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크라카티트
  • 카렐 차페크
  • 16,200원 (10%900)
  • 2020-07-21
  • :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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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2020년 7월에 나왔다. 몰랐다. 다른 작가도 아니고 차페크가 쓴 우리나라 초역 작품이 나왔다는 걸 알았으면 내가 과부 땡빚을 내서라도 사서 읽지 않았겠나? 전혀 몰랐다. 우연히 알라딘에서 차페크를 검색해보니까 처음 보는 책 표지가 떠서, 일단 잽싸게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희망도서는 5년 이상 묵은 책을 구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홈페이지에 대고 정중하게 부탁했지. 읽고 싶은데 이 도시의 다른 도서관에도 한 권도 없다, 2차세계대전 이전 동유럽 대표선수가 쓴 책이 도시의 모든 도서관에 한 권도 없다는 게 섭섭해서, 나야 내가 사서 읽으면 되지만, 그래도 도서관에 한 권 정도는 구비해야 하는 것 같아 신청하니, 삼가 혜량해주시기 바랍니다. 뭐 이런 식으로. 그랬더니 하루 지나 담당자한테 전화가 와 사주겠다고 해서, 읽었다. 혹시 속으로 욕했을까? 아니겠지. 목소리가 상냥한 걸로 봐서. 나 다니는 도서관 사서들은 다 친절하다.


  이렇게 조금 복잡한 경로를 거쳐 읽은 <크라카티트>. 출판사 “행복한책읽기”가 체코공화국 외무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외국어대학교 체코∙슬로바키아어과 명예교수 김규진에게 번역을 부탁해 찍은 책이다. 읽은 지 오래 되어 자세한 기억이 나지 않지만 김규진이 번역해 같은 출판사에서 낸 <압솔루트노>도 이 정도의 번역은 아닌 걸로 짐작하는데, 이번엔 해도 너무 했다.

  먼저 우리말 문장이 후지다. 지극히 한정된 단어만 사용해서, 체코어를 우리말로 완전히 직역해 써 놓은 듯하다. 두번째로 정말 욕 나올 정도로 교정/교열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체코공화국 외무부장관이 다행히 우리말을 읽지 못해 망정이지, 이 책을 우리말로 읽었으면 당장 서울에서 체코공화국 대사관을 철수시켰을 수도 있겠다. 기껏 번역료를 보태주었건만 이 따위로 책을 내? 이러면서.

  책 읽다 보면, 한 페이지에, 좀 과장해자면, 열 번 정도 오자가 나오지 않으면 섭섭해지더라니까. 참 다양하게 오탈자가 출몰하는데, 이게 심하면, 아마 다들 같은 경험이 있겠지만, 몰입해 읽는 데 짜증, 왕짜증이 난다. 근데 이 책은 그 경지를 넘어 독자가 해탈 부근까지 걷게 만든다.

  물론 아니겠지만, 당연히 의심하는 건 아닌데, 김교수가 진짜로 번역을 했나? 아니면 애먼 대학원생들에게 용돈 좀 주고 너는 여기서 여기까지, 또 너는 여기서 여기까지, 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쓸데없이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 혹시 다른 역자도 초역은 이 정도 수준으로 해서 가져다주는지 그것도 궁금했다. 이러고도 번역료를…, 아이고, 이 말은 취소, 취소.

  이 책은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많은 오탈자가 나올 수 있는가, 하는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원생이 읽으면 딱 좋을 수준이다. 박사 말고 석사학위 취득용이 적당하겠다.

  내가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 아시겠지? 아득바득 우겨서 희망도서로 시내 20개 크고 작은 도서관에서 유일하게 비치하게 만든 책인데, 쓰, 힘들게 책 들여놓은 내 꼴이 뭐가 되느냐고!


  트라카티트. 20세기 전반부에 발명한 최고의 살상무기인 원자폭탄이 진짜로 출현하기 전인 1924년에 동명의 제목으로 차페크가 만든 원자폭탄의 명칭이다. 정확하게는 원자 폭발물. 최초라니까 그러면 원자폭탄의 아버지도 있을 것. 그의 이름은 프로코프. 대장장이 아버지 아래 태어나 체코 최고의 명문 프라하 공과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학사 출신의 폭탄 엔지니어.

  프로코프는 무슨 록히드 마틴이나 한국화약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게 아니라 자기 연구실에서 소소한 폭발물을 만들어 주로 광산하는 사람들의 암반 폭파 목적으로 공급해 돈을 벌었다. 작품 내내 돈을 활수하게 쓰는 것을 보니 제법 많이 번 모양이다. 주인공이니까 당연히 천재급 두뇌를 보유했고, 자기 전공분야에 관한 한 소년이로학난성 일촌광음불가경의 자세로 백두산석마도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암만. 천재라는 수식은 70퍼센트의 노력을 동반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이니까.

  그러던 어느 날, 점심밥도 미루며 열심히 실험을 하다 새로운 폭발물을 조금 만들었다. 이 가운데 15센티그램, 즉 0.15그램을 도자기 항아리에 보관해 자기 품 안 속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가루 조금은 답배갑에 담은 다음, 그래도 남은 부스러기는 그냥 책상 위 아연 접시에 남겨 놓았다. 그런데 이 미량의 가루가 아무런 폭발의 원인을 제공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만 갑자기 무지무지한 폭발을 해버려 프로코프도 여기저기 부상을 입은 채, 당연히 불도 났으니까 겁도 나서, 허겁지겁 체코 시내로 도망해버렸다.


  이 폭발물 트라카티트로 말할 것 같으면, 거의 모든 물질을 재료로 만들 수 있다. 물질 속 에너지, 즉 원자가 결합한 상태는 무서울 정도로 강력하다. 근데 이 원자의 내부가 느슨해지기만 하면 물질 에너지가 꽝! 폭발을 해버리는 것. 1920년대에는 우라늄이니 플루토늄이니 하는 걸 잘 몰라서 모든 원소의 원자로 폭발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거나, 소설 즉 픽션이라 그렇게 썼을 수도 있다. 어찌 됐건, 프로코프는 원자의 폭발성을 실험을 통해 직접 확인한 셈이고, 나름대로 결론을 낸 바, 이건 열화학이 아니라 파괴적인 화학, 파괴화학이었던 거다. 뭐 이 폭발 현상에 대해 좌르륵 써 있지만 그걸 극단적으로 요약하면 이렇다는 말이다.

  프로코프가 프라하 변두리에 도착했을 때는 폭발로 인한 후유증과 오른손에 제법 큰 상처가 나 심신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 그러면서 폭발을 확인하기 위하여 경찰이 출동했을 것이 틀림없으니 일단 경찰권의 눈에 띄면 곤란해지겠다. 잔뜩 쫄아서 고개를 잔뜩 웅크리고 간신히 보도를 걷다가, 앞깃을 올려 최대한 자기 얼굴을 가리고 지나가는 남자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서로 비껴 지나가다 뒤를 돌아보니 그 남자도 자신을 보고 있다. 좀 더 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니까 또 그 남자도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 그러다가 뚜벅뚜벅 프로코프한테 다가와 말하기를, 

  “어이, 프로코프! 나 몰라보겠어? 나 토메시야, 이르지(애칭 이르카) 토메시. 우리 같은 공과대학에 다녔잖아.”

  시골 티나체에서 개업의사를 하는 아버지의 1남1녀 가운데 맏이이자 세상에 둘도 없는 난봉꾼인데 그런 기미를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프로코프가 부상당했고, 지칠대로 지친 걸 알고나서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자기 아파트로 환자를 데려간다.

  침대에 널부러진 프로코프는 겨우 미음에 잘게 썬 백김치 정도만 먹을 수 있었고, 열이 40도까지 치솟아 환각도 보고, 원래 좀 미친놈이긴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연구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토메시한테 비몽사몽 다 읊어준다. 열이 펄펄 끓는 처지에도 실눈을 떠 보니 토메시가 자기가 한 말, 화학 구조식, 트라카티트 제조방법을 전부 종이에 받아 적고 있는 기미가 보였다.

  아하, 내가 뭔가를 누설했구나.

  누설했다. 토메시는 트라카티트를 만드는 공장을 너하고 나하고 합작해서 만들자는 제안을 하더니, 지금 당장 자기는 돈이 없어 티나체에 가서 아버지한테 돈을 뜯어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쇠뿔도 단 김에 뺀다고, 지금 당장 떠나겠다더니 정말 가버렸다.

  “내일 아침에 가정부가 와서 너를 병원으로 데려갈 거야. 몸조리 잘 하고 있어라.”


  돈을 얻기 전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떠난 토메시.

  지금 당장은 몰랐지. 그 새끼가 프로코프 품 안에 있는 도자기 항아리, 15센티그램, 즉 0.15그램의 크라카티트를 훔쳐 달아났다는 것을. 토메시는 트라카티트와 프로코프가 비몽사몽간에 얘기한 방정식을 갖고 어디로 갔느냐? 체코와 그리 멀지 않은 공국, 리히텐슈타인? 정확한 국명은 나오지 않지만 전체주의 국가로 가서 전대미문의 폭탄 트라카티트를 데모 시연하고 돈을 왕창 벌었다. 이에 흥분한 공국의 연구소장 카슨한테 프로코프에 관해, 그의 연구와 대량 생산의 가능성에 대하여 설레발을 왕창 풀었음을 물론이다.

  그런데 아뿔싸, 실험에 참가한 연구원 한 명이 나머지 100그램이 든 도자기 항아리와 제조법 사본을 들고 튀었다. 누구한테 튀었나 하면 공국의 연구소가 있는 성에서 또다른 전체주의 국가의 도시 크루투프에 있는 연구소로. 하지만 프로코프가 짱구냐? 아무리 제조방법과 방정식 같은 걸 다 적어갔다고 하더라도 핵심 공정을 건너 뛰어, 토메시는 진짜 크라카티트를 만들기는 만들지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린다. 그리고 만든 순간 토메시는 폭망해버린다. 그건 아주 뒷장면.


  이후 프로코프는 토메시를 찾기 위하여 베일을 쓴 토메시 애인의 말과 부탁을 듣고 그의 고향집이 있는 티나체로, 다시 프라하 인근 자기 연구소를 거쳐 공국의 성에 있는 연구소, 크라카티트에 관한 정보를 죄다 들은 공국의 귀족이지만 아나키스트인 타타르족 친척 다이몬한테 갔다가, 마지막으로 진짜 토메시가 일하는 크루투프로 찾아간다. 베일을 쓴 여인의 부탁을 완료하기 위하여.

  이 과정에 프로코프는 베일을 쓴 여자, 티나체에 살고 있는 토메시의 여동생 안둘라(애명 안치), 공국의 성에 사는 공주를 사랑하고, 안치와 공주도 그를 사랑하는데, 이거 너무 장황해 별 재미없다. 야하기나 했으면 읽는 재미라도 있지.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해 대규모로 인류를 살상할 수 있는 토메시와 크라카티트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 근데 차페크가 이걸 코미디로 쓴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원래 차페크가 오른쪽 주머니, 왼쪽 주머니 같은 농담 시리즈도 써서 더 그런 생각을 했겠지만, 곳곳에 코믹 장면을 배치한 것이, 아무래도 인류 멸망 가능성을 가진 원자폭탄과 어울리지 않았다. 하여튼 나는 그렇게 읽었다.

  다른 역자가 다시 번역하면 또 읽어볼까? 그래도 관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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