울을 발견하면 조금 나은 데.

  열심히 쓴 시 가지고 뭐라 하는 건 참 나쁜 일이다. 지금 내가 시인의 시가 별로라는 건 아니다. 다만 나하고 맞지 않는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을 뿐.

  위에서 말했듯, 같거나 비슷한 시어가 줄창 출현하는 것도 맞지 않고, 마치 독자가 자기 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많은 시 속에서 딱 단정해 말하는 어법도 마음에 안 든다. 하긴 학생들 월사금이나 책값하고 비슷하다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표제 시 <희망이 외롭다>를 소개하고 싶었는데 너무 길어서 다른 시 하나 꽝. 그걸로 독후감 마침.



서울의 우울 13

— 위층 사람



  당신은 지금 나의 하늘을 밟고 서 계십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지 마시고

  천상천하 유타공존 하십시오.


  당신의 하늘을 밟고 서 계시나

  소리 내지 않는 구분을 상기하십시오.


  당신의 머리통 위의 발바닥을

  당신의 발바닥 아래의 머리통을

  그렇게 그윽이 생각하면서

  함께 물망초 꽃으로 피어나자는 것입니다……


  아니요

  아니요

  물망초 꽃이 아니라 아예 나를 잊으라는 망초꽃으로

  조용한 망초꽃으로

  너영나영 아늑히 피어나자는 것입니다.  (전문. p.69)



  층간 소음? 이 시도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서울의 우울 시리즈에서 제일 짧아 옮겼다.

  근데 정말 몰라서 묻는데, “너영나영”이 무슨 뜻이여? ‘너하고 나하고’, 공동체를 말하는 것 같은데 사전에 나오지 않아 모르겠다. 사투리?

  유아독존唯我獨尊은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는 뜻이다. 유타공존(유他共存)의 유는 唯일까, 有일까? 오직 유唯라면 오직 너와 나만 함께 살자는 뜻이고, 있을 유有면 다른 사람도 있어서 함께 살자는 말인데, 唯 같기도 하고 有 같기도 해서 헛갈리는 건 내가 시를 쥐뿔도 몰라서 그런 것. 혹시 아무 생각없이 유아독존과 비슷하게 그냥 우리말로 유타공존이라 쓴 거 아니심?

  오늘 이 양반 욘세이가 일흔다섯 개. 이제는 더 이상 “불의 여인”이나 “언어의 테러리스트” “초현실주의 무당”는 아니겠지? 늘 건강하시기 바란다. 건강한 게 대빵이다. 그깟 시보다 훨씬 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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