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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가벼운 마음
  • 크리스티앙 보뱅
  • 13,500원 (10%750)
  • 2025-05-15
  • : 4,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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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고뉴-프랑슈콩테에서 1951년애 태어나 71년간 그곳에서 살다가 간 시인, 에세이스트, 기독교 작가 그리고 가끔 단편소설가. 제일 중요한 장르는 시와 에세이. 그래서 그런지 소설도 문장이 뭐라 그럴까, 거미줄 같이 아롱져 더욱 화려하다. 섬세함과 화려함. 이게 양극단인 것처럼 들리지만, 햇살이 파르르 떨리는 은빛 새벽 거미줄의 아롱거림도 얼마든지 화려할 수 있다. 그것을 직조하여 화면을 만들 수 있다면. 아무나 이렇게 쓰는 것은 아니겠지? 그걸 할 수 있는 작가도 꽤 있다. 우리나라에선 많고 많은 작가들이 그렇게 쓰려고 애쓰는 게 짠하기도 하지만. 보뱅의 문장에는 칼날이 없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섬세하고, 화려하고, 부드럽다. 작품의 내용과 관계없이 문장이 그렇다는 말이다. 소설이라는 게 문장이 반은 먹고 들어가는 장르이니 이 또한 얼마나 막강한 무기랴.


  주인공인 화자 ‘나’는 하도 여러 개의 가명을 써서 독자가 진짜 이름이 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니 이를 프랑스 말로 ‘나’ 즉 ‘moi’라고 하자.

  나는 작품의 첫 문장부터 깜짝 놀랐다.

  “내 첫사랑은 누런 이빨을 가지고 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지. 거 참 취향도 별나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것을 왜 “이빨”이라고 할까? “이”라고 하는 훨씬 듣기 좋을 우리말이 있는데. 치과에 가도 이젠 ‘이’라고 하지 않는다. 꼭 ‘치아’라고 한다. ‘이’라고 쓸 경우엔 꼭 앞에 뭐가 붙는다. 누렁니, 뻐드렁니 등등. 아름답지 아니한 것.


  moi가 사는 곳은 서커스단 트레일러. 공연단의 모든 설비관리를 하는 아버지와 매표소에서 표를 파는 엄마를 따라 프랑스 전국을 정해진 코스로 일주하는 삶. 그리하여 moi는 인류를 유랑민, 정착민, 그리고 아이들,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눈다. 두 살 때부터 사랑을 했으니 이 정도쯤이야 뭐.

  그런데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첫사랑이 등장한다. 늑대. 진짜 늑대다. 그러니까 ‘누런 이빨’이라 번역한 거다. 폴란드 중남부의 크라쿠프 지역에서 살다가 사람들한테 생포되어 서커스 단장이 비싼 돈을 들여 직수입한 늑대. 늑대는 길들지 않는다. 그래서 코끼리, 사자, 범, 말 같은 짐승들이 전부 쇼를 할 때, 늑대는 여전히 우리에 갇혀 서커스 천막 매표소 앞에 전시되어 지나가던 꼬맹이들과 동네 양아치들한테 돌을 얻어맞기 십상이다.

  어느 한밤. 전립선이 뒤숭숭한 아빠가 자다가 오줌 마려워 깨 보니 글쎄 moi가 없다. 아빠는 갑자기 잠이 확 깨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moi를 찾기 시작했다. 다른 트레일러 여기저기서 전부 등불을 켜고 어릿광대, 곡마사, 곡예사, 여자들, 아이들이 몽땅 잠옷 바람으로 나와 moi를 찾아 일대를 싹싹 뒤진다. 영낙없이 아이를 잃어버린 줄 알았겠지. 결국 고모가 moi를 찾았다. 늑대 우리, 말이 ‘우리’지 어떻게 열었는지 철창을 열고 들어가 털이 부얼부얼하고 그만큼 따뜻한 늑대의 배에 작은 머리를 대고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랬다는 거다. 픽션이니까 가능하지. 절대 길들지 않는 늑대의 배를 베고 자는 거. 늑대는 moi가 여덟 살 때 죽는다. 서커스단이 다음 공연장 아를에 도착하기 직전에.

  아를에 천막을 친 날 밤. 또 moi는 사라졌다. 잠옷을 입은 채 늑대 묻은 곳을 찾아. 아를에서 8~15km 떨어졌다고 썼는데 여덟 살 아이가 깜깜한 밤에 밤새도록 걸어가면 도착할까 말까 할 거리. 결국 도저히 어디에 묻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근처 작은 마을에서 멈췄다. 여기서 만난 뚱뚱하고 선한 사마리아 여인. moi는 자기 이름이 프륀 아망동이라 거짓말한다. 프륀, 자두. 사마리아 여인은 moi를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이곳에서 moi는 평생 즐기게 될 음악을 처음 만난다. 슈베르트. 여인은 간호사. 동네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서 주사를 놔주고 돈을 얻어 바그너, 라벨, 슈베르트의 음반을 산다. 하루 종일 제법 크게 틀어놓고 음의 물결 속에서 거니는 걸 좋아한다. 음악은 방에서 자고 있는 은퇴한 남편 파티시예 때문에 듣기 시작했다.

  이후 moi도 음악을 듣는다. 알파와 오메가는 역시 바흐. 바흐의 사진을 보면 뚱뚱하다. 그래서 moi는 바흐를 ‘뚱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제일 마지막도 뚱보가 작곡한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악보로 끝낼 정도로. 알파와 오메가.


  이후, 그러니까 늑대가 죽은 다음부터 moi는 거의 상습적으로 가출을 시도한다. 이건 부모 생각이고 자기가 가출로 치는 건 훨씬 이전 부터다. 단지 그들 눈에 띄지 않았을 뿐.

  moi를 안도하게 할 수 있는 남자를 구하고 있다. 바로 늑대. 늑대 같은 남자. 할머니가 해준 1940~45년에 폴란드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들었다. 유대인, 동성애자, 공산주의자, 그리고 moi 같은 집시에게 늑대라면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저지른 것이 바로 인간. 할머니는 말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푸른 수염이 있는 거라고. 여기서 ‘푸른 수염’은 어여쁜 유디트의 새신랑, 푸른 수염의 영주, 사이코 패스이자 괴물을 말한다. 근데 그렇다는 거다. 푸른 수염을 던지긴 했는데 끝날 때까지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다.

  유랑민인 아빠는 moi를 기숙학교에 보낸다. 최선의 선택이었겠지. moi는 라틴어, 국어, 작문에는 따라올 아이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받아내지만 수학, 과학은 젬병이다. 국어와 작문? 그러면 훗날 책을 쓰겠지? 맞다. 그러나 자기 글을 쓰기 전에는 언제나 문청인 남편 로망을 만난다. 이 때가 열일곱 살. 이제 케르보크 여사가 된 moi는 십년이 넘도록 함께 사는 데 성공한다.

  moi의 최고 가치는 자유. 결혼이라는 약한 고리는 moi로 하여금 진정으로 사랑하기에는 과도하게 타인을 모방하는 삶을 살게 한다. 자유는 책임을 담보로 하는 것. moi는 그럼에도 거침이 없다. 부모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moi와 결혼한 로망은 시간이 갈수록 감당하기 힘든다. 작품도 안 되고, moi는 제멋대로이고, 돈은 쪼들리고, 부모한테 손 벌리기는 죽어도 싫고, 싫지만 어쩔 수 없어서 훗날, 바로 옆집에 사는 오케스트라 수석인지 부수석 첼리스트와 밤이면 밤마다 자고 새벽에 기어들어오는 moi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갈라설 때까지. moi는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절대 가치는 자유이기 때문에. 전형적인 프랑스 소설이다.

  건조하게 독후감을 스토리 위주로 썼지만, 이 작품은 결코 스토리를 읽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제일 앞에서 이야기했듯, 문장, 문장, 오직 문장을, 영롱한 화려함, 그리고 부드러움을 감각하기 위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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